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친구의 경험담. 영국 런던발 에든버러행 비행기에 탔더니 과연 식전주도 싱글몰트 매캘란 12년. 그것도 ‘콸콸’ 부어주며 몇 잔이고 리필해준다. 흐뭇하게 얼굴이 붉어진 친구가 주위를 돌아보니, 아니 이 사람들, 너도나도 부어라 마셔라 비행기 안이 거의 술판 분위기다. 연신 새 위스키 병마개를 열기 바쁜 스튜어디스에게 “스코틀랜드행 비행기는 늘 이런가요?” 부러움 섞어 물었더니 이렇게 답이 돌아왔다. “오늘은 번스 나이트거든요.”
스코틀랜드 10파운드 지폐에는 두 문인의 초상이 올려져 있다. 그중 한 명이 등을 남긴 시인이자 역사소설가며 사람들이 ‘존경하는’ 월터 스콧경이고, 다른 한 명은 위스키에 관한 수많은 시를 남긴 로버트 번스다.
‘번스 나이트’(‘번스 서퍼’라고도 부른다)란 1759년 1월25일 번스의 생일을 기념하는 행사다. 평소 위스키보다 맥주를 선호하는 사람도 이날만큼은 레스토랑, 바 등에 모여 전통악기인 백파이프가 흥을 돋우는 가운데 역시 전통음식 하기스(양의 내장, 양파 등을 잘게 다진 뒤 오트밀과 함께 양의 위에 넣어 쪄낸 음식이다. 피맛이 좀 진한 순대라고 할까)를 곁들여 끝도 없이 ‘슬런지 바’(게일어로 건강을 기념하는 건배사다)를 외친다.
밤이 깊어 모두가 만취하면 너도나도 어깨를 두르고 번스의 시에 곡을 붙인, 너무나 유명한 곡 을 합창하며 번스 나이트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다음날 숙취에 시달리는 뱃속에 뜨거운 수프를 흘려넣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두드리며 비로소 새해가 시작되었다고 실감한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특히 번스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37살의 짧은 생애를 사는 동안 민초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그들의 애환을, 다른 말도 아닌, 당시 스코틀랜드의 모국어라고 할 수 있는 게일어(지금도 헤브리디스제도 등 일부 지역에서는 생활어다.
27살에 출판한 첫 시집의 제목은 아예 다. 불과 600부가 인쇄된 이 시집이 회자되면서 번스는 에든버러로 진출, 일약 ‘민중 시인’이니 ‘스코틀랜드의 보물’이니 하는 찬사를 얻으며 사교계의 총아로 데뷔했다. 그러나 당시 런던풍을 추종하는 에든버러의 문인과 귀족 생활에 이내 환멸을 느끼고 다시 하일랜드의 거친 자연 속으로 돌아왔다. 만년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어 위스키 밀주자를 찾아내 징세하는 일도 했다. 위스키를 각별하게 사랑해서 700여 편의 시 중에 위스키를 노래한 시가 적지 않은 번스가 위스키 밀주를 단속하는 일을 했으니, 징세관으로서 그의 실적은 모르긴 해도 위스키 역사상 가장 최저치를 기록했을 것이 분명하다.
스코틀랜드를 여행하다보면 도시와 마을 어디랄 것 없이 스코틀랜드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이들을 기리는 기념물, 기념관 등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마을이면 반드시 딸려 있는 묘지 구역이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교회가 따로 없는 작은 마을일 경우라도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에 특별히 구획을 만들어 나라를 위해 크고 작은 전쟁에서 기꺼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이름을 새겨놓고 그 앞에 붉은 꽃을 놓아두고 기렸다(사진).
술잔에 따르는 술에는 세 종류가 있다. 오늘의 나를 위로하고 내일의 나를 꿈꾸며 내 잔에 스스로 따르는 술. 함께 있어 즐거운 친구의 잔을 채우는 술. 그리고 지금은 없는 이를 기리며 붓는 술이다. 스코틀랜드에서 세 번째의 술은 동상이나 기념관을 남기면서 분칠된 장군이나 정치가가 아닌, 총 한 자루 메고 전장에 나가 돌아오지 않은 나의 형과 동생, 이웃집 아저씨와 할아버지를 위한 것이다. 그들은 역사를 교과서 안에 새기지 않고 마을 앞 묘비에 새겨두고 있었다.
혹시 연초에 스코틀랜드를 여행할 사람이 있으면 1월25일 ‘번스 나이트’를 기억해두기를 바란다. 난동만 부리지 않는다면 비행기 안에서도 얼마든지 만취할 수 있다. 그리고 마을에서는 동네 모든 사람과 어깨를 두르며 친해질 수 있다.
자전거 여행자·‘바 상수리’ 마스터
* ‘김명렬의 위스키 방랑’ 연재를 마칩니다. 좋은 글 보내주신 김명렬씨와 칼럼을 아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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