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가 세 개 있으면 솥을 하나 세울 수 있다. 솥 정(鼎)이 그렇게 생겼다. 맛있는 빵, 편한 구두, 입에 감기는 술 한 잔, 읽기 전과 후, 읽은 사람을 확실히 다르게 하는 책 한 권 등등에도 세 개의 다리가 필요하다. 그중 두 개가 헌신과 전문성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지은이의 다리라면 그 결과물을 사용하는 이의 평가가 나머지 하나의 다리가 되어 솥을 세운다.
책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두 종류의 책이 있다. 좋은 책과 좋지 않은 책. 사람마다 평가 기준이 각양각색이니 누구에게는 반듯한 솥이 누구에게는 기우뚱한 솥으로 비친다. 하물며 ‘올바른’ 책이란 있을 수 없다. 올바름이란, 진실이란, 결국 당대를 사는 대다수의 긍정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또 하나의 코페르니쿠스의 등장으로 언제든지 뒤집어질 수 있다. ‘올바른 역사 교과서’란 어이없는 표현에 열이 받아 사설이 길어졌다. 술 이야기로 돌아가자.
지난해 가을의 끄트머리에 나는 두 달 반의 위스키 증류소 자전거 여행을 마치고 에든버러로 돌아온 뒤 귀국 전 꼭 한 권의 책을 구하기 위해 서점을 돌아다녔다. 절판되지 않았다고는 하나 공교롭게도 시내 대형 서점에 모두 재고가 없었다. 에든버러 성곽의 뒤편에 위치한 헌책방 거리를 샅샅이 뒤진 뒤 거의 포기할 지점에 마지막으로 들른 집이었다. 빼곡한 서가의 맨 아래칸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그 책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도 두 권이나. 그중 한 권은 출판 100년을 기념해서 특별히 새로 인쇄한 한정본. 내가 샀던 책 중 가장 비싼 가격을 부르는 책이었으나, 두 권 모두 사지 않을 수 없었다.
. 국내에는 아직 술, 특히 위스키에 관해서는 좋은 책이 드물지만, 근대 위스키 200년 역사에서 좋은 술 못지않게 좋은 책 또한 도서관 하나를 채울 만큼은 나와 있다. 증류소의 현장을 직접 답사한 책도 적지 않은데, 위의 책은 그중 ‘원조’라고 부를 수 있다.
저자 앨프리드 바너드의 생애는 많은 부분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데, 알려진 바로는 1837년 런던 근교에서 태어나 식료잡화와 양복지 사업을 하던 부친의 사업을 이어받아 중년까지는 수출업까지 확장하는 사업가로 성공한 인물이다.
사업가인 그가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당시 런던에서 발행되던 라는 주간지의 의뢰를 받아 증류소 취재를 나선 것이 1885년. 잡지사 쪽에서는 애당초 연재 계획이 없었으나, 증류소의 현장 취재 뒤 위스키는 물론, 스코틀랜드의 거친 풍광과 사람들의 소박한 성정에 흠뻑 빠진 바너드가 자비를 들여가며 그 취재를 정력적으로 이어가 원고를 보내 연재를 계속하게 되었다.
바너드는 말과 마차, 배를 이용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험준한 스코틀랜드는 물론 바다 건너 아일랜드까지 누비며 그 뒤 3년 동안 조업 중인 161개소의 모든 증류소를 찾았다. 그 결과물이 이윽고 1887년, 그가 50살 되던 해에 물경 500쪽이 넘는 두툼한 책으로 아름다운 동판화와 더불어 인쇄되었다.
그가 취재했던 증류소 중 현재에도 가동되는 증류소는 반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점이 초창기 증류소의 면면을 고증할 수 있는 자료로서 더 의미 있다. 빅토리아 시대의 풍물과 생활풍습을 돌아볼 수 있는 여행기로서의 가치 또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책에 실린 문장을 일부 옮겨 싣는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저무는 해의 마지막 반짝이는 햇살이 적갈색 나무들과 언덕과 멀리 어두워지는 지평선을 물들이고 있다. 그리고 발 아래 펼쳐진 바다는 신비한 안개로 덮여 있다. 마차 위의 우리들은 기쁨에 가득 찬 한편으로 왜 오래전에는 이런 기쁨을 몰랐을까 후회하기까지 한다.”
‘아일라병’이라는 말이 있다. 아일라섬을 방문한 사람은 반드시 걸린다는, 그래서 반드시 다시 아일라섬을 찾아온다는 향수병이다. 나는 그 말을 스코틀랜드에 확장한다. 한번 스코틀랜드를 여행한 사람은 반드시 다시 스코틀랜드를 찾는다. 바너드도 그랬을 것이다. 아마 당신도 그럴 것이다. 그의 책을 읽을 기회는 드물겠지만, 당신이 만약 스코틀랜드를 여행한다면 또 하나의 바너드가 되어 훌륭한 책을 쓰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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