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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일어나는구나 기적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무대에서 만난 카에타누 벨로주
등록 2016-10-19 20:03 수정 2020-05-03 04:28
브라질 음악의 거장 카에타누 벨로주(74)가 13회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의 마지막 무대를 장식했다. 벨로주는 1967년 데뷔 앨범을 발표했고, 지난 8월 브라질 리우올림픽 개막식 축하 무대에 등장하기도 했다. 이번이 첫 내한 공연이었다.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제공

브라질 음악의 거장 카에타누 벨로주(74)가 13회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의 마지막 무대를 장식했다. 벨로주는 1967년 데뷔 앨범을 발표했고, 지난 8월 브라질 리우올림픽 개막식 축하 무대에 등장하기도 했다. 이번이 첫 내한 공연이었다.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제공

1. 서울의 벨로주

‘아이디를 뭘로 하지?’ 박정용씨는 잠시 고민했다. 네이버 블로그를 만들려던 참이었다.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머릿속에 또렷하게 떠오른 글자는 ‘VELOSO’. 그가 가장 좋아하는 브라질의 국보급 음악가 카에타누 벨로주(Caetano Veloso)의 성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키보드를 눌렀다. 다행히 누구도 선점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때부터 그는 벨로주가 됐다. 2003년의 어느 날이었다.

2008년, 그는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잘 다니던 국내 최대 포털 회사를 그만두고 나와 음악카페를 차리려던 참이었다. ‘더 늦기 전에 좋아하는 일을 해보자’는 심산이었다. 서울 홍익대 앞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라이브 공연까지 할 수 있는 작은 무대를 만들었다.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이름을 ‘벨로주’라고 붙였다. 지금은 제법 넓은 공간으로 옮겨 공연만 하는 라이브 클럽으로 운영하고 있다. 역시나 이름은 ‘벨로주’다.

벨로주에 쏟아진 축하 메시지

‘벨로주의 공연을 죽기 전에 한 번은 보겠지.’ 그는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카에타누 벨로주는 남미를 좀처럼 벗어나지 않았다. 그나마 유럽은 가끔, 일본은 드물게 찾았다. 지난해 브라질의 거장 음악가 지우베르투 지우와 듀엣 앨범을 내고 투어를 했지만, 그걸 보자고 영국 런던까지 가기엔 가장으로서의 삶이 녹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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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벨로주로 살아온 지 어느덧 13년. 70대 중반에 접어든 카에타누 벨로주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할 무렵, 꿈결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카에타누 벨로주가 10월 초 경기도 가평에서 열리는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에 온다는 것이었다. 주변 지인들의 메시지가 쏟아졌다. 벨로주가 한국에 오는 데 대한 축하 인사를 벨로주에게 했다. 드디어 10월3일, 서울의 벨로주는 열 일 제쳐두고 자라섬으로 향했다. 진짜 벨로주를 만나러.

2. 자라섬의 기적

‘여긴 힘들겠어.’ 인재진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평의 축구장, 공원 등 몇 군데를 둘러보았지만 재즈 페스티벌을 열기엔 턱도 없는 공간이었다. 그를 이곳으로 안내한 이는 가평군 공무원 이문교씨. 인씨가 한겨레문화센터에서 문화기획 성공전략 특강을 할 때 수강생이었다. “국내에서 세계적인 재즈 페스티벌을 만들고 싶다”는 인씨의 말을 새겨들은 이씨는 두 달 뒤 전화를 걸어왔다. “가평에서도 재즈 페스티벌을 할 수 있을까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왔다가 역시나 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이씨가 말했다. “비가 오면 잠기는 섬이 있는데, 거기라도 가보시겠어요?” 유명 관광지가 된 인근의 남이섬과 달리 북한강에 방치되다시피 한 자라섬을 보고 인씨는 얼떨결에 외쳤다. “우와, 여기 정말 멋지네요.” 2004년 9월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의 첫 막이 그렇게 올랐다. 인씨는 페스티벌 총감독을 맡았다.

축제의 역사는 비로 시작됐다. 개막 이튿날 어마어마한 폭우가 쏟아졌다. 공연을 도저히 강행할 수 없어 전면 취소를 발표하니 관객들은 거세게 항의하며 환불을 요구했다. 한 직원은 기어이 대성통곡하고야 말았다. 첫 회 관객은 2만여 명, 절반의 성공이었다. 4회까지도 야속한 비가 지겹도록 내렸지만 축제는 이어졌고, 관객도 꾸준히 늘었다. 이제는 해마다 20만 명 이상이 찾는다. 세계 재즈 음악가들이 다 알고 앞다퉈 오고 싶어 하는 세계적인 재즈 페스티벌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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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와도 괜찮아

13회를 맞는 올해, 또 하나의 기적이 찾아왔다. 그야말로 전설적인 음악가 카에타누 벨로주 쪽 에이전시에서 자라섬 무대에 서면 어떻겠느냐고 먼저 제안해온 것이다. 일본 도쿄, 오사카에서 열리는 재즈 페스티벌에 오는데, 이참에 한국 관객도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인 감독은 꿈꾸는 것만 같았다. 이 정도의 거장급 음악가를 자라섬 무대를 통해 국내 관객에게 처음 소개하는 것은 문화기획자로서 늘 꿈꿔온 일이었다. 인 감독은 생각했다. ‘상상도 못했던 순간이 이렇게 오는구나.’

3. 자라섬의 벨로주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제공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제공

축제 이튿날인 10월2일에는 종일 비가 내렸다. 초창기를 제외하곤 간만의 큰비였다. 하지만 공연은 별 탈 없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마침내 10월3일, 거짓말처럼 하늘이 개었다. 사흘간 축제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무대 주인공은 카에타누 벨로주였다. 1960년대 후반 브라질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문화운동 ‘트로피칼리아’를 이끌다 여러 차례 투옥, 연금을 겪은 그는 영국 망명 시절을 거쳐 이제는 브라질 대중음악의 대부 자리에 올랐다. 지난 8월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개막식에서 축하공연도 했다.

벨로주가 무대에 오르기 직전, 인 감독이 무대에 올랐다. 마이크를 잡고 그는 말했다. “바로 오늘 기획자로서 꿈을 이뤘습니다. 저는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 겁니다. 여러분도 영원히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카에타누 벨로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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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재킷 차림의 벨로주는 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목소리는 더욱 소년 같았다. 1942년생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직접 연주하는 기타와 목소리의 진동만으로 그 넓은 자라섬의 공기를 가득 채웠다. 수만 관객들은 그의 숨소리 하나마저 놓치지 않으려고 숨을 죽였다.

그는 (Cucurrucucu Paloma)를 부르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비둘기 울음소리.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세상을 떠난 남자가 비둘기로 다시 태어나 매일 그녀의 창가에서 슬피 운다는 멕시코 어느 마을의 전설을 듣고 작곡가 토마스 멘데스 소사가 만든 그 노래. 자라섬의 사람들 모두 비둘기가 되어 함께 우는 것만 같았다.

‘Gracias a la vida’(생에 감사를)

공연이 끝나고, 서울의 벨로주는 생각했다. 꿈같았다고, 그의 목소리가 워낙 꿈같기도 했지만, 그냥 그 시간이 모조리 다 꿈이었다고. 서울의 벨로주에게는 새로운 꿈이 생겼다. 그의 공연을 한 번쯤 더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생겼다. 그런 마음을 페이스북에 남겼다. 포스팅의 마지막은 이렇다. Gracias a la vida(생에 감사를). 그날 감사한 마음을 품은 이는 그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서정민 씨네플레이 대표·전 대중음악 담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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