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묘한 일이야. 사랑은….”
저 멀리 무대에서 ‘디 에이드’(옛 어쿠스틱콜라보)가 를 부른다. 맞다. 묘한 일이다. 1시 방향, 돗자리 건너에 있는 남녀가 하는 ‘짓’을 보니 묘한 게 맞다. 언뜻 보기에 20대 중반쯤? 노래를 따라 박자를 타던 둘의 어깨 간격이 점차 줄어들더니 이내 딱 붙는다. 그러곤 얼굴이 포개진다. “어린 것들이~.” 욕이 턱밑까지 올라왔다가 돌아간다. 부러우면 지는 거니까.
“티켓은 꼭 짝수 예매”라는 편견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잔디마당에 마련된 무대는 북쪽. 해는 조금 전 정남쪽을 지났으니 이들의 생김새가 그대로 보이는 건 당연지사. 어차피 남들 시선은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다. 무대에서 안다은이 “모든 시간 모든 공간 내 주위엔 온통 너뿐인 것” 같다고 노래하는데 무엇이 문제겠는가. 뮤직비디오가 따로 없다. 21세기는 멀티미디어 시대. 9시 방향, 11시 방향에서도 감독과 배우를 달리해 생방송이 송출된다.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는다. 난 공연을 보러 왔으니까. 부러우면 지는 거다.
그렇다. 나는 (굳이 분류하자면) ‘혼공족’이다. 혼자 공연을 보러 다닌 지 5년쯤 됐다. 가끔 질문을 받는다. 혼공이 ‘혼밥’이나 ‘혼술’보다 어렵지 않냐고.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큰 차이 없는 듯하다. 혼자 밥 먹거나 술 마시러 식당에 들어가듯이 혼자 공연장에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닌가. 아싸! 정신 승리!
물론 처음부터 혼자 다닐 생각은 없었다. 난 대한민국에서 정규 교육과정을 이수한 30대 ‘헤테로’ 남성. 이들에게 공연이란 마음에 품은 이성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는 수단 아니던가. 자습 시간 교복 속에 이어폰을 넣어 선생님 몰래 듣던 오아시스, RATM, 메탈리카 같은 외국 밴드의 내한 공연이 아니라면 굳이 티켓 예매 사이트를 들락날락하지도 않을 남자들 말이다.
나도 비슷한 축에 속했다. 그렇다보니 예전에 만나던 친구를 종종 시험에 들게 했다. 가령 “자기야, ○○○ 콘서트 한대”라는 말. ‘가자는 거니 말자는 거니?’
그럴 때 친구들은 ‘○○○ 콘서트 R석을 예매하지 않는다면 넌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걸로 이해할 거야’를 모범답안이라고 제시했다. 그러나 툭하면 10만원을 훌쩍 넘는 티켓 값은 은근히 부담이었다. ‘그 돈이면 바카르디를 마시지….’ 게다가 TV나 라디오에 자주 나오는 가수가 아니라면 좀체 이름도 외기 어려웠다.
물론 이런 변명이 쉽게 통할 리 없었다. ‘여자의 마음을 잘 이해 못하는 남자’로 낙인찍힌 내겐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다. 예컨대 고기로 다져진 육식 체질을 채식으로 개선하려는 하드 트레이닝이랄까. 그 무렵부터 인디밴드나 인디가수들의 노래를 찾아 듣기 시작했다. EBS 은 그런 노래들의 보고였다. 계속 들어보니 좋았고 신났다. 때론 가슴을 후벼 팠고. ‘브로콜리 너마저’ ‘노 리플라이’ ‘에피톤 프로젝트’ ‘페퍼톤스’ 같은 이름이 친숙해진 건 그 무렵이다.
티켓은 꼭 짝수로 예매해야 한다는 뿌리 깊은 ‘편견’도 그즈음 사라진 것 같다. 그래서일까. 슬슬 간이 배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자기야, 정준일 공연 갈래?”(나) “나 그날 시골집에 다녀와야 하는데….”(상대) “그래? 아쉽네. 그러면 나 혼자 다녀올게.”(나) “….”(상대)
한자리에서 혼밥, 혼술까지트레이닝의 부작용인가. 차라리 혼자 다니는 게 편하다는 걸 알아버렸으니….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 같은 곳에 갈 때면 더 그렇다. 서너 곳에서 동시에 여러 가수가 공연하니 좋아하는 가수를 두고 신경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자기야, 메인 무대에 스윗소로우 나올 차례야.”(상대) “그래? 수변무대에 가을방학 나오는데…. 괜찮아. 다음에 보면 되지.”(나) 이렇게 답하면 바로 분위기가 냉랭해진다. 2초의 정적에 본심을 들켜버린 탓이다.
괜찮다고 했지만 상대가 몰랐을 리 없다. 온전히 상대의 뜻을 따르거나 햇볕정책을 펼치듯 상대를 포용할 너른 가슴을 갖지 못해서였나보다. 그렇게 간헐적으로 ‘자발적’ 혼공을 택했다. 이후 3년 전쯤부터 선택의 여지가 없는 ‘비자발적’ 혼공족의 삶을 살고 있다. 대상은 제한이 없다. 콘서트뿐만 아니라 뮤지컬, 연극도 끌릴 때면 봐야 직성이 풀린다. 보고 싶은 뮤지컬인데 한국에서 공연할 가능성이 없을 듯해 영국 런던까지 날아간 적도 있다. 이런 내게 5월의 페스티벌은 흡사 종합선물세트 같은 존재다. 한낮부터 한밤까지 한자리에서 혼밥, 혼술, 혼공을 모두 즐길 수 있지 않은가.
