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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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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의 제왕

흔한 사람의 하나였다면 강 옆에 매운탕집을 하거나 동네 목욕탕 차려놓았을 터인데 제왕이었기에 강줄기를 모두 뒤바꿔버렸으니…
등록 2015-07-10 15:49 수정 2020-05-03 04:28

노인이 처음부터 노인 아니었듯(그러니까 벤치에 앉아 흘흘거리고 있는 저 늙은이도 80년 전에는 분홍빛 입술을 오물거리며 어미의 젖꼭지를 찾았더라는 말씀인데) 우리의 제왕(帝王)께서도 처음부터 제왕은 아니었다. 70여 년 전에는 그저 손가락만 꼬물거리는 아이였을 뿐이다.

자연은 그의 적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어쩌면 문제는 그것인지 모른다. 아이가 그저 아이로만 존재하면 좋았을 것이지만 세상천지 그럴 리는 없고, 배우고 익히며 자랐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가 이 세상을 포획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애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가 집구석마다 늘 화두로 던져지는 것 아니겠는가.

아무튼 그는 열심히 자라서 우리가 아주 잘 아는 국가의 유명 회사 사장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그다음 단계로 수도로 통칭되는 커다란 도시의 수장이 되기에 이른다. 왕후장상의 DNA가 따로 없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 보이신 것인데, 설사 있다 하더라도 노력과 집념만으로 그것을 넘어설 수 있다는 사실을 목도하게 해준 것이다. 그 변화의 과정에는 ‘구하라 얻으리라’의 가훈과 ‘하면 된다’의 신념이 서슬 푸르게 작동되었다. 그리고 그것의 원동력은 자연 상태에 대한 불만이었다.

먼저 평지를 보면 용서하지 않았다. 비어 있는 곳이 있으면 무언가를, 그것도 ‘공구리’ 비벼서 쌓아 올려야 직성이 풀렸다. 무언가 우뚝 솟은 게 있으면 싹둑 깎고 밀어내야 흡족했다. 또 울퉁불퉁한 것은 평평하게, 구불거리는 것은 직선으로 만들어버렸다. 있던 것을 없애고 없던 것을 탄생시키며 살아온 것인데, 한마디로 눈앞에 보이는 ‘스스로 그러한 것’을 혐오했던 것이다. 자연(自然)이 그의 적이었다.

그것은 스승인 ‘소판돈 어른’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그 짓만 하면 매번 곳간에 돈이 쌓이고 통장 액수가 올라간다는 비결을 고스란히 전승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종교관과는 달리 ‘공사 중’이라는 스님만 잔뜩 양산하기도 했는데 그럼으로써 어떤 부자도 자신의 재산에 만족 못하는, 천사에게 금화를 너무 많이 받아서 끝내 부대 자루가 터지고 만, 저 비극의 부랑자와 근본이 다르지 않다는 것까지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게 해주기도 했다.

사람들은 통 모르고 있는 도사가 한 분 계시는데 호가 구멍이라 혈선사(穴先士)라고도 불린다. 그는 볼펜, 수도꼭지, 주전자, 라이터, 호스, 스피커, 자동차 타이어 등 셀 수 없이 많은 물건이 구멍에 의해 각자 쓰임새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발견하고 공부를 정진한 끝에 우리 인생이 결국 구멍에서 시작되어 지상에 작은 구멍 하나 뚫는 것으로 끝나는 거라고 설파하신 분이다.

그 시절 실용이라는 용이 살았으니

어느 날 이 선사가 제왕에 관해 귀띔해주기를, 오래전 돗자리 위에 사람 얼굴 그려놓고 관상 사주 궁합 택일 봐주는 것으로 일당 벌이하던, 돋보기 쓴 돌팔이 하나가 ‘물을 가까이 해야 건강하고 승승장구하고 집안이 번창하며 오래 산다’고 풀이해주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것이다. 자신이 봐도 제왕의 사주(四柱)에는 물(水)이 없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다.

