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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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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 새로운방

매일 생기는 수많은 감정과 취향의 방들

당신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무한한 기회
등록 2018-04-10 17:48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느낄 수 있는 슬픔의 가짓수가 늘어난다. 웃을 수 있는 유머의 가짓수도 늘어난다. 익숙한 언어로는 좀처럼 표현할 수 없는 새로운 감정의 가짓수도 늘어난다. 나이 들면 무뎌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세상이 더욱 날카롭고 뾰족한 자극으로 다가온다. 점점 더 무난해지기는커녕 자꾸만 더 예민해지는 내가 걱정스럽지만, 이젠 비로소 내 못 말리는 까칠함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넌 왜 그렇게 예민하니? 울 일도 아닌 일에 눈물 흘리고, 웃을 일도 아닌 일에 깔깔 웃고.” “그 영화를 또 봤어? 열 번은 더 봤다며. 지겹지 않아?” “대충 좀 살자. 모난 돌이 정 맞는 거야. 그렇게 까칠하게 굴다간 제명에 못 죽는다.” 지인들이 무심코 던진 말들이었지만, 내겐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다. 나는 대체로 지나치게 예민하고, 평소엔 내성적인가 하면 발작적으로 외향적이기도 하고, 날씨나 기분에 따라 감정 곡선이 그야말로 천당과 지옥을 오간다. 평생 고치려고 노력했지만 ‘그렇지 않은 척하는 어설픈 연기력’만 늘었을 뿐 본질적인 성정은 바뀌지 않았다. 마흔을 넘어서며 그래도 천만다행인 것은 나를 억지로 바꾸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참 싫은 ‘융통성’이란 단어

‘융통성’이라는 단어가 참 싫다.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문장은 더 싫다. ‘남들 하는 만큼은 하고 살자’는 문장은 더더욱 싫다. 차라리 ‘곧이곧대로’ 자기 마음의 문양대로 거침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럽다. 나는 아직 ‘융통성 있게’ 요령을 부리며 살지 못하고, ‘곧이곧대로’ 제 길만 뚜벅뚜벅 가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다. 예전엔 이런 내가 참 못마땅했지만, 이젠 그런 나를 보듬어주기 시작했다. 불편한 순간도 있지만, 나의 어쩔 수 없음을, 스스로 바뀔 수 없음을 언젠가부터 완전히 받아들였다. 내가 못 가진 것들만 목마른 눈빛으로 우러러 바라보던 한평생을 뉘우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진 것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 또한 마흔 즈음의 미세한 변화다. 예민함과 까칠함으로 주변 사람들의 타박을 많이 받았지만, 바로 그 성격 때문에 지칠 줄 모르고 글을 쓸 수 있는 에너지를 얻었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누구나 쉽게 지나치는 사소한 장면들 앞에서 나는 혼자 울컥하기도 하고, 책 한 권 읽고 너무 많은 생각이 떠올라 정해진 원고 분량보다 5배는 긴 서평을 써놓고 줄이기 힘들어 끙끙거리기도 한다. 분명 열 번도 더 본 영화인데 다시 보면 또 다른 장면에서 눈물샘이 터져 혼자 아이처럼 훌쩍이기도 한다. 잠깐 사이에 독서 삼매경에 푹 빠지거나 아이디어를 메모하느라 지하철역을 자꾸 지나치기도 한다. 사회생활에 무난히 적응하기엔 참 어려운 성격이지만, 글 쓸 때는 이 과도한 예민함이 무궁무진한 영감의 원천이 된다. 남들이 무심코 지나쳐버리는 장면에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그 안에서 반드시 의미의 진주를 캐내는 이 창조적인 집착이야말로 나의 글쓰기 비결이다. 나는 집착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예민하다, 고로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주체할 수 없는 감성의 폭발로 매일 끙끙 앓는다. 그래서 비로소 나답게 살 수 있다. 무뎌지거나 무난해지지 못하는 것은 질병이 아니라 나다움을 지키는 나름의 내면 건강법이 아닐까.

