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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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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플렉스가 빛이 되다

콤플렉스의 유일한 좋은 점은 극복 과정에서

자기 안의 진짜 얼굴을 만나게 된다는 것
등록 2018-01-30 18:02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그녀의 가장 아픈 결핍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었다. 영화 에서 전설의 요리사 줄리아 차일드(메릴 스트리프)는 사랑하는 여동생이 ‘아기를 가졌다’는 소식을 편지로 전하자, 울다가 웃다가 어쩔 줄 모르다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여동생의 임신 소식에 감격한 나머지 “난 정말 기쁜걸요!”라고 말하면서도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펑펑 흘러내린다. 시종일관 유쾌한 영화라 연신 키득거리다가, 미처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별안간 슬픈 장면이 덮쳐와 콧날이 시큰해졌다. 지금 동생이 느끼는 최고의 행복을 자신은 영원히 느낄 수 없다는 생각에 줄리아는 절망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슬픔을 느껴본 적 있다. 동생 고은이가 첫아기 현서를 가졌을 때. 나는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면서도, 가눌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내 아기를 품에 안고 기뻐하는 일, 그런 일이 나에게는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기에.

협동이라는 단어에 대한 콤플렉스

아기와 날마다 함께 자고 일어나고, 그 아이와 아침저녁으로 산책하고, 여름에는 해변에서 물놀이를 하고, 학부모가 되고, 아이가 무럭무럭 커갈 때마다 나는 기쁘게 늙어가는 일. 그런 행복을 영원히 느끼지 못할 것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영화 속 줄리아 차일드처럼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오랫동안 일중독에 걸려 무언가를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차일피일 ‘엄마 되는 일’을 자발적으로 미루다 어느덧 너무 늦은 나이가 되어버렸다. 동생 고은이가 둘째아이 윤성이를 낳고, 뒤이어 막냇동생 상은이가 준우를 낳을 때, 뛸 듯이 기쁘면서도 ‘나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서글픈 예감으로 마음이 아팠다. 피를 나눈 형제자매끼리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 이런 슬픔은 진심 어린 기쁨과 연결돼 있기에 더욱 쓰라린 상실감으로 인간의 내면을 날카롭게 할퀸다. 기쁨 속에 상실감이 서려 있고, 슬픔 속에 죄책감이 어려 있어 마음은 더욱 복잡하게 비틀거린다. 언니나 동생의 가장 큰 기쁨이 다른 형제자매에게는 가장 큰 슬픔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서로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으며, 이 세상 어떤 친구보다 더 친밀한 형제자매 간에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 너는 있지만 나에게는 없는 그 무엇을 향해 슬퍼하고, 질투하고, 아파하는 그런 일이. 콤플렉스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깊은 슬픔으로 나타난다.

콤플렉스가 지닌 유일한 좋은 점은 콤플렉스를 이겨내는 과정에서 자기 안의 진짜 얼굴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나는 ‘함께하기’ ‘협동’ ‘공동체’라는 단어에 평생 콤플렉스를 느꼈다. 협동, 협업, 조직, 공동체 등을 들을 때마다 거의 반사적으로 고통을 느낀다. 이제 다 아물었다 싶은 순간에도 또다시 내면의 상처가 욱신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협동’이라는 단어에 대한 콤플렉스의 기원은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년이 바뀔 때마다 엄청나게 들쑥날쑥한 롤러코스터형 성적표를 자랑하던 나는, 최고로 성적이 좋을 때조차 생활기록부의 ‘협동심’ 관련 부분에서는 낮은 점수를 받았다. 그게 나였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이야기해주시지 않고, 그저 아무 말 없이 침묵의 회초리로 야단치고 꾸짖듯 최하 점수를 주셨다. 나는 체육 점수가 항상 낮은 것에는 상처를 덜 받았지만, 생활기록부에 ‘협동심’ 부분의 점수가 낮은 것에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나를 징벌하기 시작했다. 넌 함께하는 데는 재능이 없어. 사람들과 잘 지내지 못하잖아. 그러니까 너무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하지 마. 어차피 잘 안 될걸. 이런 식으로 자신을 학대하며 외로움과 친구가 되었다. 때로 정말 좋은 친구들이 있었지만, 그들과 함께할 때도 ‘언젠가는 이 아이도 나와 멀어지겠지’ 하는 두려움을 느꼈다. 나는 평생 고독하기로 결심한 사람처럼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에 단단한 장벽을 만들었다.

