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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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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라, 슬픈 유전자

모범생 큰언니와 두 동생의 소외감과 외로움

저마다의 삶에서 살아남으려 분투한 세 자매
등록 2018-06-26 16:26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그거 알아? 언니 성격이 지금은 완전 ‘용’됐지만, 옛날에 언니는 좀 재수가 없었어. 맨날 우리한테 ‘조용히 해달라’ 그러고. 혼자 공부만 하고, 우리랑 놀아주지도 않고. 완전 짜증 나는 언니였어. 온몸이 가시로 덮인 사람 같았다니까. 맨날 날카롭고 예민해가지고.”

나보고 ‘나이 들더니, 언니가 예전보다 성격 많이 좋아졌다’고 칭찬하며 막냇동생 상은이가 ‘참고로, 토를 달듯’ 던진 진심이었다. 동생의 칭찬(‘언니 성격 많이 좋아졌어!’)은 기억이 잘 안 나고, ‘내가 예전에 그렇게 재수 없는 언니였구나’ 하는 아픈 깨달음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동생의 본래 의도는 그게 아니었을 텐데, 사람의 기억력이란 참 자기중심적이다.

“왜 언니 혼자 공부를 잘했어?”

나도 나름대로 너희들 탓에 외로웠다는 항변을 하고 싶어서, 세 자매 중에 항상 나는 혼자고 너희 둘만 친한 것처럼 보였다며 때아닌 응석을 부려보았다.

“그래서 너희 둘만 친했구나. 언닌 맨날 왕따 같았어. 게다가 너희가 언니 말을 어디 들어주기나 했냐. 나처럼 아무 힘 없는 큰언니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나의 응석을 받아주지 않는 동생은 싱긋 코웃음을 치며 이런 말도 했다.

“그러게 왜 괜히 언니 혼자 공부를 잘하고 그랬어?”

이 말을 농담으로 던진 뒤 키득키득 웃긴 했지만, 공부 잘하는 언니 때문에 늘 스트레스를 받았던 동생의 상처가 묻어 있는 뼈아픈 말이었다. 여동생 둘은 함께 방을 쓰고, 나는 혼자 방을 썼다. 그래서인지 둘만 친하고 나만 외톨이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아마 동생들은 혼자 방을 차지한 내가 부러웠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대로 외로웠다. 우리 집에 나와 비슷한 사람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우리 집에는 친가와 외가를 통틀어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없었고, 글쓰기를 평생의 업으로 삼은 사람도 없었으며, 인문계 대학원에 진학한 사람도 없었다. 나는 내 고민을 이야기할 곳이 없었다. 꼬마 때부터 외로움을 부적처럼 문신처럼 달고 다녔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저마다 가정을 이루어 독립한 지금에야, 우리는 모두 각자의 외로움을 영원히 벗어던질 수 없는 배낭처럼 짊어지고 다녔음을 알게 되었다.

둘째 고은이는 첫아이를 낳았을 때의 느낌을 내게 고백하며 처음으로 자신이 얼마나 외로운 심정이었는지 말했다.

“언니, 현서가 태어났을 때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아? 처음으로 내가 이 세상에 진짜 필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았어. 내가 이 아이의 엄마구나, 적어도 이 아이에게는 내가 꼭 필요하겠구나.”

나는 너무 당황하고 가슴이 아파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고은이는 어린 시절부터 ‘둘째의 서러움’을 속속들이 느껴본 아이였다. 첫째는 맏이라서 주목받고, 셋째는 막내라서 귀여움을 받지만, 둘째는 아무래도 양쪽에서 치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나와 고은이는 연년생이라 더욱 심하게 비교당했고, 고은이에겐 ‘모범생 여울이 동생’으로 살아가는 일이 결코 녹록지 않았다. 막내는 지독히 감성적이고 몸서리치게 예민한 두 언니의 힘겨운 인생을 관찰하면서, 다행히도 우리보다는 낙천적이고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으로 성장해갔다. 하지만 우리 셋 중에서 가장 섬세하고 내성적인 고은이는, 어른이 되고 나서도 한참 동안 방황했다. 아무리 그래도, 고은이가 그 정도까지 자신의 삶을 어둡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마흔이 넘도록, 나는 내 동생의 소외감과 외로움을 그리도 몰라주었던 것이다.

