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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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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발걸음으로 나무 산책

도시의 고즈넉한 쉼터 궁궐에 자란 고목과 마주 앉은 가을… 꿋꿋하게 살아남아 파란만장한 역사 나이테에 새긴 나무들
등록 2016-09-07 21:40 수정 2020-05-03 04:28
박상진 교수 제공

박상진 교수 제공

올해 유난히도 긴 무더위는 하루아침에 가버리고 성큼 가을에 들어섰다. 훌쩍 높아진 가을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처럼 어딘가 떠나고 싶어지는 계절이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은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이 모여 사는 곳이다. 어디서나 부대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지하철을 타도 거리를 걸어도 자동차를 타도 항상 만원사례다. 부대낌이 지겨울 때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거리에 항상 개방된 궁궐이라는 행복한 공간이 있다.

조선 역사의 목격자, 창덕궁의 주요 고목

궁궐에는 무엇이 있는가? 임금님의 공간이니 나라를 다스릴 위엄 있는 커다란 건물이 있을 터이다. 아울러서 왕비와 왕자와 함께 살아가는 생활공간이니 살림집이 있다. 그래서 혹시라도 시간을 내어 궁궐을 찾아가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온통 건물과 건물이다.

잠깐 조선 궁궐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보자. 1392년 이성계는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다’는, 지금도 써먹는 명분으로 고려를 뒤엎고 조선이란 나라를 세운다. 새로운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고 보니 궁궐을 마련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첫 궁궐이 경복궁이고 이어서 창덕궁과 창경궁이 지어진다.

그러나 200년 남짓 지난 1592년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은 깡그리 잿더미가 되어버린다. 전쟁 뒤 경복궁은 그냥 놔두고, 창덕궁과 창경궁을 복원하여 조선의 정식 궁궐로 쓴다. 이후 고종 때인 1867년 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을 때까지 창덕궁과 창경궁이 조선 중·후기 정치의 중심지가 된다.

다시 300년의 세월이 흘러 1910년, 나라를 빼앗기면서 궁궐은 또 한 번 수난을 당한다. 새로 복원된 경복궁 전각은 대부분 헐리고 창경궁은 거의 완벽하게 파괴되어 동물원이 들어서는 수모를 겪는다. 이런 역사의 혼돈 속에 나무로 지어진 건물은 불타 없어지고 다시 짓는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었다. 우리의 궁궐은 창건 당시 건물이 그대로 남은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 훗날 복원된 새 건물들이다.

하지만 궁궐에는 궁궐 건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은 없고 겉모습만 남은 건물 말고도 살아 숨쉬는 자연, 나무들이 자란다. 불타고 찢기고 할퀴는 수난 속에 살아남아 궁궐을 지키는 많은 나무들이 있다. 마주하고 앉아 지나온 그들의 삶을 찬찬히 알아보고 싶어진다. 가만히 눈을 감아보면 나무를 매개로 펼쳐지는 역사의 장면 장면이 하나씩 뇌리를 스쳐간다.

파란만장한 조선왕조의 영욕을 그대로 나이테에 새겨가면서 오늘도 살아 있는 고목나무들이 있다. 조선 궁궐 중 경복궁은 고쳐 짓느라, 덕수궁은 1904년의 대화재로 고목나무가 거의 없어졌다. 반면 조선왕조 500년 내내 궁궐로 쓰인 창덕궁과 창경궁에는 조선의 역사를 말해주는 고목나무들이 여럿 남아 있다. 중심 궁궐인 창덕궁의 주요 고목나무를 소개한다.

750살 향나무의 생존법
세월을 거치며 우리가 알고 있는 건물들이 불타고 찢기고 할퀴어도, 나무는 그 자리를 지킨다.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가 지난 8월30일 서울 종로구 창덕궁에 ‘나무 나들이’를 나왔다.

세월을 거치며 우리가 알고 있는 건물들이 불타고 찢기고 할퀴어도, 나무는 그 자리를 지킨다.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가 지난 8월30일 서울 종로구 창덕궁에 ‘나무 나들이’를 나왔다.

