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은 아프다. 거절당하는 것도, 거절하는 것도. 그런데 반드시 거절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 내 가치관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 내가 정하는 내 인생의 방향과 직접 상관없는 것은 거절할수록 더욱 바람직하다. 거절 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내가 원하는 나 자신’이 되는 순간을 자주 경험하는 것, 그것이 내게는 마흔의 징표였다. 선택은 그에 따른 보상이 확실하지만, 거절은 당장에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아 보여서 그 파생적 결과에 대한 예측이 결코 쉽지 않다. 거절하지 않고 마음 편한 것보다는 거절하고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이 더욱 나다워지는 길이라면, 그 길을 택한다. 선택에 대한 만족은 금세 결과로 나타나지만, 거절에 대한 만족감은 지극히 내면적이고 주관적이기에 그 거절의 진정한 의미도 당사자인 나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거절은 남이 보는 내 모습이 아닌 내가 보는 내 모습을 결정하는 중요한 마음의 거울이 되기도 한다.
그냥 겉으로만 ‘알겠습니다’내가 처음 거절의 해방감을 느낀 것은 학회 발표 시간이었다. 규모가 매우 큰 학회였고, 나는 발표자를 맡아 몇 달 동안 그 원고를 쓰느라 최선을 다했다. 물론 열화 같은 성원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 글에 반대 의견이 더 많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내가 속한 국문과가 아니라 전혀 다른 전공자들이 모인 학회에 특별히 초대돼 간 것이라 마음이 더 아팠다. 그런데 발표 뒤 토론자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내가 토론자의 이야기를 그대로 반영하여 글을 고친다면, 과연 완전한 내 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토론자의 의견이 내 의견과 서로 어울리는 것이었다면, 반론이라도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만약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이 글을 고친다면, 그것은 내 글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동안 진심이 아니면서도 ‘네, 고치겠습니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수많은 반론과 질책을 그냥 받아들이기만 했던 내 모습이 거대한 부메랑이 되어 내 얼굴을 내려치는 것 같았다. 대학원에서 나는 먹이사슬의 맨 끝자락에 있었고, 먹이사슬의 중간 지점쯤 올라간 뒤에도 ‘네,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습니다’라고 말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제야 내 진짜 문제가 그날의 발표문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눈도 마주치기 어려운 사장님에게 결재를 받으러 간 신입사원처럼, 나는 진심으로 동의하지 않으면서 그냥 겉으로만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생활을 오랫동안 반복해온 것이다. 그 ‘예스맨’ 생활에 지쳐버린 것일까.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 앞에 가니 갑자기 용기가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어디서 그런 객기가 나왔는지 모른다. “여러분의 말씀을 들으니, 다들 좋은 말씀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저는 여러분의 의견을 들을수록 오히려 제가 처음에 지녔던 견해가 저의 진짜 의견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의견들을 내줘 진심으로 감사드리지만, 저는 여기서 한 글자도 고치지 않겠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최선을 다했고 지금 상태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글을 쓸 수 없다는 말을 꾹 삼켰다. 좌중이 술렁였다. 나는 숱한 권위자들이 모인 그 자리에서 가장 어렸고, 발표자 가운데 여성은 나 혼자였으며, 가장 낯설고 이질적인 이방인이었다.
불합리하지만 선명한 죄책감술렁임은 발표장에서 끝나지 않았다. 뒤풀이 자리에서도 ‘정말 한 문장도 고치지 않을 거냐’는 무언의 눈치를 주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도 버텼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을까. 무의식의 어떤 깡다구가 나로 하여금 ‘이제 제발 예스맨은 그만둬, 그렇게 사는 게 지겹지도 않니?’라고 속삭였던 것 같다. ‘너는 네가 진정으로 동의하지 않는 입장에 아니라고 대답할 권리가 있어. 이 중에서 이 주제에 대해 가장 열심히 공부하고 글을 쓴 사람은 바로 너야.’ 내 안의 아마조네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전사)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모두들 나의 그 어처구니없는 ‘한 글자도 안 고치겠습니다’라는 말에 넌지시 ‘그건 좀 아니지 않느냐’는 암시적 혹은 노골적 발언들을 했지만, 이상하게도 괜찮았다. 내가 나를 발견한 희열이 너무 커서 남들이 뭐라 말하는 것에 상처받을 여유가 없었다. 물론 이후 그 학회에서는 나를 절대 부르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오히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처음 내 안에서 샘솟아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얼마든지 비판해라, 나는 내 길을 가겠다’는 생각이 들자 비로소 폭풍우 속에서도 홀로 여유로운 커다란 바위산처럼 늠름한 기분이 되었다. 영웅심리가 아니다. 내가 나라는 걸 비로소 깨달은 것, 내가 나일 때만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은 것이다.