외로움을 감춘 채 살아온 날들

나는 동생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고은아, 네가 얼마나 소중하고 빛나는 아이인데, 네가 나에게 어떤 동생인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니. 그런 말을 하고 싶었지만, 가슴이 먹먹하고 목이 메어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고은아, 넌 항상 이 세상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었어. 넌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많이 닮은 분신이야. 나의 가장 슬프고 아픈 손가락. 세상에서 나와 가장 닮은 유전자를 지녔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참 다른 삶의 길을 걸어왔던, 한 살 차이 나는 쌍둥이 같은 그런 존재야.

언젠가 영하 10도 가까이 되는 지독히도 추운 날씨에, 네가 내 책을 서점에서 사려고 나온 적이 있었지. 그때 얼마나 고마웠는지, 내가 말해준 적 있었나. 내가 책을 선물해주려고 하는데도, 너는 한사코 네가 직접 내가 쓴 책을 사야 한다면서 그 추운 날 갓난아기 현서를 데리고 나를 만나러 광화문 교보문고까지 나와주었지. 어쩌면 나를 작가로 만든 건 내 글을 나 자신보다 더 아껴주는, 너처럼 아름다운 독자가 있어서인지도 몰라.

‘세 자매’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우리 집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지만, 떠들썩하고 다정다감한 분위기였음에도 우리 셋은 곧잘 외로움을 느꼈다. 늘 서로가 곁에 있었기에 절대로 외로울 수 없는 환경에서 컸던 우리는 뜻밖에도 말 못할 외로움과 소외감을 서로에게 말하지 못한 채 자라난 것이다. 각자의 외로움을 패잔병처럼 등에 짊어진 채. 각자의 슬픔을 복화술처럼 늘 명랑한 화법 속에 숨겨둔 채. 고은이와 나는 벌써 마흔이 넘었고, 귀염둥이 막내 상은이도 벌써 삼십 대 중반이지만, 아직도 우리 각자가 견뎌야 했던 외로움이 사무칠 때가 있다. 우리는 저마다의 위치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했다. 때로는 무언가가 되기 위해, 때로는 무언가가 되지 않기 위해.

다행히도 우리의 ‘다음 세대’는 우리보다 덜 외로운 환경에서, 우리보다 덜 아파하며 자라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을 쓸어내리곤 한다. 조카 현서, 윤성, 준우는 한동네에서 함께 살면서, 외롭지 않게, 서로를 비교하지 않는 낙천적인 부모들 곁에서 행복하게 자라나고 있다. 언젠가 막내 상은이가 고은이의 큰아들 현서를 꼭 안고 이렇게 말하는 것을 엿들었다.

“현서야, 나중에 힘들고 어려운 일 있으면 이모한테 언제든 전화해. 엄마한테 말하기 쑥스러울 땐, 이모한테 연락해도 돼. 이모가 꼭 현서 편이 되어줄게.”

현서는 어리둥절해서 “왜요?” 하고 묻는다. 나중에 힘들고 어려운 일이 어떻게 생긴다는 건지, 그때 왜 이모에게 전화를 해야 하는 건지, 모두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모는 현서 친구가 되고 싶으니까. 친구는 어려울 때 서로 돕고 이해해주는 거니까.”

저럴 때 보면 내 동생이 과연 ‘우리 막내’ 맞나 싶을 정도로 어른스럽고 아름답다. 이모라서, 가족이라서가 아니라 현서의 ‘친구’가 되고 싶어서라니. 가족 안에서도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사랑할 줄 아는 내 동생의 지혜로움이 부럽다. 나는, 우리는 분명 저런 사랑을 경험한 적이 없는데, 저런 깊고도 눈부신 사랑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늘 어른스럽게 웃자란, 너무 일찍 철들어버린 아이였다. 한 번도 아르바이트를 쉰 적이 없고, 늘 고생하면서 자란 아이라 안쓰러웠는데, 상은이는 내가 지금까지 알아온 그 어떤 사람들보다 더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어른이 되었다.