선사의 추측이 가히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행보에서 나타났다. 마음이 늘 물에 가 있던 것이다. 도시의 수장이 된 그는 오래 묵어 용도 페기된 어떤 도랑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느닷없이 거기 살던 사람들을 죄다 내쫓고 (어딘가로 가서 알아서 살겠지 뭐) 친애하는 기계들을 동원해 허물고 파고 쌓고 다지고 매만져서 네모반듯하게 새로이 만들어버렸다. 그 시절 실용이라는 용이 산다고 전해지기도 했는데 문제는 그 도랑에 물이 잘 흐르지 않아 물뱀 한 마리도 헤엄치기가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 없는 개천은 앙꼬 없는 찐빵이나 마개가 눌어 붙어버린 술병보다 더 혹독한 경우다. 그는 다시 가훈과 신념대로 ‘물이 없으면 사면 된다’ 외치고 나서 그곳으로 수돗물을 흐르게 했다. 물이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건이지만 스스로 지니고 있는 그 특성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물고기를 풀어놓기까지 해서 예전 봉건시대 왕족들이 했던 놀이터 같은 것을 만든 셈인데 듣기로 그곳을 도랑답게 만들기 위해, 즉 물을 흐르게 하기 위해 지금도 달마다 적잖은 돈이 들어간다고 한다.

어쨌거나 그는 그것으로 성이 차지 않았다. 일례로, 가만히 있지 못하고 그 도시를 자신이 믿는, 하늘 위 어느 존재에게 봉헌해버렸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이 도시가 당신 개인 것이냐, 그분께 바치면 이제부터 우리는 세금을 하늘에 내야 하는 것이냐’ 하는 문제 제기와 조롱에 시달리게 된다.

물론 그는 할 말은 있었다. ‘그렇다면 보거라, 내가 나의 구주께 이 도시를 바쳤는바, 그러면 이 도시가 시방 하늘에 있는가 여기에 있는가.’ 그렇게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풍문에 의하면 기자회견을 마치고 서둘러 교회로 달려간 그는, 자신의 구주께 ‘저들 말을 믿지 마소서, 무지하고 몽매한 자들에게 잠시 위안을 주기 위한 방편이니 오해 마소서, 누가 뭐래도 이 도시는 구주의 소유입니다’ 읊조렸다고 한다.

더불어 그는 어째서 저에게 도시를 주시고 그 도시의 자유로운 누림은 허락하지 않는지, 왜 이렇게 사사건건 덤벼드는 놈이 많은지 한탄했다. 그래서 제왕이 되기로 작정을 했고 그렇게 된 것이다. 어떻게? 열심히 노력해서, 하면 된다, 정신으로.

그는 돈, 돈, 돈만큼은 많이 벌게 해주겠다는 약속만으로 제왕이 되었다. 가장 잘 아는 게 그것이니까. 물론 그 국가는 민주주의를 하겠다고 선언한 곳이라 투표는 했다. 기원전 아테네에서 시작된 민주주의 개념은 도편추방제나 평의회, 배심원 제도 같은 단어와 함께 애들 책에 나올 정도인데, 축구 경기 자주 본다고 공 잘 차는 것 아니듯이, 슬픔은 현실과 이론의 차이에서 나오는 법이다.

“이제 대강 좀 해라, 대강”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당장 그곳이 너무 멀었다. 그 개념이 오기까지 2천 년 넘게 산맥 넘고 사막을 건너고 어떤 경우는 바다까지 건너느라 용을 썼는데 소문만 도착했지 내용물은 그렇지 못한, 마치 철가방 찾아와서 초인종 누르지만 정작 짜장면은 아직도 주방 안에 있는 형국이었던 것이다. 그런 연유로,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이 국가는 그 수입품의 포장지만 열심히 읽고 선거로 대표를 뽑기는 하는데 뽑히는 순간 제왕이 되어버리는 수준 미달의, 공화국도 아니고 왕국도 아닌, 성문법 국가도 아니며 그렇다고 자연법 국가도 아닌, 독립국가라고 큰소리치지만 전투기 하나 띄우려 해도 큰 나라 허락을 받아야 하는, 뭐 그런 어설픈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말씀이다.