혼자 아닌 함께하는 일의 즐거움

친구네 집에 가서도 친구랑 놀기보다는 친구네 집에 있는 동화책 수십 권을 다 읽고 오는 것이 더 좋았던 아이, 친구보다는 책이 더 편안했던 지극히 내성적인 아이, 친구에게 ‘이거 같이 하자’라는 말을 하기 어려워해서, 여러 명이 해야 할 일도 그냥 밤을 새워서라도 혼자 다 해내야 속이 편했던 아이. 그게 나였다. ‘함께’ ‘협업’ 이런 단어에 묻은 떠들썩함과 요란함보다는 ‘고립’ ‘홀로’라는 단어에 묻은 쓸쓸함과 고요함이 좋았던 아이. 난 그런 아이였다. 연애할 때도 그 사람과 늘 함께 있기보다는 어떻게든 혼자 있는 시간을 확보하고 사수하기 위해 ‘오늘은 몸이 안 좋다’고 핑계를 대며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음악을 듣고, 혼자 책 읽는 시간을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 그게 나였다.

그랬던 내가 지금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자주 쓰는 문장은 ‘같이 가자!’ ‘같이 하면 되지, 뭐.’ ‘나도, 나도! 나도 끼워줘!’ 이런 것들이다. 협동, 함께, 같이, 이런 말들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인 줄 알았는데 어느덧 나도 모르게 ‘같이 하지 않으면 의미 없는 것들’의 목록을 하나하나 쌓아올리고 있다. 혼자 열심히 노력하여 해내는 것은 이제 충분히 질리도록 해보았으니까. 지독히도 외로워서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혼자가 아니라 함께하는 일의 즐거움’을 이제야 알기 시작했기에 ‘이제는, 결국 함께하기’의 길을 가고 싶은 것이다.

나를 소모하는 협동이 아니라 나를 극복하는 협동이라면, 무엇이든 뛰어들 수 있는 배짱도 생겼다. 책은 ‘혼자 쓰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배우고 난 뒤였다. 강의는 혼자 떠드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떤 새로운 시공간을 창조하는 것임을 알게 된 뒤였다. 여행은 혼자 할 때조차 어떤 장소와, 아직 만나지 못한 미지의 친구와 그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함께하고 싶은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임을 알게 된 뒤였다. 아직도 가슴 한구석에는 누군가와 무언가를 함께하는 일에 대한 깊은 두려움이 남아 있지만, 그 두려움조차 나의 소중한 일부임을 안다. 이제는 알 것 같다. ‘두려움을 버리고’가 아니라 ‘두려움을 안고’ 가는 것이 삶임을.

며칠 전 한 출판사 편집디자이너가 ‘신인 작가와 함께 일하는 것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신인 작가들은 자기가 뭘 원하는지도 정확히 모르면서 이것저것 요구하는 게 너무 많다고. 신인 작가들은 책 디자인과 편집을 상의할 때 너무 예민하고 까다롭고 욕심도 많다고. 그 순간 갑자기 너털웃음이 나왔다.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였다. 나는 그 디자이너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아직 함께하기의 소중함을 몰라서 그러는 거니까, 많이 이해해주고 같이 끌어주세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언젠가는 함께 일하는 사람의 답답한 마음을 알아줄 거예요.”

