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문턱을 넘으며 가장 후회되는 것은?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봤다. 전광석화처럼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어떤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조심하고, 또 조심하느라 허비한 모든 시간이 아까웠어. 네가 여자라는 이유로, 또는 너의 환경 때문에, 네가 가지지 못한 모든 것들 때문에 몸 사리고, 주저하고, 망설였던 모든 시간이 아깝지도 않니.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조심조심병’을 고치다왜 그토록 ‘조심하라’는 주변의 잔소리에 움츠러들었던 것일까. ‘도전하라’는 말에 피가 끓기보다는 ‘조심하라’는 말에 힘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던 모든 순간이 몸서리치게 안타까웠다. 영웅적이거나 폭발적인 용기는 낼 수 없을지라도, 내 삶을 스스로 꾸려가고 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며 내가 믿는 가치를 지켜낼 용기 정도는 꿋꿋이 지닌 채 살고 싶었다.
그 최소한의 용기 있는 삶을 위해서라도, ‘조심하라’는 무의식의 습관과는 단호한 작별이 필요하다. 이제는 ‘조심하라’는 마음속 빨간불과 ‘도전하라’는 마음속 파란불이 싸울 때마다, ‘도전하라’는 속삭임에 더 날카롭게 귀 기울인다. 조심은 이미 몸과 마음에 깊숙이 배어 있지만, 도전은 반드시 새롭게 끌어올려야 할 용기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이건 안 될 것 같은데’ ‘이건 자신 없는데’라고 생각했던 것들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삶이 좋아졌다. 학창 시절에 남들 다 쉽게 뛰어넘는 ‘뜀틀’ 하나도 넘지 못하던 나였다. 교통사고 트라우마 때문에 운전조차 배우지 못한 나였다. 수영도 못하고 자전거도 못 타는 나였다.
그런데 도전하지 않고, 모험하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살아온 모든 시간이 미친 듯이 아까워졌다. 그래서 이젠 웬만하면 크게 건강에 무리가 가지 않는 한에서 도전해보려고 한다. 그런 마음을 먹고나니, ‘조심하느라 겁냈던 시간’을 아끼고, 그 시간에 좀더 진지하고 열정적인 도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많이 잊은 채 글을 쓰고, 강의를 하고, 책을 내게 되었다. 물에 대한 평생의 공포도 조금씩 극복하고, 수영도 배우기 시작했다.
‘그곳에 꼭 가고 싶다’는 소원도 웬만하면 더 이상 미루지 않게 되었다. 스페인어를 못해서, 남미는 처음이라, 왠지 치안이 불안해서, 라는 식의 수많은 변명거리를 지어내며 미루었던 남미 여행을 드디어 해내고 나서야 평생 고수해온 ‘조심조심병’이 고쳐진 느낌이었다. 진작 떠날걸. 떠나보니 이토록 눈부시고 아름다운데. 그렇게 가고 싶었으면서 왜 10여 년 동안 두려워하고, 조바심을 내기만 했을까.
조심조심, 그래, 그건 어쩌면 질병에 가까운 집착이었을 것이다. 안전하지 못한 삶에 대한 공포가 만들어낸 마음의 어두운 그림자. 하지만 아무리 조심해도 위험은 어디서나 닥칠지니, 위험, 그 녀석과는 그때 가서 용감하게 싸우면 되지 않겠는가. 이제는 말도 안 되는 무리한 스케줄을 잡아 불쑥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여행 중에 한 번도 ‘펑크’를 내지 않고 원고 마감을 지키면서 혼자 뿌듯함을 느끼기도 한다.
내게 주어진 일을 충실히 다 해내면서도 내가 꿈꾸는 또 다른 무엇에 함께 도전할 수 있는 마음의 체력을 비축한다. 나에게는 매번 실패의 위험을 안고 신간을 내는 것이 도전이다. ‘젊은 나이에 너무 많은 책을 낸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듣지만, 나에게는 매 순간 새로운 도전이기에 늘 ‘첫 번째 책’ 같은 느낌이 든다. 여전히 실패는 두렵지만, 실패보다 더 두려운 것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못하는 내 안의 공포임을 알기에 오늘도 열심히 내 안의 열정을 그러모아 글쓰기의 불씨를 지핀다. 오지 탐험도 척척 해내고 에베레스트나 히말라야에도 도전장을 내미는 사람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용기지만, 나는 이제 ‘안전한 삶’을 위해 ‘도전하는 삶’을 포기하지는 않으려 한다.
