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설레고 기특하며 눈부시다

인류 역사에서 새롭게 발견되고 발명되는 시기 ‘중년’…

내가 꿈꾸는 모양대로 망가지고 미친 듯이 도전해도 괜찮을 나이
등록 2017-06-08 16:47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여울씨, 시스젠더라는 말 알아요?”

얼마 전 문학상 심사위원으로 한 자리에서 만난 K작가가 물었다. K작가는 나보다 훨씬 윗세대인데 ‘그녀는 알고 나는 모르는 신조어’가 있다니, 질문을 듣는 순간 살짝 위축되고 말았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이 되긴 싫은데, 머릿속에선 어떤 벨도 울리지 않았다. 솔직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진짜 모르겠는데요.”

‘시스젠더’와 ‘읽씹’을 아느냐

그녀는 ‘딱 걸렸다’는 표정으로 환하게 웃으면서 시스젠더(Cisgender)는 트랜스젠더의 반대말이라고 귀띔한다. 트랜스젠더는 몸과 마음의 성이 일치하지 않을 때를 가리키니, ‘몸도 마음도 여성’이거나 ‘몸도 마음도 남성’인 보통 사람들이 다 시스젠더라는 것이다. 동성애자가 이성애자를 ‘헤테로섹슈얼’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트랜스젠더도 ‘우리만 일방적으로 대상화당하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정상인’으로 행세하는 사람을 ‘시스젠더’라 부르는 것이다.

아, 신선한 충격. 이건 정말 멋진 신조어다. 스스로 정상이라고, 보편이라고 믿는 것에 대한 가슴 뛰는 반격 아닐까. 그러면서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난 정말 시대에 뒤떨어져가는구나!’ 요새 나는 신조어나 줄임말에 급속도로 취약해져버렸다. 예전에는 저절로 대화의 맥락 속에서 이해했는데, 이제는 너무 궁금해 시골 영감 처음 타는 기차놀이처럼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어본다. 얼마 전에는 ‘피브이’(PV)란 줄임말의 뜻을 몰라 한참 헤맸다. 알고 보니, 페이지뷰(Page View)의 줄임말, ‘조회 수’의 다른 말이란다.

“미안한데, 그 단어 뜻이 뭐예요?”

내가 신조어나 줄임말의 뜻을 물어보면, 상대방은 약간 실망한 얼굴로, 그러나 친절과 애정을 듬뿍 담아 나에게는 너무도 낯선 그 단어를 설명해주곤 한다. 삼십 대 초반의 아주 싱그럽고 통통 튀는 상상력을 가진 N기자에게 며칠 전 새로 배운 단어는 ‘읽씹’이다. 문자를 읽고도 씹어버리고 답장하지 않는 행위를 지칭하여 ‘읽씹’이라 한다는데, 단어를 듣는 순간 가슴에 강렬한 통증이 전해졌다. 단어의 모양새는 다소 경박한데, 풍기는 뉘앙스는 너무도 처절하다. 어떤 신조어는 차라리 몰랐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듣는 순간 남 일 같지 않고, 불현듯 생살을 도려내듯 가슴이 쓰라리니까.

얼마 전 나도 가슴 시린 ‘읽씹’을 당했다. 몇 달 전 너무도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선배의 빈자리를 채우느라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친구 M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조만간 만나서 밥 한번 먹자고.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선배의 장례식 때 만난 친구의 뒷모습이 깜짝 놀랄 정도로 야위어서, 뒤돌아서는 내 발걸음이 무거웠다. 따뜻한 저녁이라도 사주고 싶은 마음에 여러 번 메시지를 보냈지만, 친구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섭섭한 마음보다는 ‘세상엔 내 힘으로 절대 위로할 수 없는 슬픔이 있다’는 뼈아픈 진실을 힘겹게 받아들이는 중이다. 내가 누군가를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그에게는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10년 전이었다면 엄청나게 섭섭해하고, 어떻게든 그를 만나 위로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결코 어루만질 수 없는 슬픔의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안다. 누군가를 하염없이 걱정하는 마음보다는, 이런 내 걱정에 반응조차 하기 힘든 상대방의 슬픔이 더 크다는 것을 안다.

