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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 합창단 지보이스 10년 담은 다큐 <위켄즈>

베를린영화제 관객상 받은 솔직한 삶의 노래
등록 2017-01-03 12:17 수정 2020-05-02 19:28
영화사 반달 제공

영화사 반달 제공

10주년 공연을 앞두고 재우는 풀 죽어 말한다. “10년이 됐는데, 여전히 (우리는) 노래를 못하지?” 한국 유일의 게이 합창단 ‘지보이스’(G_Voice) 다큐멘터리영화 (Weekends)의 시작에 나오는 대사는 이렇게 은유하는 것처럼 들렸다. “왜 우리는 아직도 게이로 사는 법을 완벽하게 모르지?”

영화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게이로 살아가는 법을 배운 인생학교이자 차밍스쿨인 지보이스 단원들의 삶을 노래, 인터뷰, 사건으로 전한다. 지보이스는 한국남성동성애자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소모임으로 출발했다. 다큐를 보고 감독 동하, 출연진 재우와 현식과 가람의 얘기를 이들이 사는 서울 망원동 무지개집(성소수자 공동주택)에서 들었다.

나를 위한, 세상을 향한 노래

“2011년 서울에 사는 게이 4명의 일상을 담은 이 개봉했다. 4명 중 1명이자 지보이스 단원인 영수의 장례식이 담겼고 이때부터 사람들이 사라지고 들어오는 것을 기록해야 한다는 절실한 생각이 들었다. 의 ‘영수’ 부분에 지보이스 공연 장면이 너무 재미있게 나오기도 했고, 게다가 그 친구가 세상을 떠나서….”(재우)

“원래는 지보이스 10주년 기념공연을 기록하는 다큐였다. 당시 공연을 준비하면서 긴장이 장난이 아니었다. 장르물이라고 해야 하나? 아마추어들이 합창 공연을 하면서 울고불고 싸우다 어렵게 화해하면서 잘 끝난다. 그런 정도? 근데 그해에 아무도 안 싸웠다.”(동하)

결국 다큐는 우여곡절을 거듭하며 이어졌다. 2013년 한국남성동성애자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20주년, 친구사이 소모임 지보이스 10주년을 기념하는 다큐로 끝났으면 감독 동하는 직장을 다니며 4년 동안 촬영하고, 1년간 편집하는 수고를 조금 덜었을 것이다. 그랬으면 지금처럼 산전수전 인생사에 복잡다단 연애담과 감동적인 투쟁사까지 담은 를 보지 못할 뻔했다. 지보이스 단원의 일상과 인터뷰 사이에 노래극 형식이 섞이는 게이 다큐는 뜻밖에 의 21세기 버전 같은 노래로 시작한다. 은 1970년대 노동자의 설움을 담은 노래극이다.

“백화점에서 이천원짜리 빵을 파는 나 하루 종일 서서 일해 종아리만 굵어져/ …쉽지 않아 나는 누구에게도 나에게도 쉽지 않아 그래서 난 피곤해/ …인생이라는 건 그런 것일까 쉽지 않은 나는 자위한다 이젠 자겠다” ( 가사 일부)

지보이스는 게이 합창단일 뿐 아니라 일하는 노동자이고, 싸우는 사람들이란 선언이다. 저임금 노동자, 만만한 게이로 나를 쉽게 보는 세상에 맞서는 방식조차 게이답다. 지보이스 단원들의 직업은 동네 의사, 미대 오빠, 패션 MD(메가 딜러), 인권활동가 등등등. 게이라는 공통점이 아니면 도통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이 피곤한 일상에도 주말에 꼬박꼬박 모여 되지도 않는 합창을 연습하고, 연습보다 치열한 뒤풀이를 하며, 1년에 한 번 반드시 공연을 한다.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보인다. 나를 위해, 세상을 향해 ‘불러야 할 노래’가 있어서다.

먼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단원들은 잠시 유년기를 회고한다. 아주 올바른 게이 성장담 영화 는 “누나의 장미꽃 잠옷”을 보고 질투로 울어버린 미대 오빠의 어린 시절,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몰래 알게 된 대학 선배를 “죽여버려야겠다”고 생각하다 “사귀게” 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성애자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는 동성애자 다큐라면 외면할 만한 솔직한 성생활 이야기도 나온다.

