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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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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플렉스가 힘이 되다

결점을 ‘나의 진정한 일부’로 받아들이면

내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되어주리라
등록 2018-07-10 17:03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마흔은 내게 내 안의 콤플렉스와 화해할 기회를 주었다. 내가 스스로 결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뜻밖에도 나를 지켜주는 힘이 될 때가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콤플렉스를 제거 대상으로만 여기던 시절에는 절대 보이지 않던, 뜻밖에 콤플렉스의 매력이 보였다. 예컨대 나는 지나치게 예민한 성격이 사회생활에 큰 어려움을 초래하는 경험을 여러 번 했기에 평생 내 예민함을 감추느라 급급했다. 아무리 ‘강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 해도 타고난 예민함은 가려지지 않아서, 점점 사람 만나는 횟수를 줄여보기도 했다. 외부 일정이 없으면 되도록 집에 틀어박혀 있을 때가 많았는데, 그것은 사람들과 부딪치는 횟수를 줄이려는 몸부림이었다.

예민함이 키워준 삶의 통찰력

예민한 사람을 곧 까다로운 사람 취급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우리 예민한 사람들’은 자신의 성격을 곧 ‘단점’과 금방 연결해버린다. 예민함을 감추고 짓누르고 어설픈 미소로 상처 입은 마음을 가리려 할 때마다, 우리 안의 무언가가 죽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넌 성격이 너무 예민해”라고 비판받을 때마다 내 안에서 죽어가던 무언가, 그것은 바로 내가 온전히 나로서 사랑받을 수 있다는 믿음, 내 마음의 생김새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 예민함이 나로 하여금 더 많은 것을, 더 깊고 섬세하게 바라보게 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흔 문턱을 넘으며 나는 예민함을 ‘삶을 더 깊이 있게 바라보는 힘’과 연관시킬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그토록 예민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과연 이런 글을 쓰고 있을까. 이런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예민함은 내 콤플렉스였지만, 또 한편으로 내가 지금까지 맹렬하게 글 쓰는 삶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예민한 사람들은 비슷비슷해 보이는 것들 속에서도 ‘차이’를 발견해낸다. 그 차이를 발견하는 것이 삶을 권태로부터 지켜준다. “매일 글 쓰고, 매일 책 읽고, 너는 지루하고 힘들지도 않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제대로 예민한 사람들은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다. 모든 책이, 모든 글이, 모든 순간이 미치도록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는 을 열세 번이나 읽었는데 한 번도 같은 작품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읽을 때마다 전혀 다른 감동으로, 그때마다 전혀 다른 대목이 싱그러운 목소리로 새로운 말을 걸어주었다. 나의 예민함은 사물과 인생과 텍스트를 다르게 바라보는 힘이 되어주었다. 예민한 사람에게 사소한 차이는 없다. 그 수많은 작은 차이가 우리에겐 삶을 쥐락펴락하는 거대한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혐오하던 내 예민함이 나 자신을 권태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구해주는 내면의 오아시스였다.

콤플렉스의 빛과 그림자

콤플렉스는 팜파탈처럼 변화무쌍한 매력을 지녔다. 콤플렉스를 좀 알겠다 싶어 붙잡으려 하면 어느덧 제 모습을 감춰버리고, 콤플렉스를 외면하려 하면 언제 사라졌냐는 듯 여 보란 듯이 또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콤플렉스를 제거하려 애쓰기보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을 수만 있다면, 콤플렉스는 그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또 다른 삶을 체험할 기회를 열어준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이 콤플렉스였던 나는 ‘말하기’ 대신 ‘글쓰기’로 내 감정을 표현하는 습관을 들였다. 남들에게 사소해 보이는 것이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로 느껴지고, 남들에겐 무난하게 견딜 수 있는 자극이 내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으로 다가올 때마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그것을 내밀한 글로 정리해두곤 했다. 타인에게 이야기할 수 없는 아픔이나 걱정 같은 감정이 ‘글’의 형태가 될 때는 좀더 차분하고 정돈된 ‘사유’로 바뀌는 희열을 체험했다.

예민한 사람들은 아주 사소한 말 때문에 상처받는 일이 많기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글로 표현하면 뜻밖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내가 굳이 작가가 되지 않았더라도 그런 습관은 나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내겐 사람들의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이 보이고, 그 사람의 아픔이 더 자세히 들여다보이고, 그가 능수능란하게 매우 괜찮은 척하고 있을 때조차 그의 쓰라린 속울음이 들린다. 콤플렉스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다.

콤플렉스의 그림자는 그것으로 인해 결국 나를 싫어할 위험이 있다는 것, 콤플렉스가 나의 전체가 아니라 일부임에도 그것을 ‘전체의 문제’로 확장해버릴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콤플렉스의 빛을 받아들이면 그림자조차 훌륭한 내면의 자산이 될 수 있다.

