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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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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인멸의 비

등록 2017-09-05 18:42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돈 몇 푼에. 부끄럽수다. 부끄럽수다. 남편 생각하면 가슴 미어져 죄인처럼 살았는데. 큰돈도 아니고. 앞으론 더 노력해보겠수다.”

목백일홍 왁자하게 눈부신 그늘 아래 백발의 93살 할머니가 한사코 손사래 쳤다. 이상숙 할머니. 마른 목소리가 울고 있었다. “여기는 대학살을 감행한 후 증거인멸을 위해 유품들을 불태웠던 장소이다….” 8월28일, 견우직녀 만난다는 칠월칠석. 제주 서귀포시 모슬포 섯알오름 학살터 진입로에서 기념물 제막식이 열렸다. ‘증거인멸의 비’라니!

1950년 칠월칠석 새벽녘, 길가엔 검정고무신, 허리띠 등이 즐비했다. 모슬포 마을길을 지나 신사동산 넘어갈 때였다. 한국전쟁 시기 예비검속이란 이름으로 불법 구금된 이들 중 트럭에 태워진 주민 200여 명은 그렇게 자신의 것을 던지며 마지막 가는 길을 알렸다. 송악산 인근 섯알오름 탄약고터. 유족들이 달려갔을 땐 이미 한날한시에 희생된 이들이 남긴 모포, 신발, 옷가지 등 증거물을 군이 태우고 있었다. 증거인멸. 누구든 함부로 주검에 손댔다간 목숨이 위태로웠다.

부끄러운 언론의 얼굴로

6년여 만에 겨우 주검 수습. 한 구덩이에 시산을 이룬 그것들은 엉겨 붙어 누구의 뼛조각인지 알 수 없었다. 유족들은 132구로 만들어 ‘일백조상에 한 자손의 묘역’이란 이름으로 ‘백조일손지지’라 이름 붙였다.

맨 처음 달려가 남편의 주검을 확인한 이가 바로 이상숙, 그녀. 스물네 살 초등학교 교사이던 남편은 그렇게 갔다. 자식 하나 남기지 못한 채. 남편의 죽음은 그녀의 삶을 바꿔놓았다. 그날 이후 67년. 이 할머니가 백조일손유족회에 4500만원을 기부했다. 유족들은 증거인멸의 비와 그날 희생자들이 남긴 소지품을 조형물로 재현해 참혹한 역사를 기록했다.

기록은 힘이 셌다. 영상은 할 말 하려는 언론인을 ‘좌파 편향’으로 몰아붙이는 공영방송 사주들의 뻔뻔한 얼굴을 기록했다. 등 뒤의 최고 권력과 공범한, 증거인멸을 시도하는 시대의 기록이기도 했다. 거기엔 쫓기는 자와 쫓는 자, 침묵하는 자와 침묵하지 않는 자, 얼굴을 가리는 자와 가리지 않는 자, 정의에 심장이 뛰는 자와 외면하는 자, 누추하게 늙는 자의 얼굴이 있었다. 다큐멘터리영화 은 언론 장악을 시도했던 그 증거다.

기자는 현장을 기록해야 하는 운명을 선택한 이들이다. 영화 의 실제 인물인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는 아마 광주의 5월을 듣는 순간 심장이 뛰었으리. 국민의 귀와 입이 되지 못할 때 언론은 언론이 아니다. 더 이상 현장이 가슴을 뛰게 하지 않을 때, 그땐 이미 언론인이 아니다. 언론이 권력의 공범자가 될 때 언론은 더 이상 언론이 아니다. “언론이 질문하지 못하면 나라가 망합니다.” 최승호 감독의 말이다. 그러나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는 부끄러운 언론의 얼굴로 살아야 했던가.

어디선가 양심과 증거는 살아 있으니

한국전쟁 전후 예비검속의 소용돌이에 불법적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지역이 어디 한둘이랴. 그리고 모든 국가 범죄에서 증거인멸, 은폐, 부인이 수순처럼 이뤄진다. 국가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언론에 재갈을 물리던 민간인 학살 현장에 기자는 갈 수 없었다. 국가 스스로 수많은 고통의 현장들 앞에서 증거인멸을 시도했다. 하지만 증거는 곳곳에 박혀 있다. 그것은 절대 지워질 수 없다. 인간의 눈에, 인간의 마음에 한번 화인처럼 박힌 한. 묻으려 해도 진실은 계속 터져나오지 않는가. 5·18의 진실, 세월호의 진실, 블랙리스트, 지우려 해도 살아나지 않는가. 어디선가 모든 양심과 증거는 살아 있으니.

정권의 공범자들이 지우려 했으나 증거는 불사조처럼 나타났다. 태워버려도, 흔적을 지워도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 공영방송은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파업으로 싸움을 벌이고 있다. 또 한번 뜨겁던, 촛불혁명의 그 계절을 기대한다. 그건 함께 모여 소리를 낼 때라야 한다. 그 목소리가 대하를 이루고, 어둠을 뚫고 얼마나 멀리 가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니.

허영선 시인·제주 4·3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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