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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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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지우기

등록 2016-12-30 15:29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니죠?”

2012년 초쯤이었을 게다. 당시 친박 핵심으로 꼽히던 김재원 전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 의원의 목소리엔 ‘아직도 모르느냐’는 한심함이 묻어 있었다. 기자는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려는 진짜 이유는 뭔가’라고 물었다. 충분히 짚히는 게 있었지만 측근에게 직접 듣고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당신이 짐작하는 이유와 내가 생각하는 이유가 다르지 않을 거요”라고 답을 대신했다. 2007년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검증 청문회 때 박근혜 후보의 개인사를 도맡아 자체 검증하고 방어 논리를 세운 그였다. 몇 달 뒤인 그해 9월, 그는 기자들과의 술자리에서 “박근혜 후보가 정치를 하는 것은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한 것”이라고 천기를 누설했다. 그는 대변인 자리에서 물러났다.

효심과 초심

집무실에 나오지 못한 채 청와대 관저에서 버티기로 일관하는 박근혜 대통령을 보며 그의 일그러진 ‘초심’을 생각한다. 그는 왜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답변서에서 “국정수행 총량 대비 최순실 등의 관여 비율을 계량화한다면 1% 미만이 된다”는 구차한 변명을 내놓으면서까지 자리에 매달리는 것일까. 마지막까지 그를 붙잡는 건 무엇일까.

외환위기 때인 1997년 한나라당에 입당한 박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국민과 돌아가신 아버지가 일으켜세우신 나라인데, 어떻게 하다 이런 지경까지 왔는가, 참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 이루 금할 수가 없습니다. 뭔가 저라도, 조금이라도 도움이라도 이 나라에 될 수 있다면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이 저의 도리라고 생각하고, 오늘 이 자리에 오게 된 것입니다.” 이듬해인 1998년 16대 총선 때 그가 대구 달성에 내건 선거 현수막도 “박정희가 세운 경제, 박근혜가 꽃 피운다”였다. 10·26 이후 정계 입문까지 18년간의 은둔 생활에서 매달린 화두도 오로지 ‘아버지의 억울함 풀기’였다.

‘초심’은 대통령이 된 뒤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은둔 시절이나 국회의원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해진 권력으로 가문의 영광 재현에 매진했다. 예상대로 ‘효도 교과서’라고 불린 국정교과서를 밀어붙여 박정희 미화에 나섰다. 새마을운동 전도사 구실도 멈추지 않았다.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 게이트가 한창 불거질 무렵인 2016년 10월18일 지구촌 새마을지도자대회 개막식 연설에서 그는 “다시 일어설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이 거의 없었던 한국을 다시 일으켜세운 것은 새마을운동 정신이었다”고 했다. 통치 스타일에서도 박 대통령은 아버지의 틀을 그대로 답습했다. 언론을 통제하고, 사법부를 사찰했다. 최순실과 함께 대기업의 팔을 비틀어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자금을 빼냈다. 시대의 흐름과 소통하길 거부하면서 각주구검식 유훈 정치를 반복했다.

이제 박 대통령의 시대를 거스른 ‘초심’은 물거품이 됐다. 박근혜 지우기와 박정희 지우기는 동시 진행형이다. 전국 곳곳의 박정희 동상은 수난 중이다. 생가는 불탔다. 사람들은 박근혜 시대의 종언과 함께 박정희 신화의 종말을 이야기한다. 아이러니다. 이러려고 대통령이 된 것은 아닐 테지만 이대로 물러나기엔 ‘피눈물’이 날 만큼 허망할 것이다. 끝까지 버텨 자신과 부친의 명예 회복을 위한 반전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겠지만 그러기엔 민심에서 너무 멀리 가버렸다. 이제 더 할 수 있는 일도 남아 있지 않다.

불통의 재현

박 대통령은 2011년 부친의 33주기 추모 행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 시대의 아픔과 상처는 내가 안고 가겠다. 이제 (사람들이) 아버지를 놓아드렸으면 한다.” 이제 사람들은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 시대의 아픔과 이 시대의 수치를 모두 안고 어서 떠나줬으면 한다”고.

성연철 기자 syc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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