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첫사랑처럼 두근거리는 설렘을 간직하며 살아갈 수는 없겠지만, 언제든 설렐 줄 아는 마음을 간직한다는 것은 인생의 크나큰 자산이다. 삶이 온통 회색빛으로 찌푸린 순간에도, 더는 내 앞에 희망의 길이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을 때도, 아주 사소한 무언가에도 설레는 심장이 있다는 것은 눈부신 축복이다. 설렘은 주로 새로운 경험과 연관되기에 마흔이 넘으면 설렘의 기회가 줄어들 줄 알았다. 쓸데없이 자주 설레서 문제였던 나의 20대와 달리, 40대가 되면 좀더 차분하면서 때로는 심드렁할 줄도 아는 얌전한 심장을 갖게 되리라 상상했다. 그런데 웬걸, 마흔을 넘어서자 작은 일에도 설레고 싶은 마음, 익숙한 것에서도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져버렸다. 어쩌면 20대보다 더 세찬 심장박동으로 설렘의 순간을 맞이하는 요즘이 참 좋다.
20대와 다른 마흔의 설렘마흔 이후의 설렘이 20대의 설렘과 다른 것은 ‘행복했던 과거를 기억하는 것’에서 설렘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순간의 기쁨이다. 게다가 설렘의 의미를 좀더 깊이 있게 해석할 줄 알면, 전혀 설레지 않는 권태로운 순간에조차 ‘설렘의 향기’를 마치 보물 창고처럼 꺼내 쓸 줄 알게 된다. 예컨대 첫 유럽 배낭여행의 설렘이 예전에는 단지 난생처음의 체험에서 오는 두근거림인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것은 좀더 깊은 마음의 차원에서 우러나오는 인식의 기쁨이었다. 내게 첫 배낭여행의 설렘은 ‘끊임없이 의미를 추구하는 삶’에서의 첫 번째 해방이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너무 많이 진을 빼는 삶,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 혹은 ‘나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가혹하게 단련하는 삶에서 잠시 벗어나 말갛고 투명한 나 자신과 만나는 시간. 스물아홉의 나에겐 한 번도 그런 해방의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몸을 쉬는 것은 물론 마음을 쉬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던 시간, ‘반드시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쉼 없이 스스로를 풀가동하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평소에는 결코 찍을 수 없는 아름다운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것도 설레고, 더듬더듬 낯선 외국인과 이야기하는 것도 설레지만, 내 여행의 근원적인 설렘은 ‘나에게서 완전히 벗어나볼 수 있는 자유’로부터 왔다. 그때 그 설렘을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박동이 빨라지며 볼이 발그레해진다. 그것은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설레는 마음과는 또 다른 종류의 두근거림이었다.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설렘, 익숙한 나, 내가 공들여 빚어온 나의 이미지에서 탈피할 수도 있다는 새로운 깨달음에서 우러나오는 설렘이었다. 뮌헨에서 하루에 2만 보 이상 걷다보니 발이 아파 맨발로 걷기 시작하자 비로소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내친김에 뉘른베르크에서도 그냥 맨발로 걸었다. 누구도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맨발이 길 위에 닿는 감각이 그토록 짜릿하고 시원한 줄 그때 처음 알았다. ‘뭘 먹을까’ 하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그냥 아무 데서나 눈에 보이는 것을 사먹어도 되었고, ‘뭘 입을까’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배낭 지퍼 가까이에 있는 옷을 대충 집어 입어도 전혀 스트레스가 없었다. 학교와 집밖에 모르는 지극히 단조로운 생활에 만족하던 내가 드디어 ‘제3의 공간’, 즉 여행의 장소 속에서 새로운 나의 심장박동 소리를 발견한 것이다.
