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은 인생살이와 같다. 오르막은 정상을 향해 오르는 것 자체가 힘들다기보다는, 힘겹게 올라 정상인 줄 알았는데 그 뒤로 다음 봉우리가 숨어 있음을 발견하기를 몇 차례 해야 하는 것이 힘들다.
지리산의 시인 이성부는 라는 제목의 시집을 냈다. 다산 정약용이 7살 때 지은 한시의 ‘소산폐대산 원근지부동’(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니, 멀고 가까운 것이 같지 않기 때문이라네)이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시인은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의 경계에 솟은 백화산에 오르면서 정상이겠거니 올라보면 더 높은 정상이 버티고 있어 몇 번이나 속으면서 다산의 위 구절을 생각하고 시를 썼다.
“작은 산이 큰 산 가리는 것은/ 살아갈수록 내가 작아져서/ 내 눈도 작은 것으로만 꽉 차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더 생은 이렇게 가야 하고/ 몇 번이나 더 작아져버린 나는 험한 날등 넘어야 하나”
2013년 11월 축령지맥을 탈 때다. 경기도 포천 내촌에서 주금산을 넘어 불기고개로 내려갔다가 서리산으로 올라 축령산∼오독산∼운두산을 지나 청평역으로 이어지는 9~10시간 정도의 코스다. 불기고개에서 서리산까지 3.9km 구간에서 소산폐대산을 절감했다.
주금산 정상에서 보았을 때 그리 큰 산으로 보이지 않았고 고개로 내려가면서 보았을 때 일직선 오르막으로 보여 꾸준히 오르다보면 정상까지 이어질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급경사로 치고 올라 봉우리에 닿으면 그 뒤로 다른 봉우리가 있길 몇 차례. 급하게 내려갔다가 다시 급하게 올라야 했다. 접혀진 주름을 펴면서 진행하는 것 같았다. 접힌 주름 서너 개를 펼쳐 오르내린 뒤에야 서리산 앞쪽 화채봉에 닿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산이 정상에 닿기까지는 몇 차례 속을 생각을 해야 한다. 속았다고 화낼 일이 전혀 아니다. 산이 나를 속인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생각에 속은 것이기 때문이다.
통상 산은 오를 때 힘들고 내려갈 때 수월하다고 한다. 중국 춘추시대 8국의 역사서인 (國語• 과 함께 춘추전국시대 3대 역사서 중 하나)에 ‘종선여등 종악여붕’(從善如登 從惡如崩·선을 좇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고, 악을 좇는 것은 산을 내려가는 것과 같다)이란 구절이 있다. 남명 조식 선생은 58살 때 지리산 지장암을 거쳐 쌍계사로 가면서 ‘초등상면 일보갱난일보 급추하면 도자거족 이신자류하’(初登上面 一步更難一步 及趨下面 徒自擧足 而身自流下·당초 위쪽으로 오를 적에는 한 발자국 내디디면 다시 한 발자국을 내딛기가 어렵더니, 아래쪽으로 달려 내려올 때는 단지 발만 들어도 몸이 저절로 흘러내려가는 형국이었다)라고 했다.
이 구절을 생각하게 하는 급경사 내리막으로 유명한 코스로는 지리산 천왕봉에서 중산리, 설악산 대청봉에서 오색, 설악산 마등령에서 비선대, 노인봉에서 청학동 낙영폭포, 화야산 뾰루봉에서 청평댐, 덕유산 향적봉에서 백련사, 청옥산에서 무릉계곡 등등이 있다. 이 구간에서 내려갈 때는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발을 움직여야 한다.
‘산 내려가는 것’을 쉬운 일의 대명사로 보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무릎이 좋지 않은 사람은 내려가는 것이 올라가는 것보다 더 힘들다. 무릎이 좋지 않은 사람이 산을 내려오기 힘들듯이 사람에 따라서는 종악(從惡)도 힘들 수 있을 것이다. 공자는 나이 칠십에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바라는 대로 해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의 경지에 도달했다. 부단히 ‘끊고 갈고 쪼고 문지를’(切磋琢磨) 일이다.
남명 선생은 지리산을 유람하면서 산을 보고 물을 보고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본다(看山 看水 看人 看世)고 했다((遊頭流錄)). 산수만이 아니라 사람과 세상까지 보기 위해서는 자료도 미리 조사하고 일정도 여유 있어야 한다. 우리 같은 사람은 ‘간목 간초 간화 간천’(看木 看草 看花 看天)도 제대로 못하고, 오로지 간토(看土) 또는 간족하(看足下), 즉 발밑 땅 보기에 급급하다. 간족하를 잘못해서 돌부리에 걸리거나 미끄러운 곳을 밟아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 난다. 발밑 땅부터 시작해서 나무와 풀과 꽃과 하늘을 거쳐 산과 물, 나아가 사람과 세상을 보러 산에 오르자. 인생살이의 지혜도 더불어.
김선수 변호사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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