때로 조심하고 결국 도전하는 삶의 짜릿함그런데 마흔의 문턱을 넘으려니, ‘용기를 나 혼자만 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주변에는 수많은 ‘과거의 나들’이 있다. 바로 예전의 나처럼, 용기를 내고 싶은데 차마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묻고 있었다. 정말 용기를 내도, 괜찮겠냐고. 용기를 내서 도전했는데 실패하면, 그래도 괜찮겠냐고. 나 혼자 내는 용기는 어떻게든 끌어낼 수 있겠는데, 남들에게 ‘용기를 가지고 도전하라’고 말할 때는 여전히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다. 여행과 글쓰기에 대한 강의를 할 때마다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혼자 여행을 가도 괜찮을까요?”라는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불안한 눈빛을 숨기지 못하는 여성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나는 소문난 길치에다 엄청난 겁쟁이지만, 이제는 혼자 떠나기의 달인이 되었다고.
하지만 정말 가치관의 혼란이 올 때가 있다. 여성에 대한 심각한 범죄 뉴스를 들을 때다. 세상은 좋아졌다는데, 여성에 대한 범죄만큼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여성에 대한 강력범죄 뉴스는 매번 가슴을 무너뜨린다. 이런 상황에서도 ‘용기를 내어 혼자 여행을 떠나라’고, 무엇이든 도전을 멈춰서는 안 된다고 조언해도 괜찮은 것일까.
‘무조건 조심조심’이라는 마음의 습관은 아직도 내 무의식 깊숙이 각인되어, 외부의 위험이 감지될 때마다 미친 듯 경보기를 울려댄다. 하지만 몇 번을 다시 생각해봐도, ‘조심하라’고 협박하는 이 사회에 우리가 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과 함께, 더 용감하게 길을 떠나는 모든 이들에게 격려를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더 애틋하게 샘솟았다. 혼자 여행을 떠나고, 오지를 탐험하고,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모든 영역에 도전하는 이들에게 더더욱 뜨거운 찬사를 보내야 한다. 우리가 도전을 포기하지 않을 때마다, 그토록 멀어 보였던 세상은 좀더 ‘내가 매만지고, 쓰다듬고, 바꿀 수 있는 세상’이 될 테니까.
조심은 조심대로 하면서, 도전은 도전대로 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것은 마치 여자이면서 남자처럼 사는 것, 밤이면서 낮인 척하는 것, 젊은이이면서 늙은이처럼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 아닐까. 내 존재를 보호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되, 불의에 맞서고, 도전과 모험에도 게으르지 않은 삶을 살 수는 없을까. 나의 조심이 내 존재를 축소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나의 도전이 내 생명까지 위험하게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이 양극의 경계를 줄타기하며 칼날 위를 걷듯이 사는 것이 ‘때로는 조심하지만, 결국엔 도전하는 삶’의 짜릿함이자 아름다움이다.
얼마 전 퇴사를 고민하는 30대 후배와 저녁을 같이 먹으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10년 넘게 이 회사에 있으면서 마음고생도 정말 심했는데, 사람들이 퇴사를 말려요.”
“말리는 이유가 뭔데요?”
“제가 아직 결혼을 못했는데, 일자리마저 없으면 누가 저하고 결혼을 하겠냐고 하네요.”
“네?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가만히 있었어요?”