내 안에 살고 있는 수백 마리 용지금도 나는 일상의 반복이 권태로워질 때면 그 첫 여행의 설렘을 곶감 빼먹듯 꺼내며 그 두근거림을 가만히 ‘리플레이’해본다. 그러면 굳이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멈췄던 설렘의 근육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삶을 더욱 아름답게 연주하기 위해, 내 소중한 마흔 즈음을 후회와 매너리즘으로 날려버리지 않기 위해. 나는 지나간 내 모든 설렘의 기억을 매번 다르게 리플레이한다. 와 은 수십 번씩 반복해 읽었지만, 나이 들수록 더 내 안에서 풍요로운 색채로 새로운 의미의 꽃을 피운다. 지나간 모든 사랑의 기억에는 아픔과 눈물이 묻어 있지만, 그 안에는 다시는 반복할 수 없는 단 한 번의 설렘의 순간이 꿈틀거린다. 사랑의 아픔은 리플레이할수록 더 깊이 폐부를 찌르지만, 사랑의 기쁨은 비록 그것이 영원히 떠나간 기억일지라도 여전히 눈부시게 내 삶의 어둠을 밝혀준다. 사람은 떠나도, 그와 함께한 추억의 ‘의미’는 새롭게 부활해 그 사람과 상관없이 또 하나의 ‘설렘의 축복’을 전해준다. 게다가 설렘은 추억뿐 아니라 독서의 기억에도 깃들어 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 (, 조지프 캠벨 지음, 이윤기 옮김, 이끌리오 펴냄, 273쪽, 2002년)
힘겨울 때마다 이라는 책을 읽었지만, 나는 아직도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내가 처음 ‘나는 내 안의 용과 진정으로 싸워본 적이 없구나!’라는 아픈 깨달음을 얻은 문장이었다. 동시에 내가 처음으로 ‘나는 반드시 내 안의 용과 끝까지 싸워낼 거야, 지더라도, 처참하게 피 흘리더라도!’라고 결심한 순간이기도 했다. 나는 이 문장을 읽은 후로 내 안에는 용 한 마리가 아니라 수백 마리가 함께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주어진 업무를 처리하기 싫어하는 ‘게으름뱅이 용’부터 타인의 평판에 일희일비하는 ‘귀가 얇은 용’까지, 사랑할 때 상처받기 싫어 사랑 자체를 회피하려는 ‘겁쟁이 용’부터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를 두려워하는 ‘광장공포증 용’까지, 정말 무시무시하게 많은 용이 나의 진정한 내적 성장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 용들은 한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넌 이번에도 실패할 거야, 넌 결코 네 꿈을 이룰 수 없을 거야, 넌 결코 진정한 너 자신이 될 수 없을 거야. 나는 그 용의 싸늘한 눈초리에 화들짝 놀라 용기를 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조금씩 내 안의 크고 작은 용과 싸워 이기면서, 나는 천천히 ‘어쩌면 나도 신화 속 용감한 영웅들처럼 열악한 상황을 이겨내고, 내 안의 한계를 하나하나 부숴가며 책 속의 신화가 아닌 나만의 작고 소박한 신화를 써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마흔을 통과하며 나는 새로운 의문에 휩싸였다. 우리의 꿈과 희망을 위협하는 그 사나운 용 또한 우리 자신의 소중한 일부가 아닐까. 용을 무찔러 죽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용의 아픔과 두려움(나는 나를 극복할 수 없고, 나는 세상과 싸워 이길 수 없다는 믿음)까지 끝내 끌어안아야만 더 큰 ‘나’로, 나를 뛰어넘는 나로 나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익숙한 것이 주는 찬란한 설렘정말 그렇다. 우리 안의 사나운 용 또한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다. 위험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인간관계에 대한 불신. 그 모든 용들도 세상과 부딪히고 상처 입으며 우리가 만들어낸 내면의 두꺼운 갑옷이다. 그 두꺼운 방어기제마저 끝내 보듬고 토닥여줄 수 있을 때, 우리는 용을 단지 무찔러 죽이는 것이 아니라 용과 함께, 혹은 ‘무섭기만 한 용’이 아니라 아름답고 찬란한 신화 속 용이 되어 힘차게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삶을 위협하는 모든 용은 어쩌면 우리가 언젠가는 자신을 너른 사랑의 품으로 감싸 안아주기를 기다리는 가엾은 공포의 기억들이 아닐까. 그렇다면 용은 우리의 ‘공격’이 아니라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상처 입은 마음의 집합체일 것이다. 그 두렵고 사나운 용의 어두운 에너지를 더욱 싱그럽고 반짝이는 창조와 부활의 에너지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나는 내 안의 용을 죽이고 나만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용과 함께 날아오르는 용맹스러운 전사가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렇듯 마흔은 나에게 예전에 알던 것을 새롭게 바라보는 법, 예전에 ‘다 이해했다’고 믿었던 것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선물해주었다. 모든 것에서 끝내 배울 수 있는 그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외부에서 오는 자극으로 인한 수동적 설렘보다 훨씬 강렬하고 오래가는, 자극의 유무에 좌우되지 않는 내 안의 설렘이다. 20대에는 새로운 체험이 두려웠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내가 과연 세상의 풍파에 맞서 싸워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낯선 체험에 묻어 있는 위험과 아픔까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싶다. 나는 더 이상 내 타고난 성격, 주어진 환경, 트라우마와 콤플렉스 뒤로 숨지 않을 작정이니까.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나를 아프게 했던 모든 일을 증오하기보다 그 기억 속에서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는 생의 지혜를 발견하고 싶다. 이제 내 안의 사나운 용과 싸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용의 쓰라린 눈물을 닦아주고 꺾인 날개를 토닥여 마침내 용과 함께 날아오를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아름답게 나이 든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결국 아름다운 나이 듦이란, 설레지 않는 모든 순간에도 설렘을 발견할 수 있는 용기가 아닐까. 익숙하고, 지루하고, 짜증나는 모든 곳에서 오히려 찬란한 설렘과 생의 신비를 발견하는 것. 그리하여 우리를 공격하는 모든 고통까지 다정하게 껴안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용기야말로 아름다운 나이 듦의 비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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