그건 그렇고, 제왕이 된 뒤에도 그는 가만있지 못했다. 이제 국가의 자유로운 누림을 원했던 그는 기도를 올리다가 졸았거나 또는 꿈속에서 기도를 하거나 암튼 둘 중 하나는 분명한 어떤 시간에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

“이제 대강 좀 해라, 대강.”

그는 눈을 번쩍 떴다. 대강이라면 맞아, 큰 물! 이렇게 외치고 나서 엎드려 있는 수많은 쫄따구들에게 하늘이 준 임무와 역할에 대해 지시를 하고 자기 땅의 모든 강을 새로이 만들겠다고 선포했다. 물을 가까이 해야 된다는 돌팔이의 조언과 도랑 다뤄서 재미 본 기억도 한몫했지만 제왕은 이른바 ‘가오’가 다르지 않은가.

강이야말로 자연의 본모습이며 우리는 그저 거기에 깃들여 사는 존재다,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무지몽매들이 들고일어났다. 그는 당연히 듣지 않았다. 그는 거기에 22조라는, 아무리 들어도 감이 안 잡히는, 노동자 김씨가 하루 종일 일해서 버는 8만원보다 어마어마하게 높은 액수의 돈을 쏟아부었다. 그가 사랑하는 기계들이 총동원되고 동업자들이 달려들었다. 파고 부수고 공구리 비벼, 저 알아서 흐르던 강을 막고 또 막아 곳곳에 커다란 물그릇을 만들었고 이것으로써 가뭄과 홍수 대비는 끝났다는 큰소리를 그를 찍었거나 안 찍었거나 상관없이 국민들은 모두 들어야 했다.

그가 흔한 사람 하나였다면 강 옆에 매운탕집을 하거나 동네 목욕탕이나 하나 차려놓았을 터인데 그 나라 강줄기가 모두 뒤바뀐 게 제왕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그의 영토에서는 그 자리에만 오르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권능이 부여되었던 것이다.

재앙은 재앙에 의해서만 가려진다

제왕에게서 같은 인간의 공통점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혈선사는 체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존재에 대한 탐구로서 제왕을 두고 오랜 묵상을 했고 마침내 두 가지 추측을 내놓았다. 첫째로는 오래전 오리온 별자리에서 기계를 타고 날아온, 그러나 이 별 원주민 수준이 너무 낮은 탓에 공사 현장 데모 도로도 못 쓸 것 같아 ‘아, 별을 잘못 선택했어’ 한탄을 하다가 그 자취가 불분명해져버렸다는 泡契來人(포글래인) 후손으로 일단 짐작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용의주도한 품성대로 두 번째 가설도 내놓았는데, 만약 도래인이 아니라면 제왕의 전생은 궤짝에서 오래 묵은 돈뭉치 자체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제왕은 자신의 뜻한 바를 이루고 물러났다. 그리고 오래 가지 않아 심한 가뭄이 들었고 해갈되지 않기에 이르렀다. 물을 너무 훌륭히 가둬둔 바람에 정작 그 물이 필요한 곳은 말라 죽어가는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논바닥은 갈라졌고 작물은 그대로 화석이 되어갔다. 가둬둔 물은 썩어 벌레와 녹조가 창궐했으며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죽어나갔다. 이제는 트럭에 물을 싣고 논으로 옮기는, 전근대적인 방법을 써야 했다. 뒤이어 강 하구 어민들은 ’물고기가 살 수 없는 곳에서는 사람도 살 수 없다’고 구호를 외치며 데모를 시작했다. 그의 시도는 처절한 실패로 끝났다. 치수(治水)하겠다고 달려든 게 재앙이 된 것이다.

’한 번의 재앙은 그다음 재앙에 의해서만 가려진다’는 믿음으로 그는 요즘 방에 가만히 앉아 있다. 새로운 제왕이 등극해서도 사고와 역병 같은 재앙이 계속되고 있기에 그의 입장에서는 다행이었다.

한창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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