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북반구, 때로는 남반구 낯선 곳의 낯선 술집에 스며들어 낯선 술꾼들과 어울리며 잔을 기울이는 것. 술꾼의 로망이다. 자전거 여행은, 특히 혼자 떠나는 자전거는 의외로 고독하다. 이른 아침 안장에 오르면 해 질 녘 새로운 숙소에 짐을 내려놓을 때까지 말 한마디 나눌 사람 찾기 힘들다. 말수는 점점 줄어들고 생각은 그에 비례해서 깊어간다. 이미 낮에 두어 군데 증류소를 거치며 충분히 시음했음에도 저녁이면 다시 숙소 근처의 그럴듯한 술집을 찾아 문을 밀게 되는 이유다.
영국에서 가장 압도적인 형태의 술집은 펍. 잉글랜드에만 8만여 곳, 스코틀랜드를 포함하면 10만여 곳의 펍이 있다. 교회와 학교, 펍, 이 세 가지를 갖춰야 비로소 ‘마을’이라고 불리는 나라가 영국이다. 카페나 바, 태번과는 구별되는 펍에서는 맥주, 와인, 증류주 외에도 소프트드링크와 음식이 제공된다. 일반적으로 ㄷ자 형태의 작은 바와 테이블이 있고, ‘스누커’라 불리는 포켓당구대, 다트 또는 간단한 도박형 오락기기가 설치된 곳도 있다.
개인집이 아닌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공공의 장소라는 의미에서 ‘퍼블릭 하우스’라 불리는 펍은 17세기 중엽 그 형태가 확립됐으며, 말 그대로 단순히 술집만이 아닌, 때에 따라서는 마을의 대소사를 논의하는 마을회관이나 사교장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특히 영국이 최성기로 들던 빅토리아조 때는 영국의 정치·사회에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했으니, 문인과 묵객이 모이는 펍은 새로운 문학과 예술의 탄생지가 되기도 했고, 정치인들이 주로 모이는 펍은 정치 개혁의 진원지가 되기도 했다. “영국의 정치는 의회의 하원과 펍에서 만들어져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조금 거슬러 올라가 영국에 술집이 형성된 유래를 보면, 우선 로마 점령 시절(AD 43~407) 이른바 ‘로만 로드’(Roman Road)의 주요 병참 지역에 형성된 숙소 ‘인’(Inn)에서 에일맥주와 와인을 제공하던 것에서 시작돼, 중세에 들어서는 순례자를 위해 수도원이 마련한 대피소에서 술을 팔기도 했다. 특히 신심이 두터웠던 왕 리처드 2세는 재위 후반인 1300년대가 끝날 무렵, 순례자들의 여행 안전과 편의를 위해 수도원은 물론 각 교회 사이에도 숙소와 주점의 설치를 명령하고 눈에 띄는 간판을 달도록 했다. 이 숙소와 주점들은 당연히 여정의 요충지에 자리잡았으니, 이에 따라 술집이나 여관을 끼고 자연히 집락이 형성돼 술집의 이름이 마을 이름이 된 곳도 없지 않다.
한 가지 눈여겨봐둘 것은 펍의 간판인데, 유럽에서도 특이하게 영국의 펍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가로 3피트, 세로 4피트 크기의 직사각형 간판이 건물과 직각으로 돌출해 붙어 있다. 간판 내용도 각양각색이어서 대략 1만5천 가지인데, 대별하자면 영국인이 특히 애정을 갖는 왕실과 그 문장, 그리고 역사적 사건에서 따온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영국의 펍 간판만 꼼꼼히 들여다봐도 영국 풍물에 대한 재미있는 책이 한 권 나올 정도다.
기네스 등 맥주를 선호하는 잉글랜드는 물론 스코틀랜드의 펍에서도 술꾼들의 첫 주문은 대개 위스키가 아닌, 각자 선호하는 맥주의 파인트(568mℓ)다. 일본의 이자카야에서 첫 잔이 거의 예외 없이 “나마, 구다사이”인 것처럼 영국에서는 “파인트, 플리즈”다.
그러나 나는 맥주만 마시러 온 것이 아니다. 당연히 두 번째 잔부터는 국내에선 구경할 수 없는 진귀한 레이블의 싱글몰트 순례다. 스코틀랜드 펍에서의 위스키 한 잔은 ‘드램’이라는, 우리가 아는 위스키 샷(30mℓ)보다 조금 적은 느낌의 금속계량기를 사용해 따라준다. 그리고 묻는다. “얼음도?” 그때 오케이, 하면 하수 취급을 받는다. “아니, 당연히 물만 조금…”이라고 하면 바 안쪽에서도 우호적으로 고개를 끄덕여준다. 말동무? 필요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한두 잔 기울이다보면 어느새 내 옆에 조금 우직해 보이는 스콧 한두 사람이 어깨를 치며 말을 건네고, 이어서 술잔을 보내올 것이다. 그리고 낯선 술집에서의 다정한 밤이 깊어갈 것이다. 예외 없이 그랬다.
김명렬 자전거 여행자·‘바 상수리’ 마스터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내란대행’ 한덕수 석달 전 본심 인터뷰 “윤석열은 대인, 계엄령은 괴담”
“백령도 통째 날아갈 뻔…권력 지키려 목숨을 수단처럼 쓰다니”
새 해운대구청 터 팠더니 쏟아져 나온 이것…누구 소행인가?
한덕수, ‘200표 미만’ 탄핵안 가결땐 버틸 수도…국회, 권한쟁의 소송내야
한덕수의 궤변…대법·헌재 문제없다는데 “여야 합의 필요” 억지
헌재, 탄핵심판 일단 ‘6인 체제’ 출발…윤은 여전히 보이콧
국힘 김상욱·김예지·조경태·한지아, 헌법재판관 선출안 표결 참여
분노한 시민들 “헌법 재판관 임명 보류 한덕수 퇴진하라” 긴급 집회
‘오징어 게임2’ 시즌1과 비슷한 듯 다르다…관전 포인트는?
[단독] 문상호 “계엄요원 38명 명단 일방 통보받아 황당” 선발 관여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