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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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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듯 산으로

정진하다보면 세상사 보는 안목이 넓어지고 오르다보면 망망무제 사방을 둘러볼 수 있네
등록 2016-05-13 17:12 수정 2020-05-03 04:28
2015년 10월17일 지리산 중봉에서 천왕봉과 주능선, 오른쪽 저 뒤로 반야봉와 노고단이 보인다. 김선수

2015년 10월17일 지리산 중봉에서 천왕봉과 주능선, 오른쪽 저 뒤로 반야봉와 노고단이 보인다. 김선수

산행은 공부나 독서 또는 시 읽기와도 같다. 오를 때의 고통을 참고 견디면 정상에서 시원한 조망을 즐길 수 있고, 정상을 찍은 뒤엔 다시 세상사로 내려와야 한다. 전과 동일한 것 같은 세상사를 살아가지만, 정상에서 멀리 바라본 사람은 그 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다. 세상 보는 눈이 달라져 있다. 공부나 독서도 그 과정은 고난이다.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도 있으나, 보통은 1차적 욕구를 참아내고 정진해야 한다. 공부와 독서에 정진하다보면 만물과 세상사를 보는 안목이 넓어지고, 나아가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 뒤에는 세상사로 돌아와 깨달음을 세상사를 위해 써야 한다.

퇴계 이황은 경북 봉화군 청량산에 오르면서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글 읽기가 산에서 노는 것과 같다)이란 제목의 시를 썼다. 등산이라 하지 않고 ‘유산’이라 했다. 산을 대하는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시의 한 토막을 읽어보면, ‘힘을 다한 뒤에 원래 자리로 스스로 내려옴이 같고(工力盡時元自下), 찬찬히 얕고 깊은 곳을 모두 살펴봐야 함이 같다(淺深得處摠由渠)’고 했다. 퇴계는 또 (遊小白山錄)에선 “처음에 울적하게 막혔던 것이 나중에는 시원함을 얻는다”고도 했다.

장회익 선생 역시 에서 학문하는 것을 등산과 같다고 했다. 산에 오르는 묘미는 산과 나 사이의 조화에 맞춰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데서 느껴지는 작은 즐거움을 이어가는 데 있다고 한다. 그때 특별한 성취가 없더라도 그 삶 자체로 값지며, 지속적인 즐거움을 찾아가다보면 장기적 성취를 이룬다는 것이다.

‘철학적 시 읽기’를 주장한 강신주 작가 겸 철학자는 등산의 수고를 철학과 시를 읽고 이해하는 수고와 같다고 썼다. 봉우리에 오르면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조망할 수 있는 시야를 얻고, 등산 뒤 산에서 내려오듯이 시집과 철학책을 읽고 삶을 건강하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신주 작가는 시원한 조망처를 중시하는데 북한산의 3대 조망처로 백운대, 문수봉, 칼바위능선을 꼽았다.

최고봉에 섰을 때 모든 것을 내려다보며 시원한 조망을 즐길 수 있다. 지리산 천왕봉, 설악산 대청봉, 소백산과 오대산의 비로봉이 그렇다. 산행 묘미 중 하나는 확 트인 정상에서 망망무제(茫茫無際) 사방을 둘러보며 장관을 감상하는 것이다. 고생하며 올라온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나 할까. 인내를 견뎌낸 뒤에만 맛볼 수 있다. 성과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정상에서의 조망을 잊지 못해 오늘도 정상까지 오른다. 정상을 목전에 두고 포기하면 이 장관을 놓치게 된다. 세상 살면서 조금만 더 참고 견뎠으면 일을 성취했을 텐데, 그 순간을 참지 못해 포기하고 주저앉은 경우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최고봉에 서면 최고봉 자체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에선 ‘항룡유회’(亢龍有悔), 즉 ‘하늘에 오른 용은 뉘우침이 있다’고 했다. 최고봉까지 한꺼번에 조망하려면 최고봉에서 한발 벗어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최고봉보다 그 옆의 봉우리를 최고의 조망처로 꼽기도 한다. 지리산 중봉(주능선에서 벗어나 삼신봉이나 만복대에 서면 주능선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설악산 화채봉, 태백산 문수봉, 소백산 국망봉, 오대산 상왕봉 등이 그에 해당한다. 최고만을 추구할 때 놓치는 것이 있다.

김선수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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