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고차 생활자’가 있다. 재학 중인 백인 학생들의 평균 가구 수입이 23만달러에 이른다는 듀크대의 주차장에 이 봉고차는 주차하고 있다. 봉고차 생활자의 첫 번째 원칙은 “봉고차 거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였고, 두 번째 원칙도 “봉고차 거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였다. 어느 날 창작 강의 시간에 봉고차 생활에 대한 글을 써서 읽었다. 강의실 사람들에게 비밀을 지켜달라 신신당부하지만 교수는 “좋은 글이야”라며 발표를 격려한다. 그는 잡지에 투고하고 유명인사가 된다. 봉고차 생활자 켄 일구나스는 유명세의 이유를 이렇게 분석한다. “우리는 대침체의 한복판에 있었다.” 2009년의 일이었다. 그가 봉고차로 흘러든 것은 미국의 무자비한 금융업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일구나스는 (문학동네 펴냄)에서 봉고차 생활에 이르게 된 일을 풀어놓았다.
지긋지긋한 ‘빚’ 때문이었다. 그냥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그는 학교를 졸업할 무렵 3만2천달러의 빚을 지고 있었다. 대학 생활 중에도 온갖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빚은 늘어만 갔다. 빚 압박에 탈모, 틱장애까지 겪었다. 그래도 학교를 졸업하면 빚을 갚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좋은 대학의 역사학과 영문학 학사를 갖고 있었고 몇 차례의 인턴, 오랜 아르바이트 경력을 지녔으니 “나를 채용하고 싶어 하지 않는 고용주가 어디 있겠어?”라고 생각했다. 캠퍼스 신문에서 영화평론을 쓰고 에디터로 일해서 “글솜씨만큼은 어느 정도 자신 있었”다. 전국 25개 신문사의 유급 인턴 자리에 지원했는데 모두 낙방하고 만다.
일구나스는 학위로 들어갈 수 있는 직장을 잡지 못한 채 알래스카 콜드풋에서 여관을 청소하고 주방보조를 하며, 그곳에서 가까운 게이츠오브더아크틱 국립공원에서 산간지역관리원으로 일하며 처절하게 빚을 갚았다. 뉴욕주의 집으로 돌아갈 때는 비행기 삯이 아까워 한 달간 히치하이킹을 한다. 그는 이 빚이 무자비한 소비생활에서 연유한다고 깨닫는다. “나라 전체가 빚더미에 깔려 있었다. 일주일에 40시간씩 근무하고, 블랙프라이데이에 전사처럼 월마트로 돌진하”는 것이 전형적인 미국인의 모습이다. 환경도 한몫한다. “누군가를 컨트리클럽에 데려다놓으면 그는 갑자기 요트가 필요하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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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을 다 갚자 그는 대학원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든다. 목표는 빚을 지지 않고 대학원을 마치는 것으로 정한다. 알래스카에서 지내며 소로의 삶에 반한 터였다(책 제목에 ‘월든’이 있는 이유다). 소로가 말한 “철길 옆에 놓인 가로 1.8미터, 세로 0.9미터짜리 상자”를 떠올리며 “반드시 더 크고 호화로운 상자를 얻기 위해 돈을 빌리고 자유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듀크대 대학원의 합격 통보를 받자 그는 ‘상자’로 봉고차를 떠올린다. 학비는 가장 싼 방법을 찾고 생물학 연구소 실험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생활비로 직접 음식을 해먹으며 봉고차 생활자가 된다. 구질구질하고 냄새나는 이야기도 더 있다.
빚을 졌기 때문에 월든의 삶과 미국 소비주의에 눈을 뜬 것은 아이러니하다. 영어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빼면 일구나스의 처절함은 한국 대학생들과 비슷하다. 도대체 가망도 없는 돈을 왜 수만달러씩 대출을 해주는가, 하는 자본의 음모는 2009년 금융위기를 겪은 뒤인 2015년 한국에서 더 교활하다. 한국판 이 보고 싶어졌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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