봄가을에 잔디만 넓게 깔린 곳이면 주말마다 온갖 페스티벌이 벌어진다. 올림픽공원, 한강공원 난지지구, 경기도 가평 자라섬 등은 단골 장소다. 올림픽공원만 해도 올봄에 ‘뮤즈 인 시티’ ‘뷰티풀 민트 라이프’ ‘서울 재즈 페스티벌’ 등이 연달아 열렸다.
물론 주최자는 민트향 내뿜는 블링블링한 언니들을 주 타깃으로 삼겠지. 아니면 상큼하고 새콤한 커플들이 들고 온 파스텔 톤의 돗자리로 잔디밭을 가득 채우는 앵글을 기대하겠지. 군내 날 것 같은 아저씨들이 몰려다니는 모습은 바라지 않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난 의지의 한국인. 이런 주최자의 의도 따위 사뿐히 ‘지르밟아’준다. 여성 팬 많기로 소문난 밴드 데이브레이크도 정작 공연장에 가보면 10%는 남자더라. 소프라노 일색인 떼창에도 간간이 바리톤의 진한 중저음이 들어가줘야 구색이 맞는 법. 몇 년 전 친구들에게 혹시 공연 보러 가냐고 묻기도 했다. 그조차 올해 들어서는 귀찮아졌다. 어차피 맨몸으로 왔다가 홀로 가는 인생, 만날 인연이라면 돌아다니다 마주치겠지.
상대를 핫팩 삼아 붙어 있는 커플들이제는 철저히 나만의 ‘혼공’ 준비물을 챙긴다. 뭘 가져가야 할까. 돗자리, 그라운드체어, 미니 테이블은 기본 구성이다. 여기에 담요, 선크림, 물휴지 등도 챙긴다. 한낮에는 뜨거워서 살이 벌겋게 익을 수 있고 해가 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싸늘해진다. 담요는 필수 아이템이다. 체온을 나눌 사람이 없으니까. 플라스틱통에는 과일을 종류별로 담는다. 유리병 반입을 막으니 와인은 텀블러에 담아 가져간다.
올림픽공원에 도착하면 준비물을 들고 당당하게 입성한다. 잔디밭에 잔뜩 깔린 돗자리 사이로 빈자리를 찾아본다. 너무 앞에 있으면 인구밀도가 높고 너무 뒤는 이벤트 부스를 찾는 사람들로 번잡하다. 적당한 자리에 돗자리를 깔고 음식을 꺼내놓고 와인부터 한잔 따라 마신다.
‘홀짝홀짝~.’
좋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하늘에는 구름이 떠가고, 한동안 서울 하늘을 휘감은 미세먼지도 싹 물러간 듯하다. 공유가 아니면 어떠하리.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다”던 드라마 (tvN) 대사도 읊어본다. 그러다가 잠시 ‘레드 선’. 아뿔싸, 현실로 돌아오니 이곳은 커플 지뢰밭이다. 내 돗자리를 둘러싼 모두가 커플이다. 어린 커플, 농익은 커플, 애 있는 커플, ‘썸타는’ 커플, 사귄 지 얼마 안 된 커플….
주최 쪽에서 돈독이 오른 게 분명하다. 티켓을 오버해서 판 게 아니라면 이럴 수 없다. 3~4년 전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치자. 대낮부터 추워서 상대를 핫팩 삼아 붙어 있는 것도 이해한다. 그래도 예전엔 돗자리 간격이 비교적 널찍해서 ‘사운드’까지 들리지 않았단 말이다.
이대로 계속 충격에 휩싸일 수는 없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사진 한 장 찍어 올리고 집 나간 이성을 소환한다. 불혹이 가까워서일까. 생각보다 빨리 평정심이 찾아온다. 내 목표는 오로지 음악 감상. 마침 하늘도 그 마음을 아셨는지 한 차례 비바람을 퍼붓는다. 잠깐의 비에 바닥은 완전히 젖었다. 지나친 애정 행각을 벌이던 커플들이 어느 정도 눈앞에서 정리됐다. 음악 감상을 하기에 더없는 조건이다. 때마침 무대에 등장한 밴드 소란. 모든 관람객의 마음을 하나로 엮는 북유럽 댄스를 시연한다. 초등학교 운동회를 준비할 때 배운 매스게임처럼 양옆, 앞뒤 사람과 눈길을 나눌 수 있는 대단한 댄스다.
“노래에 따라 왼쪽, 오른쪽, 앞에, 뒤에, 차례대로 손바닥을 마주치면서 인사를 나누면 됩니다.” 보컬을 맡은 고영배의 설명. ‘반골’ 기질이 다분한 나도 이 시간만큼은 그의 리드에 순응해본다. “고마워. 예쁘게 웃으며 얘기해줘서. 내 고백을 받아줘서~.”
아이쿠 아저씨라 미안하다, 얘들아노래 가사에 맞춰 왼쪽을 본다. 남자.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남자. 그다음은 앞으로 팔을 뻗어본다. 안 돌아본다. 너무 나간 팔이 민망해 재빨리 접는다. 이제 마지막 남은 뒤쪽. ‘아이쿠, 아저씨라 미안하다. 얘들아.’ 비자발적 혼공족의 봄날도 이렇게 흘러간다.
박감자 혼공족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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