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이것은 ‘애도’의 기록이자 ‘싸움’의 기록이다. 2016년 5월17일. 23살 여성이 서울 강남역 인근 남녀공용화장실에서 칼에 찔려 죽었다. 그 남성은 6명의 남성을 보낸 뒤 그녀를 찔렀다. 남성은 조현병을 앓고 있었다.
포스트잇이 붙기 시작했다
<강남역 10번 출구, 1004개의 포스트잇> <경향신문> 사회부 사건팀 기획·채록, 정희진 해제, 나무연필 펴냄, 9800원
많은 여성이 이 사건을 ‘여성혐오에 의한 살인사건’ ‘여성살해’(femicide)로 명명했다. 명목상 ‘이성’과 ‘객관’을 빌려와 사유하고 관습적으로 그렇게 ‘보이도록’ 쓰고 말해온 다수의 언론과 다수의 남성은 이 사건을 ‘묻지마 살인사건’ ‘정신질환자의 우발적 살인’으로 명명했다. 이 깊게 팬 골을 사이에 두고 사고 현장 인근 강남역 10번 출구에 포스트잇이 붙기 시작했다.
“이곳의 포스트잇은 테러도 범죄도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동안 겪어온 비참함과 힘듦이 한장 한장 모인 것입니다.” “2016년인데 나는 아직 무서워요. 오늘 여기에 온다고 했더니 친구들이 걱정했어요. 해코지당할까봐 무섭대요. 나는 오늘 여기에 오는 것도 무서웠어요.” 1004장의 포스트잇은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겪어온 두려움·공포·힘듦을 선연하게 드러냈다.
여성들은 누가 뭐라 하든 피해자가 ‘나일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여자라서 죽었음’을 인식하고 말했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죽어야 했던 그녀는 또 다른 나입니다. 더 이상 여자이기 때문에 죽임당하고 죽음의 의미조차 곡해되는 일이 없는 세상이 되길 바랍니다.” “피해자는 여자라서 죽었습니다. 나일 수도 있었습니다.” 1004개의 포스트잇에서 ‘살아남았다’는 132번 쓰였다. ‘여성혐오’는 116번 쓰였다.
여성들은 이제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들 키우는 엄마입니다. 제 아들은 여성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사람으로 키우지 않을 것입니다.” “다음 생애에도 여자로 태어나자. 그땐 세상이 바뀌어 있을 수 있도록 행동할게.” “살아남겠습니다. 당신 잃고 내가 살아 미안합니다. 살아남아 이 세상을 바꾸는 데 힘을 보태겠습니다.”
피해자이지만, ‘피해자성’ ‘약자성’이 강화되는 것은 거부한다. “여성을 보호하지 마세요. 보호받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만드는 데 동참하세요.” “남자에게 보호받고 싶지 않습니다. 남자 없이도 안전하고 싶을 뿐이에요.”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이 스스로를 ‘피해자’와 ‘약자’로만 규정하고 어필하는 역효과가 생길 수도 있다는 일부 여성학자들의 우려가 반전되는 순간이다. 1004장의 포스트잇은 현실을 직시하되, 그에 맞서 싸우겠다는 여성들의 결심을 보여준다.
문화인류학자이자 급진적 페미니스트인 게일 루빈은 1968년 막 싹트기 시작한 여성해방운동에 합류하게 된 자신의 시공간을 복기하면서 “나 혼자 빠져든 줄로만 알았던 것들이 더 큰 사회적 변혁과 엄청난 변동의 일부였다”고 썼다. 1004개의 포스트잇은 한국 사회의 일부 운동가가 아니라 대다수 여성들이 젠더적으로 기울어진 한국 사회를 직시하고 변화를 위해 돌을 깨고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징후다.
5월23일, 비 예보가 있으면서 포스트잇이 서울시여성가족재단과 서울시청 지하 1층 시민청으로 옮겨지기 직전, 사회부 사건팀 기자들은 이 포스트잇을 기록해 책으로 남겼다. 고통과 연대의 일주일 동안 여성들이 낸 목소리를 기록한 그들의 작업에 감사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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