아주 오래전이지만, 정말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해야만 했던 거절. 그것은 한때 사랑했던 사람의 ‘다시 만나자’는 끈질긴 구애였다. ‘인간적인 연민’과 ‘진짜 사랑의 감정’을 확실히 구분하지 못했던 그때의 나는 ‘저 사람이 저렇게 힘들어하는데, 그냥 다시 사귀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잠깐 흔들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마음 약한 생각을 하자마자 마치 지하감옥에 갇혀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말할 수 없이 두려운 감정이 밀려들었다. 행복한 순간은 정말 손으로 꼽을 정도였고, 항상 갇혀 있는 느낌, 손발이 꽁꽁 묶인 채 어떤 자유도 없는 느낌, 사랑이 아닌 소유욕의 그물에 걸린 느낌이 곧바로 온몸을 공격해왔다. 정말 아니구나 싶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거절이었지만 무려 몇 년에 걸쳐 똑같이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라고 거절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지만, 나는 버텼다. ‘또 구속하고, 또 독점하고, 또 통제하려 할 텐데’라는 공포감과 싸우는 것이 힘들었다. 그는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간관계와 인간적 연민에 기대어 ‘다시 만나자’고 줄기차게 계속 요구해왔지만, 그의 좀더 편안한 삶을 위해 내 삶을 포기할 수 없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관계를 ‘끝내자’고 한 것은 내 쪽인데, 그 후로도 오랫동안 더 깊은 상실감을 느낀 것은 내 쪽이었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니 그것은 그 사람을 비롯한 다른 타인들, 그러니까 그와 함께하기에 만날 수 있었던 다른 사람들까지도 모질게 인연을 끊어야만 그의 거대한 존재의 그늘을 벗어날 수 있다는 강력한 예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이 만나던 모든 사람을 그대로 만났지만, 나는 그와 함께했던 거의 모든 사람들과 멀어졌다. 그렇게 해야만 ‘그가 힘들어하고 있다, 그건 나 때문이다’라는 불합리하지만 선명한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온 힘을 다해 그로부터 벗어나려 한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그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런 단호한 거절의 반응을 보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기에 그는 더욱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고 착각했던 것 같다. 자신이 나를 감시하고 독점하고 통제하고 소유하려 했다는 사실을, 그제야 미안해하기 시작했다.
나를 지키기 위한 적극적인 선택그러나 늦었다. 이미 나는 모든 감정을 정리한 뒤였다. 그런데 문득문득, ‘그때 우리 두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행복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것은 그와 함께했던 시간이 내 20대의 가장 중요한 시기였고, 그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쓰라린 상실감이었다. 그때 뼈저리게 절감했다. 오랜 인연을 잘라낸다는 것은 내 존재가 산산이 부서지는 아픔을 견디는 것이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픔을 견뎌내고 ‘내가 온전한 나로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에 깊은 상실감을 견딜 수 있었다. 거절은 한편으로 나를 지키기 위한 적극적인 선택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그것으로 인해 누릴 수 있는 편안함과 익숙함을 버려야만 하는, 쓰라린 상실감과 대면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상실감을 이겨내고 나니 비로소 내가 그 뼈아픈 거절로 얻은 ‘한 줌의 찬란한 자유’가 보였다.
아니, 그건 단지 한 줌의 자유가 아니라 내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다.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된 느낌이었다. 연애나 인간관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나의 삶, 그 자체’로 세상과 정면으로 만나는 눈부신 출발점에 다시 서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사랑했던 사람과 그 주변의 많은 선후배들을 잃었지만, 누군가의 친밀함과 다정한 보살핌 없이도 꿋꿋하게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혼자 있는 시간의 소소한 기쁨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사랑이나 연애 같은 강렬한 단어가 아닌 우정이나 친절, 호의 같은 좀더 담담한 단어의 소중함도 알게 되었다. 사랑이 없는 시간으로 돌아오자 비로소 말갛게 ‘나’라는 존재가 보였다. 그가 없어도 좋은 나, 그가 없으면 오히려 더 나다워지는 나, 그가 없는 시간을 얼마든지 견딜 수 있는 내가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오랜 감금생활로부터 해방되는 느낌이었다. 곧바로 또 다른 사랑이 시작되는 바람에 그 잠깐의 평화는 너무 빨리 깨져버렸지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좀더 오래 ‘사랑이 없는 시간’을 버틸 수 있는 용기를 지니기 바란다.
거절의 마지노선이 생기다이제는 언제부턴가 내 삶에서 ‘거절의 마지노선’이 생기고 있음을 깨달았다. 예전에는 주로 ‘시간이 안 되거나, 아니면 정말 내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것’만을 간신히 거절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더라도, 진정한 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과 멀어지는 선택이라면 그 길을 가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 거절의 마지노선이 좀더 일찍 내 마음속에 자리잡았더라면, 그동안 그렇게 거절하지 못해 쩔쩔매던 순간들의 스트레스로부터 훨씬 일찍 해방되지 않았을까. 더욱 나다운 삶을 좀더 일찍 시작하지 않았을까. 예전에는 거절의 기준점이 내 바깥, 즉 타인의 인정이나 외부의 시선에 있었다면, 이제는 거절의 기준점이 내 안에 있다. 내가 내 삶의 운전대를 잡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으려 애써야 한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하루에도 수백 번씩 일어나는 ‘내 안의 선택들’을 관찰한다. 모든 것에 ‘예스’라고 대답하며 삶의 가능성을 무한대로 늘리는 것보다는, 먼저 ‘내가 꿈꾸는 삶’의 큰 그림을 그리고 그 꿈의 지형도에 따라 내 삶을 한 걸음 한 걸음 바꿔가고 싶으니까. 때로는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보다 내가 무엇을 거절하느냐에 따라 내 인생의 향방이 결정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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