창덕궁 돈화문 안을 들어가면 왼쪽 긴 행랑 앞의 아름드리나무들이 궁궐 역사의 현장지킴이다. 아까시나무와 비슷한 잎 모양을 가진 회화나무다. 동쪽 금천 건너에 걸쳐 나이 300~400년 된 여덟 그루가 자란다.

이곳에 특별히 회화나무를 심은 데는 이유가 있다. 옛날 중국 주나라 때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고 우리나라의 삼정승에 해당하는 삼공이 마주 앉아 정사를 논했다는 예에 따른 것이다. 조선 후기 조선의 정승들이 여기서 정사를 논했다는 실제 기록은 없지만, 궁궐의 바로 안쪽인 이 나무 밑에서 임금을 만나기 전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창덕궁에는 이곳 말고도 낙선재 입구 언덕 및 신선원전 들어가는 길에도 큰 회화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 나무는 학자를 상징한다. 다른 이름은 ‘학자수’이며 영어로도 ‘scholar tree’다. 낙향한 선비들이 주로 집 앞에 심어서 지금도 양반마을 입구에는 회화나무 고목을 흔히 만날 수 있다.

다시 돈화문에서 북쪽으로 담장 길을 따라 대보단 방향으로 잠시 올라가면, 봉모당이란 전각의 뜰 앞에 옆으로 넓게 퍼진 향나무 고목 한 그루를 만날 수 있다. 나이는 무려 750살, 조선왕조의 역사보다 더 길다. 궁궐을 통틀어 가장 오래 살고 있는 창덕궁의 터줏대감이다. 나무가 태어난 고려 말부터 편치 않은 세상을 살아온 탓인지 나무의 모양새는 세월의 풍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우선 그는 키 자람부터 조심스럽다. 키는 6m 남짓, 나이로 나누어 셈해보면 한 해에 높이 1cm도 채 자라지 않았다. 험난한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한껏 몸을 낮춘 것이다. 궁궐에 살아간다고 생명이 보장된 것은 아니다. 임금님은 물론 신하들의 눈에라도 들어 ‘종묘에 제사를 올릴 때 향으로 쓰시옵소서’ 하면 순간에 잘려나간다. 그래서 몸체인 줄기를 용트림하듯이 뒤틀고 큰 가지도 옆으로 길게 뻗어 가지는 거의 땅에 닿을 듯이 해놓았다. 향을 만드는 나무로 보아주지 말고 바깥 모양으로 예쁘게 보아달라는 주문일 것이다. 아울러서 사람들이 탐내는 속살은 아예 썩혀 없애버리고 가운데를 텅 비게 했다. 덕분에 궁궐 안에서 역사란 이름의 소용돌이가 아무리 거세어도 살아남을 수 있게 됐다.

빽빽했던 밤나무 중 살아남은 한 그루
가을이 가기 전에 느린 발걸음으로 궁궐을 거닐어보자. 역사를 품은 나무들이 기다리고 있다. 위쪽부터 창덕궁 뽕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

가을이 가기 전에 느린 발걸음으로 궁궐을 거닐어보자. 역사를 품은 나무들이 기다리고 있다. 위쪽부터 창덕궁 뽕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

되돌아나와 금천교를 거쳐 인정전을 지나 임금님의 정원인 후원으로 들어가본다. 처음에 만나는 연못인 부용지 옆의 영화당 앞 광장에는 느티나무 고목 두 그루가 다소곳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조선 후기 왕실에서 벌이는 여러 행사를 하던 춘당대 광장이다. 시골 동네 어귀에서 만나는 정자나무의 대부분이 느티나무일 만큼 우리나라는 느티나무 고목이 많다. 현재 창덕궁과 창경궁에 있는 80여 그루의 고목 중에도 느티나무가 35그루나 된다. 영조 때 청계천을 준설하고 그 기념식을 그린 그림에도 이 나무가 등장할 만큼 수많은 역사의 현장을 보아온 유서 깊은 나무다.

