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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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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보았네 스물에 보지 못한 그 꽃

40대에 다시 보면 더 새롭게 느끼는 책과 영화들

할 수 없는 사랑조차 이해할 수 있는 나이 듦의 힘
등록 2018-09-11 13:28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아주 오랜만에 를 다시 보며 처음 그 영화를 봤던 때보다 더 깊고 시린 감동을 느꼈다. 처음 를 봤을 때 나는 온전히 빌리에게 몰입했다. 혹시 내 꿈을 이룰 수 없을까 노심초사하는 가난한 10대 소년 빌리를 위한, 빌리에 의한,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어리고 힘없는 빌리들을 위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흔을 넘어선 지금의 나는 이제 어느새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이는 빌리의 아버지 처지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빌리의 꿈과 아버지의 절망

20대 때에는 발레리노(남자 발레 무용수)가 되고 싶어 하는 빌리를 이해 못하는 광부 아버지가 답답하고 가여워 보이기만 했다. 이제는 그를 이해할 수 있다. 이해를 넘어 가슴 저리게 공감되기까지 한다. 자식을 좋은 학교에 보낼 돈은커녕 한겨울 난방비조차 구할 수 없어 죽은 아내가 아끼던 피아노를 부숴 땔감으로 쓰는 아버지. 둔감하고 무지해 보였지만, 다만 가진 게 너무도 없어 아름다운 예술을 느낄 감성까지 마비된 아버지의 슬픔이 가슴 깊숙이 문을 두드렸다.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매정해 보였지만, 사실 슬픔과 분노가 뼛속 깊이 박혀 어떤 새로운 것도 받아들이기 힘든 상태가 아니었을까.

예전에는 별 감흥 없이 봤던 장면이 이제 마흔을 넘은 나에게 가슴에 콕 박히기도 한다. 빌리의 발레 학교 오디션을 보러 가는 길. 아빠는 이 도시를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냐고, 런던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냐고 묻는 빌리에게 아빠는 황망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한다. “그곳엔 탄광이 없잖아.”

아, 빌리의 아버지는 탄광을 벗어난 삶을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탄광은 세계이자 우주였다. ‘남자답게’ 권투를 배우라고 했더니 발레하는 여자아이들 틈에 끼어 까치발을 들고 휘청거리는 아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도, 그의 세계에는 발레라는 예술의 자리가 아예 마련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빌리를 이해하고 로열발레학교로 보내는 것은 곧 자신이 평생 지켜온 굳건한 우주를 산산조각 내고 자신이 결코 알 수 없는 두렵고도 아름다운 세계로 사랑하는 아들을 멀리 떠나보내는 일이었다.

예전에는 그저 슬프기만 했던 장면이 지금은 더더욱 억장이 무너지는 장면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아버지가 빌리를 발레학교에 보낸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막내아들은 자신의 인생을 찾아 날아오르기 위해 런던으로 갔지만, 큰아들과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다시 탄광 저 밑바닥으로 내려가야만 한다. 아버지는 남은 삶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다시 저 어두컴컴한 갱도로 내려가는 일밖에 없다. 빌리가 끊임없이 날아오르는 동안 아버지는 끊임없이 캄캄한 갱도 밑으로 내려간다. 쿵, 갱도를 내려가는 낡은 승강기가 굉음을 토해내며 출발하는 순간. 빌리가 언젠가는 날아오를 것을 알면서도, 아버지의 절망을 이제 더 깊이 이해해버린 내 가슴은 예전보다 더 캄캄한 어둠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오래전에 읽었던 책을 마흔 넘어 다시 읽어보면 ‘이 책에 이런 구절이 있었어?’ 하고 감탄하게 된다. 대표적인 책으로 이 있다. 앤의 입장에서만 온통 몰입해 울고 웃었던 어린 시절과 달리, 이제는 마릴라의 시선에서 앤과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앤의 처지에선 마릴라는 엄격하고 냉담해 보이지만, 사실 마릴라 또한 앤을 본 뒤 쇼크 상태였다. 농장일을 도맡아 거들어줄 튼튼한 남자아이를 원했는데, 농장일은커녕 집안일도 맡기기 어려울 것 같은 가냘프고 수다스러운 소녀가 자신을 ‘E가 붙어 있는 앤(Anne)’으로 불러달라며, 제발 자신을 버리지 말아달라며 눈물 그렁그렁한 커다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그런 앤을 바라보며 마릴라는 당혹했을 것이다.