이제는 고독 안에서 슬픔이 아닌 안도감을 느낀다.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글을 쓸 때조차 완벽한 고독을 느낀다. 나는 글을 쓰는 순간만은 내 주변에 투명한 유리막이 둘러지는 듯한 달콤한 환상을 느낀다. 그럴 때 나는 그토록 걱정했던 나 스스로의 내향성을 즐긴다. 내 예민함과 춤까지 춘다. 그런데 이 예민함이 글쓰기와 만났을 때는 행복한 춤을 추지만, 아픈 기억이나 트라우마와 만났을 때는 끝 간 데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기에 주의가 필요하다.

얼마 전 한 잡지사로부터 ‘옛사랑’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나는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땅에 떨어뜨릴 뻔했다. 오랫동안 아픈 기억과의 대면을 애써 피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올 게 왔다 싶었다. 나는 갑자기 말을 더듬으며 머뭇거렸다. ‘아, 그 주제로 꼭 글을 써야 한다면 피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과 동시에, ‘작가가 옛사랑의 추억 몇 줄도 못 적으면 과연 작가의 자격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와 뒤통수를 내려치는 느낌이었다. ‘옛사랑’이라는 주제의 원고 청탁을 피하고 싶은 마음은 인간적인 나약함이었고, 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작가로서의 자존심이었다. 그런데 이것저것 재보며 천천히 결정하려고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 원고 청탁 주제를 듣자마자, 이미 마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듯 기억의 실타래가 미친 듯이 풀려나왔다.

영원히 아물지 않는 슬픔의 방

그 사람 때문에 상처받았던 기억, 복수하듯 내가 상처를 준 기억, 돌이킬 수 없이 서로의 마음에 치명상을 내고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한 사람과도 수없이 헤어졌던 모든 기억이 쏜살같이 밀려들었다. 마지막으로 본 지가 10년이 넘었는데도. 오래전 완벽하게 봉인한 줄로만 알았던 그 아픔은 마침내 봉인이 풀려나자 미친 듯한 속도로 쏟아져나왔다. 절대 열려서는 안 될 슬픔의 수문이 열리고 말았다. 한 달 넘게 아픈 기억의 습격에 시달리며 슬픔의 파도가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렸는데, 아직도 마음이 시름시름 앓는다. 이것 또한 마흔 넘어 느끼는 새로운 종류의 아픔이다. 슬픔의 방 문은 야무지게 꽝 닫히지 않는다. 과거를 바꿀 수도 없고, 현재 또한 바꿀 수 없지만, 내가 그 사람과 그 기억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온몸이 결박당한 채 그저 ‘아파할 수 있는 자유’밖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느낌. 이 무력감과 싸워 이길 때 나는 한 인간으로서도, 작가로서도 다시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겠지. 그 아픔의 심연 아래 깊이 생각의 닻을 드리우니, 이제야 숨통이 트였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마음속에 나도 모르는 새로운 아픔의 방이 존재했구나. 영원히 아물지 않는 슬픔의 방이 있다는 걸, 이제는 그만 인정해주어야겠구나.

숨 막히는 아픔이 온몸을 덮치더라도, 그래도 마음속에 새로운 방을 만들 수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마음속에 새로운 가치나 감정의 방을 만들 수 있다는 것, 그거야말로 아직 우리 심장이 팔딱팔딱 뛰고 있다는 기쁜 증거이니까. 평창겨울올림픽 당시 여자 대표팀의 컬링 경기를 손에 땀을 쥐고 바라보면서 스스로 화들짝 놀랐다. 원고 마감이 코앞인데 텔레비전을 켜놓고 글을 쓰려니 한 줄도 제대로 써지지 않았지만, 그 미친 듯한 설렘이 반가웠다. 축구에도 야구에도 무관심한 내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기 규칙도 제대로 모르던 컬링 경기에 왜 이토록 열광하는가.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누군가 든든하게 뒤를 받쳐주지 않아도, 오직 하나의 목표를 향해 꾸밈없이 해맑게 돌진하는 선수들의 아름다운 삶이 그저 경기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우리 안의 죽어버린 젊음을 이끌어내는 것, 우리 안에 새로운 것을 향한 갈망을 이끌어내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속에 ‘컬링의 방’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참 좋다. 컬링만 생각해도 기분이 좋고, 컬링 선수들의 어여쁜 이름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쿵쾅거린다.

