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아트(공동체미술)를 하는 박찬국 선생님과 제주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 면세점 쇼핑에 열을 올리는 관광객들 사이에서 ‘DUTY FREE’를 ‘더티 프리’ 로 읽는 그의 감각에 탄복한 기억이 난다. 국내 최대 쇼핑몰을 돌아보며 왜 하필 이 일이 떠올랐을까. 유통자본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더티’란 말로도 부족하지만, 그보다 돌아보는 내내 면세점 쇼핑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일 게다. 맞다, 스타필드 하남은 대형 공항이 연상될 만큼 거대하고 쾌적하다.
<font size="4"><font color="#C21A1A"> 자본주의의 공간 전략 ‘부드러운 미소’ </font></font>25년 전 강내희 교수는 ‘롯데월드론’으로 국가권력과 독점자본이 한 몸이라는 걸 보여주었다. 폭력에 의한 억압이 아니라 ‘부드러운 미소’를 통한 사회 모순의 은폐가 롯데월드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공간 전략에 숨어 있다는 분석이었다.
25년이 지난 지금은? 자본론의 구절들을 암송하기에 세상은 너무 복잡해진 게 아닐까. 이제 이윤은 잉여생산에서 창출되는 게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생산보다 차라리 어떻게 시민들의 잉여욕망을 흘러넘치게 하느냐에 따라 달성된다.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물건이 만들어지고, 서비스가 제공되는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 대중의 욕망을 조직하기 위한 전략은 갈수록 노골적으로 바뀌는 것 같다. ‘너희들이 뭘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으니 여기서 놀아’라고 이야기한다.
문제는 내게 그 전략이 유효하지 않았다는 거다. 자동차와 명품에 관심 없는 40대 아저씨에게 이 공간은 그저 매끈한 쇼윈도가 잔뜩 늘어선 실내 산책로에 불과했다. 다들 열광한다는 온갖 브랜드와 편집숍의 끈질긴 구애에도 아저씨의 맘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종종 눈에 띄는 혁신적인 디스플레이 역시 눈요깃거리를 넘지 못했다. 청년창업 지원? 축구장 70개 규모의 쇼핑월드를 만든 정용진이 힘주어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옹색하다. 절대 면적으로도, 입주한 팀 숫자로도.
<font size="4"><font color="#C21A1A">지자체와 유통자본의 결합 </font></font>강내희는 국가와 자본의 결합을 이야기했지만, 나는 지자체와 유통자본의 담합을 의심한다. 한 달 방문객 300만 명 신화는 전국의 유사 쇼핑타운 추진에 가속도를 붙여줄 거다. 부지 매입부터 건설 인허가, 교통 인프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지자체의 협조가 절대적이다. 지자체는 안정적인 세수 확보를 위해 소상공인들의 강력한 항의와 절규를 무릅쓰고 지역의 노른자 땅을 내주고 각종 지원을 마다하지 않는다. 아마 신세계·롯데·현대 등 유통자본 기획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전국지도를 펼쳐두고 다음 교섭 대상을 고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신이 날 거다. 왜 안 그렇겠는가. 게임하듯이 세계지도를 바꾸고 사람들을 움직이면서 돈까지 챙길 수 있는데.
3시간여의 유람을 마치고 난 아저씨의 손에는 책 2권과 단팥빵 3개가 들려 있었다. 이대로는 억울하단 생각에 부랴부랴 챙긴 쇼핑 목록이다. 아, 만족스런 게 없진 않았다. 반려동물 동반이 가능하다는 건 훌륭했다. 유럽에서 대중교통에 반려동물이 함께 승차하는 걸 부러워하던 터였다. 마지막으로 평양냉면 한 그릇과 소주의 마리아주는 어디서도 배신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다.
안태호 전 부천문화재단 정책팀장·문화연구자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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