평생 독신으로 살아오며 그저 오빠 매슈와 농장을 지키는 일에만 몰두했던 마릴라가 앤에게 날마다 밥을 해주고, 옷을 지어 입히고, 학교를 보내고, 학교에서 놀림받고 돌아와 펑펑 우는 앤을 달래주며, 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사과와 변호와 증언을 일삼게 된다. 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결코 초록색 지붕집 바깥의 세계에 관심을 주지 않았을 마릴라가, 세상을 향해 굳게 닫힌 마음의 빗장을 열고 한발 한발 ‘내가 결코 살지 못했던 세계’를 향해 나아갈 때마다 가슴이 시렸다. 나는 마릴라가 어느 날 난롯불 아래서 책을 읽다가 몽상에 잠긴 앤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자기 안의 ‘다정함’에 흠칫 놀라 혼자 생각하는 장면을 여러 번 다시 읽었다. 어린 시절에는 결코 이런 문장이 있었는지조차 알아보지 못했던, 눈부신 명장면이다.

마릴라의 비밀스러운 사랑

마릴라는 사랑을 말이나 표정으로 쉽게 보여주는 방법을 배워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아도 그녀는 이 말라깽이 잿빛 눈의 소녀를 깊고 강렬하게 사랑하게 되었다. 사실 마릴라는 앤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나치게 깊어질까 걱정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격렬하게 마음을 주는 것이 죄악은 아닐까 불안했다. 그런 죄책감 때문에 마릴라가 앤을 별로 사랑하지 않는 듯 늘 엄하고 냉랭하게만 대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분명 앤은 마릴라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종종 앤은, 마릴라를 기쁘게 하는 건 참 힘든데다 연민이나 동정심도 턱없이 부족한 여인이라며 아쉬워했던 것이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 (김서령 옮김, 허밍버드 펴냄) 중에서

대낮의 햇빛에서 다정한 눈빛을 보내면 혹시나 앤이 자신의 사랑 그득한 마음을 눈치챌까봐 두려운 마릴라. 장작이 타오르는 어스름한 불빛 아래서 마치 소중한 보물을 자기만 훔쳐보듯이,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앤을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마릴라의 비밀스러운 사랑을 이제 나는 이해한다. 너무 격렬하게 마음을 주는 것은 왠지 죄악처럼 느껴졌기에, 그런 사랑은 마치 신의 영역인 듯 불경스럽게 느끼는 마릴라의 깊고 그윽한 사랑을 이젠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마릴라를 기쁘게 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처럼 느끼는 앤의 간절한 마음보다 수백 배 더 아프고 쓰라렸을, 마릴라의 미처 마음껏 활짝 펼쳐 보이지 못하는 사랑을 알 것 같다.

가엾은 백설공주의 새엄마

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외로운 고아 소녀 앤의 성장소설이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마음의 문을 닫아버려 누구에게도 사랑을 주려 하지 않았던 무뚝뚝한 마릴라의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앤이 자신의 키를 훌쩍 넘어 커버린 것을 발견하는 순간, 이 아이가 어딘가로 멀리 떠날 것 같은 불안을 느끼는 마릴라의 마음을 이제 이해할 것 같다. 나에게 아이가 없음에도, 나는 경험할 수 없는 슬픔임을 알면서도, 나는 마릴라의 아픔을 다 알 것만 같다. 이것은 문학의 힘이기도 하지만 마흔의 힘, 나이 듦의 힘, 내가 할 수 없는 사랑조차 이해하는 마음의 힘이기도 하다.

