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울아, 너는 잠을 워낙 못 자서 성격이 많이 예민해진 것 같아.” 몇 년 만에 만난 친구에게 들은 뼈아픈 충고였다. “우리 아버지도 너랑 비슷했어. 항상 감기에 걸린 것 같은 몸 상태에, 잠이 늘 부족하니 면역력이 떨어져서 잔병치레에 시달리고, 지나치게 예민한 감각 때문에 남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작은 변화까지도 혼자서 알아채고는 항상 신경이 곤두서 있었지.” 몇 년 전이라면 그런 지적을 들었을 때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안 그래도 예민한 나에게 ‘넌 너무 예민하다’고 지적하는 남의 모든 충고가 뼈아팠으니.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충고를 해주는 친구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이제는 분명히 구분한다. 나를 진정으로 걱정해주는 사람의 따스한 조언과 그저 스쳐가며 생각나는 대로 말해버리는 사람들의 공격적인 잔소리를. 외부의 모든 자극을 ‘되도록 나에게 좋은 쪽으로’ 해석하고 승화시켜 받아들일 수 있는 마흔은, 내 결핍과 콤플렉스조차 끌어안을 수 있는 용기를 준 나이가 되었다. 연재를 마무리하며 내가 ‘이번 생에 마흔이 처음이라’ 매번 좌충우돌하며 배웠던 것들, 서툴지만 온몸으로 부딪쳐서 깨달은 것들을 ‘아름답고 풍요로운 마흔을 십계명’으로 정리해보았다.
누구도 원망할 필요 없는 ‘제로베이스’아름답고 풍요로운 마흔을 위한 십계명1. ‘타고난 환경’ 원망하기에서 벗어나자
자신에게 상처를 준 부모에 대한 원망, 성장 환경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과 진정으로 작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짜 어른이 될 수 있다. 환경이 좋아지지 않더라도, 부모와 화해할 수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부터 내 삶의 토양에 완전히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면 이제 ‘나’만의 마흔을 시작할 수 있다. 내 인생의 출발점에 그 어떤 경쟁자도 후원도 없이 오직 나만 덩그러니 설 수 있는 나이, 누구도 원망할 필요 없는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하는 마흔이 차라리 멋지지 않은가. 그리고 잊지 말자. 내가 지금부터 내리는 모든 크고 작은 결정이 내 삶에 선명한 발자국을 남긴다는 것을. 농담으로라도 부모 탓, 환경 탓, 남 탓은 하지 않아야 하는 나이, 그런 멋진 마흔이 되었으면 좋겠다.
2. ‘스몰 토크’의 힘을 잊지 말자
“도대체 남편이랑 왜 싸운 거야?” “응, 늘 그렇듯이 사소한 거지, 뭐.” 친구들과 이런 대화를 할 때가 있다. 사소한 것 때문에 미친 듯이 분노가 치솟기도 하고, 하찮은 일 때문에 세상이 끝난 것처럼 슬퍼지기도 한다. 우리는 왜 이토록 사소한 것들로 자주 싸우고 토라지고 그것 때문에 마음이 무너지는 걸까. 사소한 것들이 모여 마침내 거대한 문제가 되기도 하고, 하찮은 문제로 보이는 것들에 사실은 너무도 중요한 ‘마음의 문제’가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스몰 토크’(소소한 이야기·수다)를 자주 나누자. 오늘 일터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속 썩는 일은 없었는지, 재미있는 일은 없었는지, 괜히 슬퍼지는 순간은 없었는지. 스몰 토크를 더 섬세하게, 더 따스하게 나눌수록 인간관계는 성숙해지고 우리의 영혼은 풍요로워진다.
