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에 내리쬐는 해는 뜨거워도 여기저기서 일어난 바람은 그늘진 자리를 찾아 돌아다니는 계절이 되었다. 여름 내내 튀기고 볶는 열기를 견딜 수 없어 에어컨에 의지하며 보내다 얼마 전 태풍이 지나간 날부터 앞뒷문을 열어두고 밖에서 나도는 바람을 들여 열기를 식힌다. 어느 날인가 그 바람을 타고 귀뚜라미 한 마리가 가게 안 구석진 자리로 들어 울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개수대 아래 어딘가에서 찌르륵거리더니 며칠 전부턴 자리를 옮겨 냉장고 뒤에서 울어댄다. 찌르륵 시르륵. “인마!” 하고 소리치면 뚝 그쳤다 이내 시르륵 시르륵, 제 나람 소리를 낮춰 말한다. “나 여그 있어라우.”
“야 이놈아, 냉장고 뒷새배기 구석진 자리에 숨어 내 임 어딨냐고 밤새 찾아봐라. 뭔 소용 있겄냐, 쯧쯧.”
말은 이리해도 거기 구석진 자리 모습을 알 수 없는 무엇 하나 살아 있어선지 아침에 문 열고 들어서면 귀 기울여본다. 찌르르륵 시르르륵.
“밤새 안녕하셨는가.”
“젊다고 다 이겨지는 것은 아니네”
여행 중에 동해에서 만난 정해연 할아버지는 아침에 눈떴을 때 몸 안으로 몸살이 들었다 싶으면 이불을 걷고 벌떡 일어나 허공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고 말했다.
“아이고,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누추한 늙은 몸으로 찾아오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어요. 어서 오세요”라며 몸살을 반갑게 맞이한 뒤에 그날 아침부터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잘 먹이고, 편안히 쉬게 하고, 잠도 잘 재우고, 모른 척하지 말고 두런두런 말동무도 해드려야 몸살이 기분 좋게 떠난다는 것이었다.
정해연 할아버지를 바닷가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는데 그 몸살을 떨쳐보겠다며 일부러 해변을 뛰어다니고 차가운 바닷물로 뛰어드는 내 꼴이 한심하고 안타까워 보였던 모양이다.
“젊다고 다 이겨지는 것은 아니네.”
정해연 할아버지 부부는 자신들의 몸에 든 몸살이라도 대하는 양 밥과 반찬을 싸와 나에게 먹이고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누며 이놈의 몸을 쉬게 했었다. 그렇게 잘 먹고 잘 쉰 몸살은 다음날 아침 홀연히 떠나버렸다.
계절이 바뀔 때면 언제나 마음이 혼란스러운데 특히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지는 문턱에선 언제나 한 번씩 헛발을 디뎌 넘어져서 작거나 큰 흉터 하나씩을 남겨왔다. 찬바람 일고 그 바람 타고 귀뚜라미 들어 반가운 마음 들었던 것도 잠시, 며칠 전부터 귀뚜라미 소리 들리지 않더니 그 자리에 우울이 들어선 것이다.
이 또한 마음에 든 몸살일 터인데 잘 먹이고 잘 쉬게 한다고 떠나는 놈이 아니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끙끙거리고만 앉아 있다. 불현듯 잠이 몰려와 초저녁부터 잠들어 다음날 늦은 아침에야 눈이 떠지는가 하면, 밤새 한숨도 못 자고 출근하기도 한다. 잠을 너무 많이 잔 날은 무기력해지고 잠을 못 잔 날은 몸이 견디지 못한다. 이렇게 찾아온 우울을 잘 먹이고 쉬게 해서 돌려보내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이곳이 아닌 어딘가의 시원한 그늘 아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하루나 이틀을 보내고 나면 우울은 몸살처럼 홀연히 떠나버린다는 것을 잘 안다.
모른 척한다고, 심하게 몸을 움직여 일을 하거나 운동을 한다고, 약을 먹는다고, 사람들과 만나 수다를 떤다고, 영화를 본다고, 즐거운 음악을 듣는다고, 폭식을 하거나 과하게 술을 마신다고, 24시간 동안 잠을 잔다고 해서 마음에 든 몸살이 떠나진 않는다.