톱이라는 무기로 천상의 음악을

내 마음속에는 수백 가지 ‘무어라 이름 붙이기 힘든 감정의 방들’이 존재한다. 그때는 표현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말할 수 있는 것들의 방, 그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은 느낄 수 있는 것들의 방,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애틋한 향수와 그리움을 모아놓은 방, 아직 담담해지지 않은 슬픔들이 통곡하는 방. 슬프긴 한데 울지 않을 수 있는 담담한 아픔의 방도 있다. 언젠가 친구와 함께 바닷가에서 아이들과 뛰노는 엄마들을 바라보며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난 평생 저런 기쁨은 못 누리겠지? 햇살이 쏟아져내리는 바닷가에서 아이들과 모래성을 만들면서 깔깔대는 기쁨. 햇살을 등지고 해변을 서성이며 시간이 가는지도 해가 지는지도 모르는 엄마의 기쁨.” 친구에게 털어놓은 내 마음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제는 예전처럼 가슴이 많이 아프지는 않았다. 이것은 나에게 새로운 종류의 슬픔인 것 같다. 완전히 없앨 수 없지만, 아직도 아프지만, 자발적으로 간직하기로 결심한 슬픔. 마음속에 ‘새로운 방’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하여 회한도 쓰라림도 없이 담담히 말할 수 있을 때, 나는 기쁘게 마흔이라는 시간의 무게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내 마음속에는 그렇게 수많은 방이 아직도 매일매일 만들어지고 있다. 내가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그 감정들을 마침내 내 것으로 품어 안아줄 때까지. 규정할 수도 없고, 미리 제한할 수도 없는 수많은 감정과 취향의 방들이 아직 도배가 덜 끝난 상태로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가슴이 설렌다. 몇 년 전 ‘톱으로 만든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도 바로 그렇게 새로운 마음의 방이 만들어지는 순간의 희열을 느꼈다. 배우 브릿 말링이 각본과 주연을 함께 맡은 멋진 영화 에서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청소부이자 자신의 인생을 돌이킬 수 없이 망가뜨려버린 한 여인을 위해 ‘톱’이라는 무기로 천상의 음악을 연주해내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무시무시한 톱을 왼팔에 살포시 보듬고 오른손에는 활을 든 채 톱을 그야말로 바이올린처럼, 해금처럼 정성스레 연주하는 한 인간의 모습은 처연하고도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평생 가슴에 남을 것 같다. 서양 음계에 익숙해진 나의 귀는 무한에 가까운 음을 내는, 도도 아니고 레도 아닌 소리, 미도 아니고 파도 아닌 소리로 온몸을 간질이는 톱의 흐느낌을 제대로 들을 귀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톱이라는 무기에서 무한한 음악의 소리를 뽑아내고 있었다. 마음속에 ‘톱’이라는 도구이자 무기를 ‘악기’로 만들어낸 혁명적인 장면이었다.

당신 마음속에 불을 질러라

우리 가슴속에 아직 ‘마음속에 새로운 방’을 만들 여력이 남아 있는가. 최근 1년 안에, 당신 마음속에 불을 질러 새로운 마음의 방을 만들게 한 새로운 자극이 있었는가. 그것은 아직 당신이 나이 따위의 중력에 이끌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삶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너무도 많이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자유롭다. 당신은 눈부시다. 당신에게는 아직 삶을 새로 시작할 무한한 기회가 있다. 당신에게 ‘마음속에 새로운 감정의 방’을 만들 수 있는 아주 작은 설렘의 불씨가 남아 있다면.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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