극도의 예민함을 ‘나의 진정한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자, 이제는 내 예민함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자기 변신 과정은 어렵고 힘들고 아플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변신의 문턱을 마침내 넘으면 눈부신 자유가 보이기 시작한다. 예컨대 글을 쓸 때 ‘주관적’이고 ‘감정적’이며 ‘객관성’과 ‘논리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은 것도 나의 오랜 콤플렉스 중 하나였다. 그런데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내 글은 전혀 다르게 해석됐다. 학교에서 선배들에게 실컷 비판받은 그 똑같은 글을 본 어떤 독자는, 내 글이 ‘감성이 풍부’하고 ‘자기주장이 뚜렷’하며 논리적인 글 안에서도 감성적 울림을 주는 능력이 있다고 칭찬해주셨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분명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쓰면 절대 안 되겠다’고 골머리를 앓게 한 그 글이, 다른 사람에게는 이토록 따스한 울림으로 다가갈 수 있다니.

타인의 콤플렉스에도 칭찬을

콤플렉스란 바로 이런 거구나 싶었다. 똑같은 글을 봐도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부정적인 쪽으로만 해석해서 그 사람의 가능성을 꺾어놓으려 하고, 어떤 사람들은 최대한 긍정적인 쪽으로 바라보며 그 사람의 아직 덜 무르익은 잠재력까지도 현실의 빛 속으로 끌어내는 것이었다. 나는 후자가 되고 싶었다. 다른 사람의 콤플렉스를 비판하거나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악성 댓글까지 달아가면서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조차 하지 못하게 의지를 꺾어버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누군가의 아주 작은 장점조차 커다란 가능성으로 확장할 수 있는 사람, 비평할 때조차 비판보다는 칭찬을 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게는 이미 나쁜 것을 ‘이러저러해서 너무도 나쁘다’고 비난할 시간이 없다. 나쁜 것을 나쁘다고 비난하기보다는, 좋은 것을 더 좋게, 아름다운 것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내 삶의 에너지가 되기를 바랐다. 설령 나쁜 환경 속에 있는 미약한 좋은 씨앗이라 할지라도 그 열악한 환경에서도 자신의 장점을 깨닫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나 또한 ‘나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키워내고 싶었다.

나의 또 다른 콤플렉스는 매사에 ‘요약’을 못한다는 것이다. ‘요약’이란 것이 참 어렵고 때로는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 말을 요약해보세요”라고 요구하는 분들을 마주하면 맥이 탁 풀려버린다. 굳이 내 모든 말이나 글을 요약해야 한다면 왜 2시간 동안 목에 피가 맺히도록 강의했겠는가. “너는 왜 이렇게 글을 길게 쓰니”라는 비판을 자주 들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요약하는 재능이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글을 늘려 쓰는 것은 ‘창조’지만 짧게 줄이는 것은 ‘편집’이다. 편집 능력도 중요하지만 창조할 수 있는 힘이 나에게는 더 중요했다. 내가 요약을 잘하지 못했던 것은 정말 짧게 줄이는 요령을 몰라서가 아니라 소중한 문장들 하나하나의 세밀한 뉘앙스를 죽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문장뿐 아니라 감정을 증폭하는 데도 나는 엄청난 재능(?)을 발휘할 때가 있다. 감정이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로 서서히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발단에서 바로 절정으로 치달아버린다. 이런 성격 때문에 ‘변덕스럽다’ ‘감정이 너무 불안정하다’는 평판을 듣지만, 그래도 이런 성격의 ‘뜻밖의 좋은 점’을 이야기해주는 친구가 있었다.

‘글로벌 호구’로 불려도 좋다

“네 안에는 만능증폭기가 달린 것 같아. 아주 조그만 감정만을 전달해줬는데, 너는 1초 안에 그것을 ‘울 수밖에 없는 사건’으로 만들어버려. 그것도 참 어처구니없는 재능이다, 그치?”

그게 설마 재능일 수 있는가. 친구의 말을 듣고 보니, 어쩌면 그것이 내가 타인에게 공감을 잘하는 이유가 될 수 있겠구나 싶었다. 타인의 온갖 감정에 걸핏하면 공감하기 때문에 이렇게 오랫동안 지치지 않고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거구나. 공감을 너무 잘하면 남의 말에 잘 속아 넘어갈 수도 있고, ‘사기당하기 딱 좋은 캐릭터’로 ‘글로벌 호구’가 될 수 있다는 치명적인 단점도 있다. 그래도 누군가가 나에게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능력’과 ‘타인에게 공감하는 능력’ 중에서 굳이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타인에게 공감하는 능력, 내 안의 작은 감정의 씨앗을 거대한 애드벌룬처럼 부풀어 올리는 감정의 만능증폭기를 선택하고 싶다. 그게 멋지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과학자라면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택할지도 모른다.

내가 뛰어난 이성보다는 풍부한 감성을 택하는 이유는 그게 나이기 때문에, 그게 나답다는 것을 이제는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감정적이다, 너무 잘 운다, 늘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비난을 받을지라도,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깊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내 심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아주 작은 자극으로도 금방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내면의 눈물샘을, 턱없이 예민할 수 있는 권리를, 언제든 슬퍼하고 아파하고 흐느낄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콤플렉스는 우리를 분명 아프게 한다. 하지만 그 콤플렉스마저 삶을 더 아름답게 승화시키는 에너지로 쓸 수 있는 사람에게, 콤플렉스는 때로 구원의 오아시스가 되어준다.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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