지지받고 지지하는 은혜를 받다
<위켄즈>는 뮤지컬이 일상과 섞이는 형식의 다큐멘터리영화다. 뮤지컬 부분에 나오는 가람 커플(위쪽). 지보이스 단원들은 일요일 오후마다 모여 노래를 부르고, 1년에 한 번 정기공연을 이어왔다. 영화사 반달 제공

<위켄즈>는 뮤지컬이 일상과 섞이는 형식의 다큐멘터리영화다. 뮤지컬 부분에 나오는 가람 커플(위쪽). 지보이스 단원들은 일요일 오후마다 모여 노래를 부르고, 1년에 한 번 정기공연을 이어왔다. 영화사 반달 제공

“출연동의서를 세 번 썼다. 처음엔 ‘출연한다, 아니다’. 다음엔 ‘전체 무대 장면만 출연 가능하다, 세 명 이상이면 가능하다, 한 명이어도 좋다’. 점점 내용이 자세해졌다. 얼굴이 나오는 상영 범위도 정해야 했다. ‘영화제는 가능, 개봉까지 가능, 아이피(IP) 티비는 안 돼.’ 여배우 출연 조건보다 까다롭달까.”(현식)

게이 수십 명이 모자이크 없이 나오는 다큐가 가능하기 위해 기나긴 심사숙고, 벽장을 넘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 어려운 걸 해낸 한명 한명의 얼굴이 귀한 다큐다. 지보이스 단장 현식은 “영화관 상영 버전을 영화관이 아니면 보지 못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인터넷 버전에서는 나오기 어려운 얼굴이 일부 있어서다. 지보이스 정기공연 포스터에 얼굴 나오는 것도 어려워한 이들이 영화 출연에 흔쾌히 동의하기까지, 쉽지 않은 과정이 있었다. 재우는 “지보이스 하면 예뻐진다”고 하지만, 현식의 얘기는 다르다.

“한 달에 한 번 친구사이 정기모임에 나와서 새벽까지 술만 마셨다. 그것으로 만족했다. 지보이스 단원은 생각도 안 했다. 어쩌다 공연 스태프를 하게 됐다. 지보이스 연습을 보고 집으로 가는데 괜히 짜증이 났다. ‘하…, 좋겠네. (저들은) 뭐가 저렇게 재미있지….’ 잘 몰랐는데 질투와 동경이었다. 허한 마음을 채우려고 들어갔다.”(현식)

지보이스는 발성법을 배우듯 게이로 살아가는 방식을 익히는 학교였다. 는 이들의 일상과 뮤직비디오 형식을 섞어서 그것을 보여준다. 믿었던 성인에게 성추행당하고 동생 둘을 데리고 집에서 나와야 했던 최강은 “친구도 없고 자신감도 없었다”고 말한다. “강희 목소리가 좋다”고 손잡아주는 지보이스 ‘언니’ 재경이 없었으면 최강은 웃으며 노래하지 못했을 거다. 재경은 단지 지보이스, 친구사이에서 받은 것을 다음 세대에게 돌려주려 했을 뿐이다. 그렇게 너무 고마워서 서로 돌려주다보면 “지지하고 지지받는 심리적 공동체”의 일부가 된다. 그렇게 는 성소수자 공동체의 ‘은혜’를 노래한다. 지보이스 인생학교에는 지난 13년간 게이 200여 명이 들고 났다.

“우리라면 좋았을 시간 동안/ 하늘에 고백한 사랑, 원망이 되어/ 세상을 향해서 눈 흘겨본다면/ 단 한 번만 불러 세워서 비웃는다면/ 세상아, 너의 죄를 사하노니/ 사랑, 또 사랑이었네” ( 가사 일부)

똥물을 맞는다. 김조광수·김승환 부부의 공개 결혼식에 난입한 개신교 신자가 똥물을 뿌린다. 지보이스 단원들이 무대에서 축가를 부르던 중이었다. 소동이 끝나고 무대 뒤에서 고약한 냄새가 스민 셔츠를 벗으며 한 젊은 단원은 말한다. “똥물이라 다행이다. 칼이나 화학약품이면 어쩔 뻔했나.” 가 담은 시간은 성소수자 혐오가 지독한 시대와 겹친다. 지보이스의 노래가 단단해질 수밖에 없던 이유다.