일은 내일도 하지만 안 쉬면 내일이 없으리지난여름, 숨 쉬기도 힘들게 더웠던 어느 날 일을 하다 말고 직원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 더위 견디며 돈을 벌어 무에 쓰나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더는 고민하지 않고 일을 마치자고 말했다. 어리둥절해하는 직원들 등 떠밀어 집으로 돌려보낸 뒤 수박 한 덩이 사들고 어미가 사는 시골집에 찾아갔더니 어미는 깜짝 반가워하며 말했다.
“일은 허는 대로 허는 거여.”
이 말은 한 세상 다 살아본 사람의 입에서나 나올 법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은 내일도 할 수 있지만 쉬는 것은 그리 할 수 없다는 말이거니와 쉬지 않고는 내일 혹은 너의 남은 삶을 살아낼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었다. 또한 일 그까짓것은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라는 뜻이기도 할 것이었다. 지독하게 무더웠던 그날 밤 낡은 흙집은 시원했고 붉은 수박은 달콤했다.
아마 나는 며칠 내에 직원들에게 통보하듯 말할 것이다. “내일은 무단휴업일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쉬는 날이니 걱정 말고 편히 쉬도록 하세요”라고. 10년 넘게 자영업을 해온 한 선배는 자영업에 대해 이렇게 역설했었다. “시바, 쉬고 싶을 때 쉬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하는 게 자영업이지.” 그렇다. 쉬어야만 이 우울을 떨칠 수 있으므로 자영업의 이점을 살려 무단휴업에 돌입한다.
무단휴업에 앞서 준비할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들고 나는 식재료의 양을 조절하고 재고가 남지 않도록 유의해 음식을 준비하면 된다. 블로그와 배달 앱, 전화기 음성메시지에 임시휴무일임을 알리는 메시지를 남기면 일단의 준비는 끝난다. 장사야 이런 준비 없이도 마음 가는 대로 접으면 그만이지만 갈 곳을 미리 정해두지 않으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말하자면 하루가 꼬박 걸리는 살풀이를 하러 떠나는 것인데 머물 장소가 미리 정해져 있지 않을 경우 장소를 찾다가 판이 깨질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준비해야 할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장사가 아니라 장소다.
그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머물렀던 장소 중에 인적이 드물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만한 장소를 알고 있다. 지난해 이맘때 찾아온 우울을 달랬던 장소는 전남 득량만이었다. 득량만은 그 무엇도 하고 싶지 않게 만드는 힘을 가진 곳이다.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넓은 갯벌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모래갯벌이었다면 발을 들여 뭐라도 잡아먹겠다고 덤볐을 테지만 진흙갯벌이라 발을 들이고 싶은 욕심도 들지 않는 곳이다. 하루 종일 앉아 갯벌을 바라보고 있으면 허무가 찾아오고 무기력해지기까지 한다. 그렇게 찾아온 허무와 무기력까지 떨쳐내려면 열흘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에겐 그만한 시간이 없으므로 아쉽지만 득량만을 목적지로 삼을 수는 없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곳으로두 번째 장소는 전북 진안 어느 고원에 지어둔 움막인데 한번쯤은 다시 돌아가 하룻밤을 보내고 싶은 욕심도 있지만(이것은 소망이라기보단 욕심이다) 버리고 떠난 곳을 다시 찾을 염치가 없다. 충남 태안의 어느 바닷가 높은 벼랑 위에 앉아 일렁이는 사릿물을 내려다보는 것도 우울을 떨치기에 그만일 수 있을 테지만 그보다는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커다란 고래의 도약을 단 1초라도 목도할 수 있다면 앞으로 찾아올 그 수많은 가을을 꾸역꾸역 버텨낼 수 있을 것도 같다.
섬이 고향인 친구는 꿈이었을지도 모를 이야기를 해주었었다. 한여름이 지나고 멀리 수평선 그 끝까지 시야가 트일 무렵에 자신이 살던 섬의 어느 봉우리에 올라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커다란 흰수염고래가 뛰어오르는 모습을 보았다고. 이제는 그 모습이 꿈일지도 모르지만 그 섬 그 봉우리에 올라 하루를 목도하다보면 귀뚜라미가 던져놓고 간 우울을 도약하는 고래가 떨쳐내주지 않을까.
고래 만나러 그 섬에 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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