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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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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스터즈가 방탄소년단을 만날 때

여성 아티스트 위상 커지며 빌보드 휩쓴 여풍

전세계 소녀 팬들은 방탄소년단 존재감 키워
등록 2018-05-29 17:07 수정 2020-05-03 04:28
5월20일 열린 ‘2018 빌보드 뮤직 어워즈’에서 방탄소년단이 공연을 펼치고 있다. AP 연합뉴스

5월20일 열린 ‘2018 빌보드 뮤직 어워즈’에서 방탄소년단이 공연을 펼치고 있다. AP 연합뉴스

걸그룹 전성시대다. “트와이스가 제일 좋다”는 10살배기 딸은 등 히트곡이란 히트곡은 죄다 따라 부른다. 레드벨벳은 아예 평양까지 가서 북한 관객에게 문화적 충격을 안기며 화제를 만들어냈다. 이런 날이 오기까지 초석을 다진 이들로 젊은 세대는 흔히 1997년 데뷔한 S.E.S.와 1998년 데뷔한 핑클을 꼽는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원조 걸그룹 ‘저고리시스터’

(안나푸르나 펴냄)은 최규성 한국대중가요연구소 대표가 최근 내놓은 책이다. 음반 수집광인 그는 모아온 자료와 매체 인터뷰 등을 통해 국내 걸그룹 300여 팀의 존재와 역사를 시대순으로 정리했다. 그가 소개하는 걸그룹의 역사는 83년 전인 193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 걸그룹 역사에서 최초로 공식 이름을 지닌 팀이라는 ‘저고리시스터’다. 저고리시스터는 일제강점기 조선악극단 소속 여가수들로 구성됐다. 주로 5~6인조로 공연을 벌인 프로젝트 걸그룹의 성격이 강했다고 한다. 로 유명한 이난영이 리더 격이다.

이들의 공식 음반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한참 뒤인 1950년대에 데뷔한 ‘김시스터즈’를 한국 최초의 공식 걸그룹으로 보는 이유다. 김시스터즈에도 이난영의 손길이 닿아 있다. 이난영의 두 딸과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의 딸이 김시스터즈의 세 멤버이기 때문이다. 이난영이 키워낸 김시스터즈는 미8군 무대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들의 인기는 멀리 미국까지 전파돼 아예 정식 계약을 맺고 미국에 진출했다. 1959년 김시스터즈는 미국에 진출한 아시아 최초의 걸그룹이 됐다. 2009년 미국에 진출한 원더걸스보다 50년이나 앞선 ‘원조 한류’였던 셈이다.

김시스터즈는 라스베이거스에서 매일 밤 9시부터 새벽 5시까지 강행군을 이어갔다. 공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다리가 퉁퉁 부어 계단을 기어올라야 했다는 얘기까지 전해진다. 한국에서 노래만 했던 이들은 미국 현지 수많은 보컬그룹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악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색소폰, 베이스기타, 드럼을 중심으로 각자 10여 가지 악기를 연습하고, 끝내 연주해냈다. ‘동양의 요정’ ‘다이나마이트 걸트리오’란 별명을 얻은 이들은 당시 미국 최고 인기 TV 토크쇼 까지 진출했다.

김시스터즈의 폭발적 인기에는 “신비로운 동양의 여성들”이 미국인들에게 익숙한 그들의 대중음악을 했다는 점도 한몫했다. 음악보다도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온 독특한 매력의 여성에 더 큰 포커스가 집중된 것이다. 대중문화의 속성상 ‘무엇을 하느냐’뿐 아니라 ‘누가 하느냐’도 중요하다지만, 김시스터즈의 인기 열풍에선 유독 이런 요소가 두드러졌다. 이때 만들어진 한국 걸그룹의 특별한 이미지는 훗날 원더걸스의 미국 진출에도 영향을 끼쳤다. 원더걸스가 복고풍 의상을 입고 복고 댄스를 추며 선보인 로 2009년 미국 진출에 성공한 건 우연이 아니다. 원더걸스는 한국 가수 최초로 빌보드 ‘핫 100 차트’에 76위로 진입하는 성과를 올렸다.

