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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밤을 줍고 온종일 밤을 먹고

삶은 밤: 다람쥐밤·기름밤·털밤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사랑스럽고 다양한 밤을 줍고 종일 먹다보면 턱이 오르내리지 않는다네
등록 2015-09-05 07:15 수정 2020-05-02 19:28
한겨레 김봉규 기자

한겨레 김봉규 기자

파란 하늘에 건들바람이 불고 여기저기서 툭툭 투두툭 알밤이 떨어집니다. 학교를 전폐하고 하루 종일 밤을 줍고 하루 종일 밤을 먹습니다. 마당에는 짚봉생이, 맷방석, 다섯 말들이 통나무 함지, 서 말들이 함지를 즐비하게 늘어놓고 각자 주운 밤을 따로 모아 팔아 10분의 1은 옷도 사고 학용품도 살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뱀이 무서워서 각자 허리를 구부리지 않고 풀을 헤치고 밤을 주울 수 있는 물푸레나무 지팡이를 가지고 다닙니다.

하루이틀 밤을 주워 밤이 쌓이면 좋은 것만 골라서 팝니다. 그때는 인구가 많지 않아 지금처럼 물건 팔기가 여의치 않았습니다. 팔고 나머지 중에서 똘똘한 것으로 골라 날마다 큰 솥으로 하나 삶아 먹었습니다. 큰 솥에 밤을 하나 가득 안치고 물은 밤의 7부쯤 붓고 불을 많이 때 펄펄 끓으면 불을 치우고 잠깐 뜸을 들입니다. 큰 버럭지에 찬물을 가득 담아놓고 큰 조리로 밤을 쭐쩍 씻어 건져 싸리 광주리에 담아놓고 하루 종일 들며 나며 먹습니다. 삶은 밤은 까서 먹는 것이 아닙니다. 꽁지 쪽을 입으로 물어뜯어 버리고 머리 쪽을 물고 꽉 깨물면 터져나오는 밤알만 먹고 껍질을 뱉어냅니다. 이렇게 먹기 쉬운 방법으로 밤을 아주 많이 먹습니다. 그러고도 남은 잔챙이 밤은 구들에 자리 걷고 널어 말립니다.

강변 따라 40그루의 줄밤나무 중간에 우리 집이 있습니다. 큰 다래끼를 집 앞 밤나무 밑에 놓고 작은 다래끼를 허리에 차고 한 번은 밤나무를 따라 올라가며 줍고 한 번은 내려가며 주워와 큰 다래끼에 모아 집으로 나릅니다. 노란 줄무늬가 있는 다람쥐를 닮은 다람쥐밤도 있고 길쭉하고 기름이 졸졸 흐르는 기름밤, 털이 송송한 털밤, 일곱 톨이 들어 메밀 모양을 한 메밀밤, 외톨밤, 네톨밤, 세톨밤, 콩알처럼 작지만 특별히 고소한 콩밤…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사랑스럽고 다양한 모양의 밤이 있어, 하루 종일 주워도 지루한 줄 모릅니다. 밤을 줍다보면 너무 잘생긴 밤이 있습니다. 팔기도 아깝고 어찌할 수가 없어 입으로 겉껍질을 까내고 이빨로 속 버물을 벅벅 긁어 퉤퉤 뱉어내고 생으로 먹습니다. 삶은 밤부터 이래저래 밤을 먹다보면 저녁때가 되면 턱이 아파 오르내리지 않습니다.

밤나무의 상치가 누레지면 밤송이를 털어서 주워 갈무리했다가 늦은 가을 온 가족이 모여 2~3일 바수는 작업을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너무 바빠서 털지를 못하셔서 어떤 나무는 밤이 너무 익어 바람이 불면 알밤이 쏟아져내립니다. 한번은 떨어지는 밤에 머리를 얻어맞고 쩔쩔매고 있는데 밤을 파먹고 있던 뱀의 허리에 밤이 딱 떨어졌습니다. 뱀이 깜짝 놀라 내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옵니다. 허리에 찬 밤 다래끼를 꼭 붙잡고 잽싸게 뛰었습니다.

뱀 이 새끼 밤한테 얻어맞고 왜서 나한테 달려드나. 한달음에 집으로 뛰어와 풀썩 주저앉아 엉엉 울었습니다. 할머니가 야야 무슨 일이나, 삶은 밤을 까주시면서 물어보셨습니다. 밭에서 일하시던 아버지·어머니도 들어와 물어보십니다. 아이구, 아가 오늘 죽을 뻔했잖나. 어머니가 영사(놀란 데 먹는 약)를 접시에 갈아 먹여주시고는 접시에 남은 걸 손가락으로 훑어 장배기에 뻘겋게 발라주셨습니다. 저녁때는 밤을 줍지 말고 쉬그라 하십니다. 저녁때 내내 가슴이 뛰고 눈물이 멈추질 않아 밤도 못 줍고 울었던 날입니다.

오랜만에 학교에 갔습니다. 어어어 장꿩(키가 커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한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운동회에 상이나 탈까 하고 학교에 왔나, 우리는 매일 달리기 연습을 많이 했다, 너는 연습을 안 해서 상을 하나도 못 탈 거여 하며 약을 올렸습니다. 학교를 다닐 적에 집에서 학교까지 날마다 뛰어다녀 달리기에 자신이 있는 것을 아들이 알 리가 없습니다. 다른 건 괜찮은데 무용이 문제입니다. 앞에 아들의 눈치를 보면서 따라 해보지만 도저히 안 됩니다. 따라 해보다가 우두커니 서서 울었습니다. 서서 울다가 따라 하다가 하다보면 운동회 날은 나도 친구들의 대열에 끼여 신나게 무용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전순예 1945년생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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