내 감정에 솔직할 용기부터그녀는 멋쩍게 웃었고, 나는 화가 났다. 일자리가 있어야 결혼을 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도 답답했지만, 간절하게 퇴사를 원하는 사람에게 ‘월급이 나오니 무조건 일자리를 지키라’고 조언하는 사람은 어쩌면 그토록 타인의 고통에 무심한 것인지. 나는 그녀에게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용기’가 절실히 필요한 순간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어제는 다른 부서에서 저에게 옮겨오라고 제안을 했는데, 곧 퇴사할 거라고 했더니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더라고요. 그런데 이상하게 짜릿했어요. 제가 회사에 전혀 미련이 없다는 걸 그 순간 알았거든요. 아무런 대책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행복해요. 지금이라도 그만둘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진짜 살 것 같아요.”
나는 그녀와 함께 환하게 웃었다. 아무런 대책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행복한 기분, 그 기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에. 그 순간이 바로 진짜 나 자신이 되는 시간이니까. 미래를 향한 아무런 대책이 없어도 그저 내가 나 자신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도 행복한 순간이니까. 때로 ‘빛나는 A’라는 선택지가 없을지라도, ‘나를 괴롭히는 B’라는 선택지를 버려야 할 때가 있다. 끊임없이 자존감을 위협당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밥 먹듯이 해야만 하는 상황에 오래 익숙해져버리면, 언젠가는 가야 할 진짜 나의 길을 찾을 수도 없게 된다. 때로는 당장 남의 눈에 띄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 감정에 솔직할 작은 용기’가 더 절실하다.
나는 요새 ‘마음속의 불꽃’을 지피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짜릿함에 매혹되었다. 자기표현에 서툰 사람들, 내성적인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당신이 원래 지니고 있는 빛깔들’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젠타핑크라는 빛깔 아세요? 진달래꽃보다 더 선명하고, 형광핑크색보다 더 해맑은 색깔인데요. ㅎ씨가 감추고 있는 마음의 빛깔은 바로 그런 색깔이에요.” 가끔 나는 이런 식으로 말문을 연다. 이제 내 눈에는 보인다. 사람들이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숨기고, 짓누르고, 꼬깃꼬깃 구겨넣는 자기 안의 본래 빛깔들이. 그건 내가 과거에 조심하고 또 조심하느라 미처 발산하지 못했던 내 안의 또 다른 나다.
글쓰기 수업을 할 때도, 뭔가 멋진 이야기가 나올 듯도 한데 제대로 쓰지 못하는 학생들을 보면, 이렇게 조언해준다. “조금 더 원색적으로 글을 써봐. 회색이나 아이보리색, 이런 희미한 빛깔 말고, 날것의 원색 그대로 너의 감정과 사건의 본래 질감 그대로를 써봐.” 그러면 아이들이 ‘감 잡았다’는 듯 환하게 웃는다. 차마 말할 수 없어 오래오래 숨겨놓은 것, 말할 듯 말할 듯 말하지 못하는 것 속에 진짜 진실이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얼굴이다.
너의 불꽃을 아무 데나 낭비하지 마그들의 입가에서 새하얀 미소가 터져나올 때마다 기분이 좋다. 때로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너의 불꽃을 태울 그곳을 반드시 찾아야 해. 때로는 반대로 말해야 한다. 너의 불꽃을 아무 데나 낭비하지 마. 나는 ‘조심’과 ‘도전’ 사이에서 오랫동안 방황하며 깨달았다. 세상은 자신의 진정한 불꽃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우리 어렵게 쟁취한 이 자유를 포기하지 말자. 내가 마흔에 비로소 찾은 ‘내 삶을 스스로 운전할 자유’처럼, 우리가 저마다 인생의 길목에서 얻은 자유는 각자의 영혼이 흘린 피의 대가니까. 결코 포기할 수 없다. 내가 찾은 자유를, 우리가 쟁취한 자유를. ‘그땐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하던 그 모든 시간들이여, 안녕. 조금 덜 멋져 보여도 괜찮다. 조금 체면을 구겨도 괜찮다. 당신이 당신일 수만 있다면. 내가 나일 수만 있다면. 먼 훗날 이 세상과 작별할 때 ‘나 자신으로 살아간 나날들’이 훨씬 많았음을 깨닫고 살포시 미소 지을 수만 있다면. 조심하느라 어처구니없이 낭비한 그 모든 시간들이여, 이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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