여성 음악인들의 위상 변화

김시스터즈가 꼭 59년 전 처음 공연했던 도시 라스베이거스에서 지난 5월20일(현지시각) 열린 ‘2018 빌보드 뮤직 어워즈’를 보며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먼저 여성 음악인들의 변화된 위상이 눈에 띄었다. 미국에서도 문화계 주류는 남성이 차지해왔다. 영화계를 대표하는 아카데미 시상식이나 음악계를 대표하는 그래미 시상식이 너무 남성 중심이라는 비판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날 빌보드 뮤직 어워즈의 분위기는 달랐다. 첫 무대의 막을 연 아리아나 그란데를 시작으로 두아 리파, 노르마니,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데미 로바토, 제니퍼 로페즈, 매런 모리스, 재닛 잭슨, 케샤, 켈리 클락슨, 카밀라 카베요, 마지막 대미를 장식한 여성 3인조 힙합 그룹 솔트 앤 페파까지, 15번의 축하 무대에 참여한 여성 가수는 14명이나 됐다. 이날 시상식은 여성 가수들에게 바치는 헌사나 마찬가지였다. 시상식 사회자는 켈리 클락슨이었다.

‘톱 여성 아티스트’상과 ‘톱 셀링 앨범’상을 받은 테일러 스위프트는 “지금 여성 가수들로 꾸린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모든 여성 아티스트들, 또 새롭게 탄생할 신인 여성 아티스트들에게 감사한다”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빌보드 아이콘 어워드’를 받은 재닛 잭슨은 “어떤 역경이 있어도 마침내 여성들이 더는 억압받지 않는 순간에 살고 있다. 조종받지 않고 이용되지 않는 여성의 삶을 살고 있다. 그 여성들과 함께하겠다. 그리고 마음으로 응원해주는 남성들과도 함께하고 싶다”는 수상 소감을 밝혔다. 남성 중심주의가 공고했던 음악계에서 여성 음악인들이 주체적으로 나서며 연대하는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방탄소년단이었다. 한국의 아이돌 그룹은 쟁쟁한 팝스타들을 제치고 시상식 맨 앞줄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카메라는 이들을 시시때때로 비췄고, 이들은 2년 연속 ‘톱 소셜 아티스트’상을 받았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끝에서 두 번째 축하 무대를 장식한 것도 방탄소년단이었다. 사회자 켈리 클락슨이 방탄소년단을 소개하자 공연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으로 뒤덮였다. 다양한 피부색의 소녀 팬들이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따라 부르는 모습이 곳곳에서 포착됐다. 국내 아이돌 그룹 공연장에서 볼 법한 광경이 세계적인 팝 음악 시상식에서 펼쳐진 것이다.

방탄소년단이 세계적 인기를 얻으며 주류 음악시장으로 진입한 데는 케이팝의 장점에다 세계적 트렌드를 더한 음악의 완성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효율적 활용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그에 못지않게 주목하는 것은 전세계 소녀 팬들의 움직임이다. ‘아미’(방탄소년단 팬클럽)의 힘과 문화는 전세계로 확장됐고, 이제는 주류 음악시장과 언론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됐다. 방탄소년단을 사랑하는 팬들의 힘이 커질수록 방탄소년단의 존재감은 더욱 커졌다. 대중문화의 적극적 소비 주체로서 여성의 힘을 세계적으로 증명한 사례가 아닐까 싶다.

이 시대 김시스터즈가 나온다면?

다시 김시스터즈를 떠올려본다. 여성 아티스트의 위상과 여성 문화 소비자의 힘이 부쩍 커진 이 시대에 김시스터즈가 나온다면 어떻게 됐을까? 단지 신비로운 동양에서 와 호기심을 부르는 여인이 아니라, 열정과 능력과 매력을 갖춘 아티스트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결과를 예측하긴 힘들지만, 왠지 방탄소년단의 당당한 모습 위로 환하게 웃는 김시스터즈의 얼굴이 자꾸만 겹쳐 보인다.

서정민 문화부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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