3. 종이와 펜을 항상 휴대하자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가장 쉬운 방법은 항상 필기도구를 갖고 있는 것이다. 휴대전화나 태블릿으로는 자꾸 다른 사람이 만든 콘텐츠를 ‘검색’하게 된다. 종이와 펜, 연필 등이 있으면 뭔가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내 생각’을 쓰게 된다. 해야 할 일의 목록도 아주 잘게 나누어 세밀하게 메모하고, 새롭게 떠오른 아이디어는 반드시 완전한 문장으로 메모해두면, ‘앞으로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분노 잠재울 나만의 방법을 찾는 일4. 실력은 전문가로, 마음은 아마추어로
마흔을 지나치며 마주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내 안의 적은 ‘내가 이 일의 전문가다’라는 자만심이다. 자기만족은 매너리즘(관성)으로 뻗어가는 지름길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대한 실력은 부지런히 갈고닦되 내 일을 사랑하는 마음은 언제나 아마추어처럼 순수해야 한다. 아마추어의 본질은 ‘미숙함’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순수한 사랑의 마음’이다. 최고의 장인처럼 일하고, 처음 일터에 나가는 신입 사원처럼 해맑은 ‘첫 마음’으로 내 일을 사랑하자.
5.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나만의 매뉴얼’을 만들자
밖에서 만들어진 ‘화’를 집으로 가져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우선 나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 화는 기폭제와 같아서 한번 불을 뿜기 시작하면 더더욱 심하게 폭발한다. 나도 힘들고 남도 힘들게 된다. 흡연이나 음주 같은 자극적인 방법으로 화를 풀기보다는 몸과 마음을 천천히 자연스럽게 이완해주는 자기만의 매뉴얼을 만들어보자. 화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이나 사람으로부터 잠시나마 나를 떨어뜨리고, 그 봉인된 환경 속에서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작지만 소중한 활동을 해보자. 때로는 1시간 정도 말없이 산책만 해도 화는 풀린다. 소리 내어 아름다운 시를 5분쯤 읽어도 화가 풀린다. ‘물’과 관련된 대부분의 활동은 신기하게 ‘화’를 삭여준다. 따뜻한 차를 마시고, 목욕을 하고, 수영을 하는 등 ‘물’과 가까운 모든 것들은 분노의 불길을 잠재워준다.
6. 영감이 떠오르는 곳,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나만의 장소를 찾아라
일주일에 한두 번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 내가 좋아하는 활동으로 나만의 시간을 채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 도서관이나 박물관처럼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영감을 주는 장소도 좋고, 직업과 상관없이 완전히 새로운 자극을 주는 취미를 배우는 공간도 좋다. 예컨대 그림을 배우거나 악기를 배우는 것은 누구에게나 도움이 된다. 힘들 때 그곳에 가면 폭풍우 속의 피난처를 찾은 듯 행복해지는 그런 치유의 장소를 만들기를.
나 자신이 읽고 싶은 내 이야기7. 마흔,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즐기자
단편적인 정보나 얕은 지식만으로는 삶의 결정적인 순간을 지혜롭게 버텨낼 수 없다. 삶의 결정적인 순간 우리에게는 더 깊고 풍요로운 철학이 필요하다. 꼭 철학자의 저서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에 관련된 모든 책이 결국 ‘삶의 철학’이 되어 인생의 어둠을 헤쳐나갈 때 눈부신 등대가 되어준다.
나는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를 이해하는 데는 마르크스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았고, 인간의 심리를 이해하는 데는 융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았다. 삶의 고통이 지닌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니체의 도움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와 자비가 필요한 순간의 고통스러운 자기인식은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에게 배웠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믿음과 용기가 필요할 때는 수전 손태그와 루쉰에게서 뜨거운 응원을 받았다.
절망에 빠질 때는 그 모든 책 속의 스승들이 내 안에서 지혜의 오케스트라가 되어 아름다운 철학의 교향곡을 연주해주는 것만 같다. 지식을 암기하는 공부가 아니라 내 심장을 고동치게 하는 공부, 내 삶을 바꾸게 하는 공부를 향해 끊임없이 지성의 안테나를 드리우는 마흔이 되기를.
