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는 기질을 만들고, 그 기질은 부엌에 서면 식탁 위에, 거울 앞에 서면 입성으로, 술광에 서면 술통 안에, 그리고 전장에 서면 역사에 반영된다. 정복하지 못한 곳이 없었던 로마가 거의 유일하게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물러난 곳이, 그들이 칼레도니아라고 불렀던 지금의 스코틀랜드다.
잉글랜드에서 집집마다 맥주를 빚어 당시 비위생적이었던 물 대신 마실 때(알코올 도수가 2.5도 정도였다) 스코틀랜드에서는 같은 보리로 위스키를 빚었다. 험준하고 황량한 자연환경에 놓인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 2.5도의 맥주 따위란 맹숭맹숭했을 것이다. 세찬 바람이 몰아치는 들판으로 아침 일을 나갈 때, 폭우 쏟아지는 산중에서, 간신히 추위를 가리는 누추한 돌집의 흐릿한 램프 아래에서 그들은 목을 태우는 듯한 강렬한 도수의 위스키를 흘려넣으며 불굴의 에너지를 충전했다.
유럽에 널리 퍼져 있던 켈트족의 한 분파인 스코트인이 로마와 게르만족에 밀려 아일랜드를 거쳐 칼레도니아로 들어온 것이 대략 5세기. 이미 그곳에는 역시 켈트족의 분파인 픽트·브리튼인들이 있었으니, 스코트인들은 그 뒤 뒤늦게 브리튼섬의 남쪽으로 진입한 튜턴족의 앵글로색슨, 호시탐탐 북쪽 해안을 유린하는 스칸디나비아인들과 맞서며, 때로는 칼과 도끼로, 때로는 혼인 등의 유화정책으로 세력을 키우다가 11세기에 들어서며 비로소 스코틀랜드 전역을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했다.
로마도, 바이킹족도, 그리고 오늘날의 잉글랜드도 도저히 어찌하지 못하는 스코트, 즉 스코틀랜드인의 기질이란 어떤 것인가. 영국인에 이런 우스개가 있다. 산을 넘는 두 사람이 만났다. 그들이 웨일스인이면 노래를 부를 것이고, 아일랜드인이면 싸움을 할 것이다. 스코틀랜드인이면? 각자의 지갑을 움켜쥘 것이다. 인색함을 풍자한 조크인 셈인데, 강퍅한 삶의 터전에서 검약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 인색함은 당연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기질은 근대 이후 상업으로 흘러갔다. 완고하지만 한편으로 진취적이고, 인색한 한편으로 합리적인 그들의 기질은 굳이 비유하자면 우리 개성상인의 그것과 닮았다고나 할까. 그 기질을 바탕으로 스코틀랜드인들은 일찌감치 미국은 물론 캐나다, 뉴질랜드 등 신천지를 개척하며 이미 까다로운 런던을 석권한 위스키를 세계 무대로 옮겼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그들의 뿌리, 즉 성씨와 혈통, 지역을 공분모로 하는 씨족(clan)에 대한 천착이다. “시골마을의 세계의 중심은 그리니치천문대가 아니라 마을 교회 종탑 위를 지난다”(베냐민)는 말은 스코틀랜드인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 지금도 그 씨족 의식의 한 면모를 역연히 볼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민족의상 킬트다. 킬트는 타탄(tartan)이라는, 가로세로 체크무늬를 넣은 양모천으로 만드는데, 각 씨족에게는 마치 왕가의 문장처럼 법에 의해 엄격하게 보호되는 고유의 무늬가 있다. 각종 공식 석상에서 씨족 구성원들은 자신들만의 타탄으로 만든 킬트를 입고 자랑스럽게 가슴을 편다. 다른 하나는 공통의 성씨인데, 예를 들어 가장 흔한 것이 Mac(○○의 자식이란 뜻이다)이다. 씨족의 최초 선조가 도널드였으면 그 씨족의 이후 성씨는 모두 맥도널드이고, 켄지였으면 매켄지가 되는 식이다. 조상이 같은 씨족 후예의 연대감은 남다른 것이 당연하다.
스코틀랜드 사람과 가깝게 만날 기회를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해서 자전거에 실었던 텐트를 일찌감치 없애버리고 민박을 하며 다녔었다. 싱글몰트의 수도란 별칭을 갖고 있는 더프타운의 민박에 묵을 때 마침 동네 핼러윈 파티에 초대받았다. 조그만 마을회관에 30여 가족들이 모였고, 귀엽게 분장한 아이들을 위한, 참으로 소박한 여흥을 돌봐주는 한편으로 어른들은 그 주위에 빙 둘러앉아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었다. 낯선 동양인이 딱 한 사람 낀 셈이지만, 누구도 특별한 배려도, 무시도 하지 않았다. 어느 한 사람, 휴대전화를 꺼내 들여다보는 이도 없었다. 시끄럽지 않았으나 즐거웠고, 화려하지 않았으나 따뜻했으며, 서로 다른 사정을 가진 이웃들이었으나 깊은 연대감을 느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로소 스코틀랜드의 속살을 본 듯한, 긴 여행 중 가장 특별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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