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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위스키엔 담긴 건 지혜와 자부심 그리고 힘

20년 동안 증류소 직원으로 일한 뒤 자신의 증류소를 세우겠다는 뜻을 끝내 이뤄 글렌피딕의 윌리엄그랜트앤선즈를 창업한 윌리엄 그랜트
등록 2015-10-24 14:45 수정 2020-05-03 04:28
김명렬

김명렬

한 남자가 있었다. 1839년, 아직도 밀주 위스키의 양산박이었던 스코틀랜드 스페이사이드 지역의 조그만 마을 더프타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자신의 이름을 아들에게 물려줬다. 윌리엄 그랜트. 집안은 가난했지만 잉글랜드에 저항해 스튜어트 왕가를 다시 스코틀랜드 왕으로 복위시키려는 자코바이트의 독립운동에 참전했던 증조부의 영향이었던지 가풍에는 기개가 있었고, 소년은 활기차고 명석·명랑했다.

7살에는 이미 수마일 떨어진 농가에서 일을 얻어 집안을 도왔고, 의무교육인 초등학교를 농한기에만 다니면서도 빼어난 성적으로 마쳤다. 졸업 뒤엔 곧바로 더프타운의 제화점 도제로 취직했다. 스무 살이 되어 결혼하면서 당시의 젊은 하일랜더 청년이라면 누구나 그랬듯이, 장차 자신의 기업을 일구려는 꿈을 안고 석회 채굴 회사에 회계원으로 취직했다. 바쁜 와중에도 북부 스코틀랜드를 샅샅이 누비며 석회 관련 지질 조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주말 이틀에 왕복 200여km를 걷는 경우도 허다했다. 힘이 넘치는 남자였다. 하지만 20대 중반, 한 지주와 광산 채굴 계약을 맺었으나 일방적으로 계약 해지를 당하고 일단 꿈을 접었다. 광산업은 젊은 청년이 무일푼으로 시작하기에는 너무 턱이 높았다.

26살 때 당시 더프타운에서는 아직 유일했던 정부면허를 가진 몰트락 증류소로 직장을 옮겼다. 연봉은 100파운드가 안 됐고 그조차 이후 한 번도 오른 적이 없지만,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증류소를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위스키 생산 과정과 공장의 모든 것을 배워나갔다. 월급도 아끼고 아껴서 종잣돈을 늘려나갔다.

꿈에 그리던 기회가 온 것은 1886년 여름. 그가 46살이 되던 때였다. 스페이사이드 지역의 카두 증류소가 설비 일체를 최신식으로 바꾸면서 낡은 증류기와 기타 도구들을 시장에 내놓았다. 게다가 당시 카두의 소유주였던 커밍 부인이 그의 열정에 호의를 가져, 그 모든 것을 120파운드의 파격적인 가격에 넘겼다.

그해 9월3일, 날짜까지 맞춘, 정확히 20년을 채운 몰트락 증류소에 사표를 던지고, 이미 장차의 자신의 증류소 부지로 얻어두었던 마을 언저리의 땅으로 향했다. 자금은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에게는 그의 꿈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는 아내와 무엇보다 일곱 아들과 두 딸이 있었다.

그로부터 불과 1년, 온 가족이 달라붙어 거의 맨손으로 벽돌을 쌓아가며 공장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듬해인 1887년, 다른 날도 아닌 크리스마스의 깊은 밤, 온 가족이 모인 가운데 중고로 낡아빠진, 그러나 더없이 뜨거운 증류기에서 최초의 위스키 원액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지금은 전세계 싱글몰트 위스키 시장의 30%를 상회하는 점유율을 자랑하며 연간 100만 상자(12병들이)에 가까운 술을 전세계에 수출하는 글렌피딕 증류소의 최초의 위스키 한 방울이었다.

위스키 증류소란 애당초 가양주에서 시작해 기업으로 발전한 것으로, 현재 스코틀랜드 110여 곳의 증류소 면면을 들여다보면 예외 없이 감동할 만한 스토리가 내재돼 있다. 그러나 나는 그중에서도 윌리엄 그랜트가 세운 글렌피딕 증류소를 스코틀랜드 으뜸의 자부심을 가진 증류소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유는 여러 가지. 1920년대 미국이 금주법 시대로 들어서며 그 여파로 스코틀랜드의 여타 증류소들이 감산을 할 때, 거꾸로 금주법 이후를 예상하고 증산 체제를 갖추면서, 아니나 다를까 10년 뒤 금주법 해금 이후 일약 시장의 선두주자로 치고 나설 수 있었던 혜안. 1960년 들어 당시만 해도 블렌디드 위스키의 원주용으로 통째로 팔리던 몰트위스키를 업계의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그 유명한 삼각병(물·공기·몰트를 의미한다)에 담아 최초의 싱글몰트로 시장에 출시, 멋지게 안착시키며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점. 무엇보다 1960∼70년대 장기간의 전세계적 위스키 업계의 불황 속에 스코틀랜드의 수많은 증류소들이 글로벌 기업에 흡수될 때, 글렌피딕은 꿋꿋이 가족경영의 전통을 지켜냈고, 그러면서도 오히려 세계 으뜸의 매출을 자랑하는 기업으로 성장한 점 등등이다.

글렌피딕의 윌리엄그랜트앤선즈를 창업한 윌리엄 그랜트는 만년에 회사 이름처럼 경영은 자손에게 맡기고 본인은 고향 더프타운을 위해 수많은 자선·자원봉사 활동을 하다가 1923년, 83살에 타계했다.

스코틀랜드의 수많은 B&B 숙소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곳이라고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더프타운의 ‘올트스쿨하우스’의 데비 아줌마는 나의 위스키 자전거 여행 이야기를 듣더니, 곧바로 집 뜰에서 내려다보이는 교회 묘지의 구석 벽에 있는 한 묘비를 먼 손끝으로 가리켰다. “저게 바로 글렌피딕을 세운 윌리엄 그랜트의 묘비(사진)야.”

가족 묘지인 듯한 묘비에는 과연, 윌리엄 그랜트를 비롯해 여러 이름들이 나란히 새겨져 있었다. 특히 묘비 위에 쓰인 한 문장이 인상 깊었다. “Stand Fast!” 뜻을 세우고 그 뜻을 위해 초지일관 한 생애를 헌신했던 한 남자의 자부심이 그 한 줄에 요약돼 있었다.

김명렬 자전거 여행자·‘바 상수리’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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