생의 기쁨은 끝없는 네트워킹

신인 시절의 나는 모든 자극에 예민하게 깨어 있는 나머지, 아무것도 아닌 일에 걸핏하면 상처를 받고, 책 편집이나 디자인에 대해서도 시시콜콜 ‘이렇게 해주세요, 저렇게 해주세요’ 귀찮게 부탁을 했다. 지금은 한두 가지 커다란 편집 방향만 이야기하고, 편집자와 디자이너에게 전적으로 일을 맡긴다. “그냥 알아서 해주세요.” “완전히 믿고 맡길게요.” 가끔 나도 고집을 부릴 때가 있지만, 결국 모두가 합의하는 방향으로 ‘함께’ 가게 될 것임을 알고 있다.

저자와 편집자가 모여 함께 회의하는 과정도 가끔 있지만, 진짜 협업은 ‘회의’로 실현되지 않는다. 회의로 진정한 협업의 기쁨을 느끼기보다는 굳이 회의를 거치지 않고도 말없이 서로의 마음속에 있는 책의 이미지가 무언의 교감으로 천천히 실현되는 과정을 바라보며 생생한 기쁨을 느낀다. 이것은 서로를 향한 조건 없는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한 협업의 기쁨이다.

그토록 ‘협동’에 콤플렉스를 느끼던 내가, 이제는 인생의 가장 큰 희열을 ‘함께 있음’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인생의 기쁨을 두 단어로 줄인다면 ‘끝없는 네트워킹’이 아닐까. 무언가와 끊임없이 연결된다는 느낌이야말로 삶의 기쁨이 지닌 공통의 본질이었다. ‘이런 기쁨은 다시 느낄 수 없겠지?’라고 안타까워하는 순간 이후에도, 또다시 그보다 더 큰 기쁨이 기다릴 때가 있다. 우리가 아픔을 견디고 기다림에 절망하지만 않는다면, 그토록 행복한 순간은 반드시 다시 찾아온다. 그보다 더 행복한 순간도 새롭게 찾아온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이 세상과 내가 조금 더 따뜻한 방식으로 연결되는 것 같고, 좋은 사람을 만나면 ‘인연’이야말로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 주어진 최고의 축복처럼 느껴진다. 오래전에 이미 끝나버렸다고 지레 포기했던 꿈도 언젠가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모습으로 또 다른 기회나 행운으로 탈바꿈한 채 다시 찾아오기도 한다.

‘대중 앞에서 말을 잘 못한다’는 심각한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나는 ‘어떻게 하면 강의는 적게 하고 글은 많이 쓸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렇게 혼자 틀어박혀 글만 쓰고 살 궁리를 하던 내가, 이제는 강의야말로 내 콤플렉스와 직면하고 내면을 성장시킬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고 생각하게 됐다. 글쓰기는 어디까지나 고독한 내면의 전투이지만, 강의는 학생과 나, 청중과 나, 독자와 나 사이의 끊임없는 교감과 협업의 과정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최고의 콤플렉스였던 ‘함께’ 혹은 ‘협동’이라는 단어가 이제는 내 삶의 가장 절실한 존재 이유가 됐다. 글쓰기조차 궁극적으로는 누군가와 함께 길을 걸어가기 위한 간절한 몸부림임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는 내 삶이 되어버린 글쓰기 또한 닿을 수 없는 당신을 향한 간절한 연결의 몸짓이니까.

사랑·혁명·우정이라는 세 단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세 단어, ‘사랑·혁명·우정’도 결국 이 세상 모든 장애물이 우리 앞을 가로막아도 끝내 누군가와, 무언가와,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와 연결되려는 몸짓이다. 나는 당신과 연결되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과 기어이 연결되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죽어서도 계속되는 그 무엇들, 희망, 꿈, 사랑, 우정, 예술, 혁명의 빛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내 콤플렉스가 꽃이 되고 별이 되고 빛이 되는 그날까지. 오늘 패배할지라도, 언젠가는 영원할 승리의 그날까지.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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