신을 닮은 지혜와 이성

이렇게 마음속으로 호된 마흔의 신고식을 치르는 요즘, 어떻게든 ‘점점 위축되는 마흔의 멘털’을 회복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중년의 창조성’에 대한 자료를 열심히 모으기 시작했다. 중년이 단지 쇠락과 후퇴의 시기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과 창조적 영감의 시기이기도 하다는 점을 알려주는 사람은 없을까.

나는 ‘중년’이라는 키워드로 책을 검색해보다가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우리는 중년에야 비로소 신을 닮은 지혜와 이성과 기억력을 갖는다!” 눈이 번쩍 뜨인다. 중년이 쇠락기가 아니라 오히려 인생의 전성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뇌과학, 생물학, 심리학, 인류학의 힘을 빌려 설명한 (데이비드 베인브리지, 청림출판, 2013)이란 책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책이다 싶어 내 방 책꽂이를 살펴보니 이미 오래전에 사놓고 ‘아직 내가 중년은 아니잖아’라는 안일한 자기방어 때문에 밀쳐둔 책이었다. 다시 읽기 시작한 은 기대 이상으로 흥미로웠다. ‘중년’ 하면 ‘빈둥지증후군’이나 ‘폐경기’ 같은 우울한 단어를 먼저 떠올리는 우리에게 이 책은 ‘중년이란 오히려 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진정한 전성기’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빠르게 생각하고 민첩하게 행동하는 청년기와 달리, 중년은 ‘천천히, 다르게 생각’함으로써 더 현명한 대답을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얼마 전 술자리에서 일어난 일이다. ‘중년이 쇠락의 시기만이 아니라, 창조성과 유연성이 극대화되는 시기일 수도 있지 않느냐’라는 이야기를 하니, 주변 사람들 반응이 완전히 ‘흑’과 ‘백’으로 양분되었다.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인식을 중시하는 친구들은 이렇게 말했다. “에이, 네가 속은 거야. 솔직히 중년이 뭐가 좋냐? 중년을 예찬하는 논리가 있다면, 그건 이제 중년에 접어든 사람들을 더욱 알뜰히 부려먹기 위한 술책일지도 몰라.” 그들만큼 냉철하고 현실적이지 못한 나는 왠지 슬퍼졌다. 나는 이왕 맞아버린 중년, 기왕 먹어버린 마흔, 되도록 즐겁고 행복하게 맞이하고 싶다.

심지어 ‘이제 갓 마흔을 넘겼으면서, 마흔에 관해 글을 쓴다는 것이 무섭지도 않냐’며 연재를 만류하는 친구도 있었다. 물론 무섭다. 하지만 이 두려운 프로젝트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먼 훗날 노년기에 접어들어 ‘이미 다 지나온 중년’에 대해 사후적으로 평가하는 글이 아니라, 지금 중년의 문턱에 접어들면서 생생하게 느낀 싱그러운 감정과 에피소드를 ‘바로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이미 아는 것을 정리하고 다듬는 글이 아니라, 매일매일 새로 깨우쳐가는 삶의 진실을 꾸밈없이 생중계하고 싶다. 오래전에 느꼈던 감정을 더듬더듬 찾아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느낀 것을 여러분께 전달하고 싶다. 그래서 더욱 떨린다. 그래서 더욱 설렌다.

나는 중년을 인생 최고의 전성기로 잡고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모범생 마흔이 되기는 싫다. 가끔은 우울한 감정에 빠져 있고 싶기도 하고, 어울리지 않는 객기도 부려보고 싶고,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실패를 하염없이 곱씹어보고 싶기도 하다. 창조성이나 생산성을 위해 내 소중한 권리, 예컨대 ‘마음대로 망가질 권리’를 포기하긴 싫다. 다만 이제 중년에 가까이 다가왔다는 이유만으로, 무언가에 새롭게 도전하는 삶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바느질하는 중년 남자