8. 자기에 관한 글쓰기에 도전해보자
일기도 좋고 편지도 좋다. 미니 자서전도 좋다. 출판을 위해서가 아닌 ‘나 자신이 읽고 싶은 나의 이야기’를 써보자. 자기가 쉽게 쓸 수 있는 글을 날마다 조금씩 쓰자. 삶이 달라진다. ‘내 삶을 비춰보는 내면의 거울’이 생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 자신을 고양할 뿐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비춰볼 수 있는 아름다운 내면의 거울을 만드는 일이다.
9. ‘아름다운 마지막’을 준비하기 시작하자
죽음을 금기어로 삼는 것보다는 ‘어떻게 아름답게, 나답게 죽을 것인가’를 조금 일찍부터 고민하기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것은 단지 ‘위급한 상황에서 연명치료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영정사진은 무엇으로 할 것인가’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황혼기가 오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노년이 되어도 지키고 싶은 삶의 가치는 무엇인지 선택하고 결정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아름다운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은 곧 ‘아름다운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일이라는 생각에 다다르게 된다.
소중한 것들을 뒤로 미루지 말기10. 최고의 것들을 먼 훗날로 미루지 말자
‘가보고 싶고, 이뤄보고 싶고, 도전해보고 싶은 모든 것들’을 조금씩 지금부터 경험해보자. 엄청난 도전이 아니어도 좋다. 나는 얼마 전 미국 뉴욕의 링컨센터에서 오페라 공연을 ‘스탠딩’ 입장권으로 사서 보았다. 뉴욕의 물가가 워낙 비싸 여행 예산을 넘겨 ‘콩알만 해진 심장으로’ 소심하게 가장 싼 표를 끊었지만, 결과는 너무나 좋았다. 좌석이 많이 남아서 스탠딩 입장권을 지닌 사람들도 모두 앉아서 공연을 보았다. 그날 본 는 내 인생 최고의 오페라가 되었고, 내 옆에서 함께 스탠딩 입장권을 갖고 있다가 좌석에 앉은 ‘린다 할머니’와 좋은 친구가 되었다. 린다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며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은 결코 늙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린다 할머니와 전자우편을 주고받으며 나는 처음으로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새로운 친구를 여행이 끝난 뒤에도 계속 사귀게 되었다. 일상의 작은 도전도 이렇듯 삶의 소중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이것은 내가 나의 결점투성이 인생으로부터 배운 나만의 마흔 십계명이다. 여러분도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마흔의 십계명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부디 최고의 것들을 먼 훗날로 미루지 말자. 내 친구는 어렸을 때 음식점에 가거나 도시락을 먹을 때 꼭 ‘제일 맛있는 햄 반찬이나 게맛살 반찬을 맨 나중에 먹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맛있는 것을 나중에 먹게 되면 이미 식은 반찬만 먹게 되고, 처음에 가장 맛있었던 그 반찬도 나중에는 이미 그 최고의 향기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것은 사소한 습관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사소한 습관이 우리 삶의 가치관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다.
음식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일도 ‘가장 중요한 것, 가장 멋진 것은 나중에, 시간 나면, 여유가 생기면 보살피자’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사랑은 사치, 여행은 사치, 이런 식으로 소중한 것을 미루게 된다면, 결국 나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 자체가 심각하게 다친다. 나에게 중요한 것들을 지금 할 수 있기 위해 절실한 것은 ‘의지’와 ‘용기’다. 용기는 생각하고 내는 것이 아니다. 의지는 계산하고 내는 것이 아니다. 의지도 용기도 열정도 그냥 폭발하듯 내 안에서 용솟음쳐 나와야 한다.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지금, 가장 행복한 일을 바로 지금, 가장 눈부시고 젊고 빛나는 하루를 지금 만들고, 오늘 가꾸고, 날마다 빚어내는 우리들의 찬란한 마흔을 위해 한 걸음 나아가자.
정여울 작가* 연재를 마치는 ‘마흔에 관하여’ 정여울 작가와의 대담이 12월에 실립니다.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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