테러를 당하고 젊은 단원들은 꿋꿋했지만, 지보이스 초대 단장이자 지보이스 노래의 작곡가 재우는 눈물을 참지 못한다. “너무 멋있어. 잘했어.” 붉은 눈시울로 말한다. “이렇게 착하고 예쁜 애들인데, 모르는 사람이잖아요.” 서로가 곁에 있어 혐오는 지나가는 무엇이 된다. “똥은 씻으면 그만이니까”라는 깨달음은 함께 있어 가능하다.

베를린의 극찬, 서울의 감동
지보이스는 2014년 12월 서울시청 무지개 점거농성장에서 거의 매일 노래를 불렀다. 서울시민 인권헌장 무산에 항의해 성소수자들은 서울시청 점거농성을 벌였다. 영화사 반달 제공

지보이스는 2014년 12월 서울시청 무지개 점거농성장에서 거의 매일 노래를 불렀다. 서울시민 인권헌장 무산에 항의해 성소수자들은 서울시청 점거농성을 벌였다. 영화사 반달 제공

“우린 같은 영화를 찾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노래로 인권을 이야기하고 사회적 변화를 이야기하는 영화가 오늘 우리에게 필요했다.”(베를린영화제 프로그래머)

2016년 2월 베를린영화제에 다녀온 재우가 전하는 해외 평가다. 는 제66회 베를린영화제 파노라마 다큐멘터리 부문에 초청됐다. 독립다큐가 상업영화도 못한 일을 해냈다. 파노라마 부문에서 한국 영화 최초로 관객상을 받았다. 타이 방콕, 홍콩, 캐나다 밴쿠버, 독일 브레멘, 프랑스 파리 등 초청된 영화제마다 호평을 받았다. 다른 한국 영화는 베를린영화제 초청만으로 화제가 되지만, 관객상을 받은 다큐에 대한 고국의 대접은 박하다. 친구사이가 종잣돈을 모으고, 많은 사람이 펀딩해주고, 영화제 기금을 받고, 영화사 반달이 공동 제작하지 않았다면 상영조차 어려웠다.

영화가 개봉하자 동성애 혐오세력의 조직적 방해로 보이는 ‘별점 테러’도 받았다. 지보이스 단원이자 ‘희망을 만드는 법’ 변호사인 가람은 “는 즐거운 로맨틱 코미디 뮤지컬 다큐다. 관객을 만날 상영관 확보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어렵게 개봉했지만 상영관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 가람은 개봉 직후 무지개집 테라스에서 우연히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며 빌었다. “ 관객 1만 명 넘게 해주세요. 네?” 온 우주가 도와주기 시작한다. 입소문이 퍼진다.

“한없이 여린 사람들이 손에 손잡고, 두 발로 굳세게 무대를 딛고 서서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는 영화 .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반차까지 내서, 오후에는 울다 부은 눈으로 출근해야 하지만 그래도 후회 없는 영화 관람.ㅋ.”(강경민 페이스북 갈무리)

쌍용자동차 농성장 공연에서 박래군 인권중심 사람 소장이 지보이스를 소개하며 “인권운동계의 아이돌”이라고 외친다. 지보이스가 만난 세계는 전남 진도 팽목항의 세월호 유가족, 고공농성장의 쌍용차 해고노동자로 확장된다. 농성장 공연에 대한 답으로 쌍용차 조합원들이 성소수자 집회에 나와 지보이스 노래를 부른다. 고동민 쌍용차 조합원의 말처럼 “좋아 보이고 행복해 보이는” 지보이스 노래는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넘어 울려퍼진다.

세월의 힘에 대한 영화

“벌써 4년 전 일이다. 종로 구석 작은 술집에서 내가 다큐멘터리를 연출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을 때 지보이스 노래 가사 한 구절이 밤새 머릿속을 맴돌았다. ‘꼭 니가 얘기해줘 사라지지 않도록/ 이 고단한 세상 살아남으라 나의 사랑아 또 나의 자랑이여’”(동하)

이동하 감독은 “한글로 쓰면 위켄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뜻도 있다”고 말했다. 지보이스 13년, 친구사이 23년, 4년, 그들은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일로 만들었다. “고작해야 10년이 지났어. 이제 다시 시작”이라는 무시무시한 지보이스 노래 가사처럼, 그들의 뜨거운 주말은 끝나지 않았다. 는 그 세월의 힘에 대한 영화다. 울다 웃다 보면 ‘로맨틱 코미디 뮤지컬 다큐’의 90여 분이 훌쩍 지난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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