며칠 전에는 ‘중년이 인류의 역사에서 새롭게 발견되고, 동시에 지금도 발명되고 있는 시기’라는 나의 논지에 적극 찬성하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년에 뭔가 새로운 것,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것을 시작한 경험을 고백하는 분도 있었다. 마흔셋에 가죽공예를 시작했다는 S선배는 ‘어느 날 갑자기 바느질하는 남자’가 됨으로써 자신이 새로 태어나는 기분을 느꼈다고 이야기했다. 어릴 때는 방패연도 만들고 썰매도 만들어보았지만, 나이가 들고 나서는 ‘손으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 자체와 멀어졌는데, 이제 ‘내 손으로 무언가를, 그것도 세상에 하나뿐인 무언가를 한땀 한땀 만들어간다는 것’의 기쁨을 누려보니, 매너리즘에 빠진 삶을 되돌아보는 여유가 생겼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직접 만든 지갑이나 가방을 선물하면서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뿌듯함을 느끼기도 한다고. 이 이야기를 조용히, 그러나 흥미롭게 듣던, 이제 50대 초반에 접어든 H기자가 갑자기 큰소리로 자신의 무릎을 탁 쳤다. 말 붙이기도 어렵고, 새치름한 인상을 풍기던 그분이 갑자기 얼굴이 환해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 가죽이야! 나도 가죽공예를 배워야겠어! 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웃음보따리가 터졌다. 분위기 그윽하게, 살짝 우울한 침묵을 지키던 그가 어린애처럼 환한 미소로 ‘나도 바느질하는 남자가 될 테야!’라는 굳은 결의를 보였기에.

알고 보니 H기자는 51살에 첫딸을 맞이했다. 이제 갓 돌을 넘긴 딸을 바라보며 그는 얼마나 많은 상념에 잠길까. 그는 고백했다. 딸이 너무 예뻐서 오히려 무섭다고. 남들은 ‘귀여운 딸 좀 자랑해보라’고 부추기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며칠 전에 택시를 탔던 에피소드를 전해준다. ‘동대문운동장’이란 단어가 생각이 안 나서, 옛 이름인 ‘서울운동장’을 이야기했다고. 그랬더니 택시 기사가 이렇게 말했단다. “아유, 선생님. 요새 사람들은 ‘서울운동장’ 모르는데. 서울운동장이라고 하시는 걸 보니, 이제 인생 내려가는 일만 남았네요.” H기자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우울했다고 한다. 나 정말, 내려가는 일만 남은 걸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겠는가. 직장에서는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고, 집에서는 어린 딸이 천진난만하게 방긋방긋 웃고, 마음에서는 ‘중년의 위기’라는 단어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그러다가 갑자기 ‘나도 가죽공예를 배워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그의 표정에는 전에 없던 활기가 피어올랐다. 중년이란 이런 것이구나. ‘내려가야 한다’는 주변의 압박에 괴롭다가도, 뭔가 충분히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시기. 어쩌면 예전보다 훨씬 더 지혜롭고 활기차게,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중년이다.

그래, 중년은 노년의 앞 페이지에 살짝 끼워진 부록이 아니다. 어쩌면 가장 지혜롭게 삶을 바꿀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중년이다. 청년처럼 다급하지 않게, 노년처럼 마음과 몸의 거리가 너무 많이 멀어지지 않게. 결코 내려가는 일만 남은 것이 아니다.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젊은 시절과 달리, 이제 어떤 조직에 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나 자신이 되기 위해 새롭게 자신을 단련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가 열리는 시기다.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올라가기만 하는 시기가 아니라, 우리가 올라온 봉우리의 넓이와 깊이까지 헤아릴 수 있는 시기다. 마음속에서 분명히 들리는 소리를 ‘참, 나이 들어 주책이구나!’라는 식으로 타박하지 말고, 마음이 외치는 대로 따라가보자. 내 방의 공간 배치부터 필요나 습관 때문이 아닌 ‘내가 꿈꾸는 모양’대로 바꿔보고, 혼자만의 여행도 훌쩍 떠나보고, ‘뭔가 내 손으로 만지고, 직접 느낄 수 있는 취미’도 가져보자.

마음의 세포들이 깨어난다

나는 요새 붓글씨를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취미인데, 붓으로 한자 한자 글을 쓰는 이 순간이 미치게 좋다. 뭔가를 눈에 띄게 잘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내 마음을 소소하게 다듬고, 내 마음에 차분히 귀 기울이는 시간이 좋아졌다. 멀리 떠나지 않아도, 내 방 안에서 잠시 다른 나로 태어날 수 있는 소소한 취미생활을 시작하니, 마음의 세포들이 예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깨어나는 느낌이다. 마흔의 문턱에서, 내 삶은 분명 바뀌고 있다. 예전에는 눈길도 주지 않던 그 무엇이 간절히 그립고, 때로는 미친 듯이 뭔가에 도전하고 싶어진다. 그런 내가 싫지 않다. 그런 마흔이, 무척이나 설레고, 기특하며, 눈부시다.

정여울 작가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