다시 안쪽을 더 들어가면 불로문 앞을 지나 반도지 입구, 창경궁과의 경계 담 안에 아름드리 뽕나무 고목 한 그루가 버티고 있다. 둘레가 한 아름 반에 나이는 약 400살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농사짓기 못지않게 누에를 치고 비단 짜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귀족들의 고급 옷감에 쓰이고 중국에 비단을 수출할 수도 있어서다. 누에의 먹이로서 뽕잎을 많이 따기 위한 뽕나무 심기는 온 나라가 나서서 장려할 정도였다. 중요 산업인 농사와 누에치기는 왕실에서도 시범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임금님은 농사 시범, 왕비는 친히 누에를 치고 비단 짜는 시범을 보였는데 그 흔적이 지금의 이 뽕나무다. 세종 때 기록으로는 이곳 창덕궁에만 1천여 그루의 뽕나무가 있었다 하니 한 나무 건너 뽕나무가 자랄 만큼 많았던 것 같다. 영조 때는 누에치기 과정을 기록한 를 펴내기도 했다.

이어서 안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면 반도지 물 위로 가지를 늘어트린 큰 밤나무를 만날 수 있다. 밤은 흉년에 도토리와 함께 대용식으로 귀중하게 쓰였으며, 유교 이념에 따른 조상 숭배 사상과도 관련 있어서 제사상에 꼭 올린다. 가을날 벌어진 밤송이를 보면 안에 흔히 밤알이 3개씩 들어 있다. 씨알 굵기는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후손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으로 대표되는 삼정승을 한 집안에서 나란히 배출시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또 밤이 싹트는 과정도 조상 숭배의 의미가 배어 있다. 밤알이 땅속에서 새싹을 내밀 때는 밤 껍질은 땅속에 남겨두고 싹만 올라온다. 이런 밤의 특성으로 자기를 낳아준 부모의 은덕을 잊지 않는 나무라고 생각한 것이다. 밤나무 목재도 단단하고 잘 썩지 않으므로 위패나 제사상 등에 널리 쓰였다. 이 일대의 숲에 특히 밤나무가 많아 밤은 따서 모아두었다가, 정월대보름이면 왕실의 친·인척들에게 부럼으로 밤을 나눠주기도 했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 때는 가을에 밤 줍기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수많은 밤나무 중 하나가 살아남아 지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면 팔각지붕으로 특별히 멋을 부린 아름다운 존덕정이 나온다. 존덕정 뒤쪽 반도지 옆에는 궁궐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자란다. 줄기 둘레가 약 세 아름에 이르고, 높이 23m의 거대한 고목이다. 나이는 약 250살로 추정한다. 중국이 원산인 은행나무는 대체로 불교가 전파될 때 함께 들어온 것으로 짐작되며 숲 속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친숙한 나무다. 수백 년에서 1천 년을 넘겨 오래 살며 우람하고 당당한 모양새에 아름다운 단풍까지 갖고 있다. 은행나무는 궁궐이나 선비들 곁에서 그늘을 만들어주고 쉼터가 되는 행정의 정자나무이거나, 공자가 제자를 가르치던 곳의 행단을 상징하는 나무로서 우리와 함께 살아왔다.

세 아름 둘레의 당당한 은행나무

존덕정에는 정조가 직접 쓴 ‘세상의 모든 냇물은 달을 품고 있지만 하늘의 달은 하나밖에 없다’는 뜻의 편액이 걸려 있다. 왕권을 강화하고 신하의 도리를 강조하는 뜻으로 존덕정을 정비하면서, 학문을 숭상하는 행단의 나무란 상징성을 갖는 은행나무를 심지 않았나 짐작해본다.

궁궐은 이처럼 널리 알려진 건축물 외에도 임금님과 이런저런 인연을 맺은 역사 속 고목나무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느림의 발걸음으로 궁궐을 찾아가보기를 권한다.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나무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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