서로를 가장 잘 아는 타인들

요새 두 아이의 엄마 고은이는 카리스마가 넘친다. 아마도 고은이 또한 마흔 즈음에 뭔가 큰 깨달음을 얻은 듯하다. 더 이상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을 미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여리디여린 내 동생 고은이 또한 깨달았다. 고은이는 미술치료사 자격증도 따고, 역사 관련 모임도 열심히 다니더니, 장학금을 받으며 방송통신대학에 다니는 것도 모자라 최근에는 친한 엄마들과 함께 ‘책 읽는 엄마들의 이야기’를 담은 팟캐스트를 진행하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내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란 제부가 내게 이렇게 귀띔을 해주었다.

“요새 우리 고은이가 변했어요.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요구하는 것도 많고. 아, 제가 요새 힘들다니까요.”

우리 세 자매는 이런 대화를 나눈다. “엄마가 해준 음식이 엄마 집에서는 맛있는데 이상하게 우리 집에 가져오면 그 맛이 안 나.” 엄마의 잔소리와 엄마의 눈빛, 우리가 살았던 시절의 추억이 남아 있는 집 안 구석구석의 분위기와 살림살이들까지, 그 모든 것들이 만들어낸 아우라가 함께 있어야만 엄마 집의 엄마 밥 맛이 나는가보다. 우리는 단지 ‘가족’이어서가 아니라 ‘서로를 가장 잘 알고 있는 타인들’이기 때문에, 한때 함께였지만 이제는 서로를 가장 많이 걱정해주는 머나먼 타인들이기 때문에, 따로 또 같이 행복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얼마 전 한국보육진흥원에 심리학 관련 강연을 하러 갔다가, 뜻밖에 너무도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정여울 작가님, 혹시 준우 이모님 아니세요?”

이곳에서 내가 ‘준우 이모님’인 걸 아는 사람이 도대체 누굴까 싶어 깜짝 놀라 쳐다보니, 막내 상은이의 아들 준우의 어린이집 원장님이셨다. 내가 준우를 데리러 어린이집에 간 적도 있었는데, 그때 내 얼굴을 기억해두셨나보다.

“원장님, 준우가 원장님을 너무 보고 싶어해서 유치원 적응이 힘들대요.”

“저도 요새 준우가 너무 보고 싶어요.”

“어린이집만 하시지 말고 유치원도 같이 하시면 안 될까요. 제 동생 상은이가 그렇게 사랑이 넘치는 유치원은 다시 찾을 수가 없다고 속상해해요.”

“아이코, 지금도 버거운걸요. 그런데 준우 이모님, 정말 반가워요. 오늘 강의 잘 들었어요.”

‘준우 이모님’으로 행복한 순간

오늘은 ‘작가’라서가 아니라 준우 이모님이라서 참 행복하다. 그날만은 정여울 작가라서가 아니라 준우 이모님으로 완전히 살아낸 기분이었다. 지금 상태에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의 유전자, 행복을 행복 자체로 느끼지 못하는 마음의 유전자를 타고난 우리는 처음으로 아이들을 통해 ‘그냥 이 순간이 있는 그대로 최고의 순간’임을 온몸으로 느끼는 법을 배우고 있다. 삶이 어떤 대단한 선물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내게 던져진 이 삶, 아니 내가 투쟁하여 이루어낸 이 삶이 그 자체로 아름답다는 것을, 마흔 즈음의 나는 비로소 받아들이게 되었다.

가장 비극적인 마음의 유전자, 행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의심의 유전자를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우리는, 이 슬픈 유전자를 우리 아이들에게만은 물려주지 않기로 결심했다.

조카 현서는 나에게 묻는다. “이모, 음악이 끝나면 음악은 어디로 가는 거야?” 그 음악이 정말 좋았니? 그렇다면 그 음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여기 네 가슴속에 살아남는 거야. 이모가 늙고 병들어 이 세상을 떠날지라도 네 마음속에 이모가 영원히 살아 있는 것처럼. 내게 무슨 일이 닥쳐온다 해도, 지금의 이 삶이 내게 선물하는 축복의 과즙을 단 한 방울도 놓치지 않고 다 마셔버려야겠다.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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