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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어떻게 위스키 강국이 되었나

인기 상승 중인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 ‘토리이 신지로’… 온갖 반대에도 “한번 해보긴 했냐?”며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던 진정한 기업가
등록 2015-06-07 18:42 수정 2020-05-03 04:28
김명렬

김명렬

지난해 벽두에 세계 주류업계는 충격에 빠졌다. 짐빔과 메이커스마크, 캐나디안클럽 등 유수의 브랜드를 자랑하는 미국의 주류회사 빔 그룹이 일본의 산토리 위스키로 160억달러에 넘어갔다는 뉴스가 발표된 것이다. 스코틀랜드에 보모어, 글렌갤리오크 등 두 증류소를 확보하며 교두보를 구축했던 산토리는 빔의 매수를 통해 그 산하에 있던 라프로익, 아드모어, 오첸토샨 등 세 증류소를 더해 위스키의 원산지에서도 무시 못할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미 세계 5대 위스키 산지의 하나로 손꼽히는 일본 위스키의 저력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연초 일본 TV에 이라는 아침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됐다.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닛카 위스키의 창업자 타케쓰루 마사타카의 일대기를 다뤘다. 그러나 실은 일본 위스키의 선구자이자 마땅히 ‘아버지’로 불려야 하는 인물은 타케쓰루가 아닌, 산토리 위스키의 창업자 토리이 신지로라고 나는 생각한다.

1879년 오사카에서 환전상 부친의 둘째로 태어난 토리이는 14살에 집을 나와 견습도제로 상인 수업을 시작했다. 7년에 걸친 도제 수업의 첫 상점이 약종상(약품도매상. 이곳에서 포도주, 브랜디, 위스키도 취급했다)이었다. 자연히 서양 주류와 원료 혼합 등의 기술을 익힌 토리이는 훗날 ‘오사카의 코’라고 불릴 정도로 빼어났던 후각을 무기로 약관 21살에 유사포도주를 제조하는 토리이 상점을 창업했다. 1906년 고토부키야 양주점으로 상호를 변경했고 이듬해 발표한 아카타마 포트와인이 대히트하면서 오사카의 지역 상점이 아닌 전국구 규모로 급성장했다.

1920년대에 들어서며 토리이는 숙원을 실행에 옮긴다. 그는 본격 위스키를 직접 일본에서 생산하기로 결심했다. “회사를 말아먹을 것이냐” 등 온갖 반대를 물리치고 본고장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 증류소 입지를 물색하다가, 교토의 배후에 있는 야마자키를 낙점했다. 토리이가 타케쓰루와 인연이 닿은 것도 이때다. 당시 타케쓰루는 오사카의 또 다른 회사의 양조기사로 일하던 중 위스키 생산의 포부를 지닌 사장의 배려로 스코틀랜드로 위스키 유학을 떠날 수 있었으나, 2년여의 현장실습과 공부를 마치고 귀국했을 때 회사는 도산 상태였다. 그가 호구지책으로 중학교 화학선생 임시직을 얻어 어렵게 생활할 무렵, 토리이가 사운을 건 야마자키 증류소의 공장장으로 30살의 젊은 그를 발탁해 공장의 건설부터 생산·감독까지 전권을 줬다. 당시 대졸 사원의 초임이 20원일 때 무려 20배에 가까운 연봉 4천원에 최소 10년 근속이 스카우트의 조건이었다.

타케쓰루는 정확히 10년을 채우고 독립해 1934년 홋카이도의 요이치에 자신의 증류소를 세웠다. 야마자키 증류소에서 쌓은 경험과 업계의 신뢰, 저축한 자금이 있었기에 가능한 독립이었으니, 토리이가 없었다면 타케쓰루의 개화도 없었거나 아주 늦었을 것이다.

1929년, 드디어 5년간 숙성한 위스키를 처음으로 시장에 내면서 그 기념비적인 상품에 토리이는 아카타마(赤玉·태양) 포트와인을 사랑해준 고객이 있었기에 위스키를 생산하게 됐다는 고마운 마음을 담아 ‘Sun’,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tory’, ‘Suntory’라고 명명했다. (혹자는 토리이‘씨’(일본어로 ‘상’(さん))에서 Sun이 왔다고 하지만 잘못된 것이다.)

토리이의 사업이 일대 위기에 처한 것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일본 본토 공습이 본격화되면서 그의 생산공장들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해버린 것이다. 폐허에 선 그에게 중역 한 사람이 다가와 위로했다. “대장(사내에서 그의 호칭이었다)! 괜찮습니다. 우리에게는 야마자키에 위스키 원주 5만 통이 있습니다. 그것이 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결국 모두가 반대했던 위스키 사업이 토리이를 다시 살렸고, 성장 일로에 있는 오늘날 일본 위스키 산업의 밑거름이 된 셈이다.

사업이 탄탄대로일 때 가장 위험한 사업을 시작한 토리이가 반대하는 부하들에게 억센 오사카 사투리로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한번 해보긴 했냐?”였다. 1963년. 토리이 신지로가 83살로 세상을 떠난 이듬해, 산토리 위스키의 고토부키야는 오랜 이름을 버리고 회사 이름을 지금의 ‘산토리’로 바꾸었다. 이때의 산토리의 ‘산’이야말로 남다른 혜안과 의지와 모험정신으로 불세출의 기업을 일군 한 기업가에 대한 존칭으로 붙여진 것이 아닐까라고 나는 짐작하고 있다.

김명렬 자전거 여행자·‘바 상수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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