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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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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가지 할머니의 마지막 감자떡

<나이떡>
2월 초하루 머슴날, 허리 꼬부라진 할머니가 연신 큰길을 바라보며 빚는 떡
등록 2015-03-28 15:20 수정 2020-05-03 04:27

정월은 설날 세배를 다니고 보름에 놀고 이런저런 핑계로 2월 초하루까지는 꼬박 놀기가 일쑤입니다. 농번기가 시작되는 2월 초하루에 농부들은 지게 발목을 붙잡고 운다고 합니다. 2월 초하루를 머슴날이라 하는데, 이날 자기 나이 수만큼 쌀을 한 숟가락씩 모아서 송편을 빚어 ‘나이떡’을 먹습니다.
한바가지 할머니네는 할아버지와 둘이 사는데, 2월 초하룻날이면 떡을 아주 많이 합니다. 아들딸 9남매를 두었는데 딸들은 시집갔고 아들들은 농사짓기 싫다고 다 도시로 가버렸습니다. 논농사나 다른 농사는 다 도지를 주었지만 가족이 좋아하는 감자농사는 할머니가 손수 지으십니다.

전순예

전순예

한바가지 할머니는 연신 큰길 쪽을 바라보며 아들·딸·손주 나이 수대로 쌀을 떠서 떡을 합니다. 자기가 농사한 마지막 감자떡을 해먹는 날이라며 다들 모이라고 미리미리 일러두었습니다. 큰아들이 좋아하는 밤떡도 만들고 작은아들이 좋아하는 콩떡도 만들고 손주가 좋아하는 팥떡도 만듭니다. 특히 감자떡은 아주 정성 들여 만듭니다. 무시래기를 삶아 얼큰하게 무쳐 소를 장만하고, 김치도 곱게 다져 넣고 무 긁어 넣고 양배추도 볶아 넣어 아주 매콤하게 준비합니다. 감자떡 반죽은 아들딸들이 도착할 시간에 맞춰 맨 나중에 합니다. 곱고 소록소록 아주 사랑스러운 감자가루를 함지박에 담아놓고 물을 팔팔 끓여서 가운데를 파고 물을 부으면서 주걱으로 빨리빨리 저어 섞어 익반죽을 합니다. 익반죽을 해놓고 시간이 너무 지나면 늘어져 못 쓰게 됩니다. 쌀 송편은 한 김 나가야 맛있지만 감자떡은 뜨거울 때 먹어야 맛있습니다. 감자떡을 따뜻할 때 먹으려고 쌀떡을 내놓고 먹는다고 합니다. 세상에 어떤 떡이 얼큰하고 매콤한 감자떡보다 더 맛있을까요.

일을 돕지도 않는 할아버지가 감자떡도 빨리 해서 쪄놓으라고 성화를 부립니다. 못생기게 빚었다고 타박합니다. 참다못한 할머니가 이제 그 나이가 됐으면 ‘깨갱’ 하고 꼬리를 내릴 때도 되었건만 어찌 그리 젊을 때와 똑같이 잔소리를 늘어놓소! 한바탕 싸움을 하고야 조용해졌습니다.

한바가지 할머니는 일찍이 허리가 꼬부라져 한 바가지밖에 못 들고 다녀서 동네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입니다. 처음에는 뒤에서 쑥덕쑥덕 불렀는데 지금은 대놓고 한바가지 할머니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꼬부리고 한참을 일하다 ‘휴우∼’ 하고 허리를 펴고 한 번 일어섰다가는 또 꼬부리고 일합니다.

감자가루 만드는 일은 쉽지가 않습니다. 감자 캘 때쯤 비가 많이 오면 감자가 많이 썩습니다. 한바가지 할머니는 비를 맞으며 감자를 캐고 큰 항아리를 집에서 뚝 떨어진 도랑둑에 여러 개 세워놓고 한쪽이 썩은 감자를 버리지 않고 흙을 깨끗이 씻어 항아리에 담아 썩힙니다. 고구마는 썩으면 못 먹지만 감자만은 썩어도 먹을 수 있습니다. 잔챙이 감자도 한 항아리 썩힙니다. 좋은 감자가루를 만들려고 멀쩡한 감자도 한 항아리 썩힙니다. 이렇게 만들면 본래 썩은 감자보다 더 하얗고 고운 가루가 나옵니다. 쉬슬지 않게 비료포대 종이로 덮고 고무줄로 꽁꽁 묶고 뚜껑을 덮습니다.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한여름이 지나고 추석이 가까워 서늘한 바람이 불면 좋은 날을 골라 아침 일찍부터 거릅니다. 냄새가 너무 고약해서 거르는 일은 누구보고 도와달라는 말도 못합니다. 할머니 혼자 똥냄새가 나는 항아리에서 썩은 감자를 퍼서 어레미에 대고 두 손으로 주물러 거르고 나중에는 고운체로 거릅니다. 벌판이 감자가루 그릇으로 가득합니다. 씻고 또 씻어도 할머니 손에 밴 쿠리쿠리한 냄새는 며칠을 갑니다. 이렇게 거른 감자가루는 하루에 다섯 번씩 물을 따라내고 밑에까지 휘저어 가라앉은 앙금을 풀고 새 물을 부어 일주일을 우려냅니다. 딴딴하게 가라앉은 녹말가루를 휘저어 최종적으로 가장 큰 그릇에 물을 따라 부으며 밑에 가라앉은 모래를 거르고 한밤을 자고 나면 녹말이 아주 딱딱하게 가라앉아 있습니다. 물을 바짝 따라내고 그 위에 보자기를 덮고 위에 마른 천을 올려 물기를 완전히 뺀 다음 큰 녹말 덩어리를 뚝뚝 뜯어 발 위에 광목 보자기를 깔고 널어 말립니다. 말리면서 녹말 덩어리를 작게 부숩니다. 다 마르면 손으로 비벼 고운체로 쳐서 뽀드득 소리가 나는 윤기 나는 감자가루를 만듭니다.

한바가지 할머니는 ‘휴우’ 꼬부라진 허리를 펴느라 수없이 일어섰다 앉았다 합니다. 이제는 한 바가지 들기도 힘에 겹습니다. 한바가지 할머니는 결심합니다. 올해로 마지막 농사라고….

전순예 1945년생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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