그 사람의 입장이 아니더라도, 그와 전혀 닮은 점이 없어도, 그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마음이 나이 듦의 축복이 아닐까. 나는 이제 의 새엄마를 이해하려 노력해보기도 한다. 그녀는 사랑받지 못했을 거야, 이해받지 못했을 거야, 누구에게도 어여쁜 시선을 받지 못했을 거야. 사랑받지 못하면 그렇게 나빠질 수 있어. 이해받지 못하면 그토록 난폭해질 수 있어. 백설공주의 새엄마가 그저 나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백설공주의 새엄마를 누가 어떻게 마녀로 만들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게 좋아졌다.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 감상의 깊이가 깊어진다는 것은 삶을 ‘정해진 운명’이 아닌 ‘언제든 게임 규칙이 바뀔 수 있는 예측 불가능의 도가니’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두가 감동하는 뛰어난 작품은 아니더라도 마흔이 넘으니 ‘그저 내 눈에만 좋아 보이는 것들’에 관심이 간다. 예컨대 페르닐라 아우구스트 감독의 영화 은 흥행에도 참패했고 평점도 좋지 않았지만, 나에겐 가슴 시린 영화였다. 재능은 있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화가의 딸로 태어나 아버지의 노예처럼 살아가던 리디아, 역시 재능은 있지만 돈은 지지리도 없는 젊은 기자 아비드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의 결말은 불을 보듯 빤하다. 하지만 나에겐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이야기의 관점을 뛰어넘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를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깨뜨리고, 그리고 다시 그 안에 자발적으로 갇히는 인간의 한계’를 이야기하는 영화처럼 보여 가슴이 뭉클했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지금은 결혼할 수 없다, 너무 가진 게 없어서’라는 남자의 어처구니없는 사랑 고백에 실망한 여자는 돈 많고 나이도 많고 사랑도 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해 딸을 낳고, 그녀의 충동적인 선택에 충격받은 남자도 돈 많고 이해심 많고 역시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해 그 지옥 같은 가난에서 벗어나 유명한 언론인이 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환경의 사슬에 꽁꽁 묶인 두 남녀의 평생에 걸친 사랑, 그 ‘어쩔 수 없음’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축복이 된 마흔의 문턱

엽서 크기의 작은 종이에 아름다운 바다 그림을 그려놓은 채 그 그림 뒤에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다’는 글을 수줍게 흘려 써놓은 여자. 아버지의 나이 든 친구들 틈에 섞여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엉거주춤 서 있다가 그녀의 그림과 피아노 소리에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켜버린 한 남자의 어처구니없는 순수. 두 사람의 ‘다른 삶을 향한 간절한 그리움’이 먹먹하게 다가왔다. 그들이 함께하는 한 이 세상 어디서나 장애물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날 것만 같은 그 절망감을 이해한다.

마흔의 문턱이란 이렇다. 예전보다 더 섬세하게, 더 폭넓게 타인의 인생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에게 매정하거나 야속했던 사람들의 편협함조차 이해되고, 나는 그런 편협함을 갖지 않으리라 다짐하기도 한다. 오해받는 일이 두려워 아예 새로운 일을 시작하지 않기보다 ‘항상 오해받을 준비’를 하고 새로운 도전을 꿈꾸는 용기도 생겼다. 미움받고 오해받고 지탄받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내가 진정한 나로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리는 것임을 이제는 알기에. 지독한 예민함을 사려 깊은 섬세함으로 바꿀 줄 아는 나이, 오래전 누군가에게 상처 입었던 기억 뒤로 숨기 바빴던 소심함을 딛고 일어나 상처와 맨몸으로 대면하는 용기를 낼 줄 아는 나이. 그것이 나에겐 마흔의 축복이니까. 이런 마흔이 좋다. 이런 나이 듦이 아름답고 고맙고 애틋하다.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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