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장(이장)님과 반장님들이 어두니골 강변에 모여 장날인데 장에 가지 않고 큰 가마솥을 걸고 무언가 준비하고 있습니다. 장에 가는 사람마다 소리쳐 불러 이야기하고 자기네들끼리 많이 웃습니다.
“여보게들 백사를 한 마리 잡았다네. 내일 백사탕을 끓이려고 하니 약재 한 가지씩 가지고 아침 일찍 오시게나. 가장 귀한 약재를 가져오는 사람한테는 백사탕을 제일 많이 줄 터이니 집집마다 집 안에 있는 약재 한 가지씩 꼭 가지고 오라고 얘기 좀 해주게나.”
그때는 겨울이 무척 추웠습니다. 입성도 변변치 않은 때여서 겨울이면 감기를 달고 지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노인들은 천식이 도져 자지러질 듯이 기침을 했습니다. 거기다 혼자 사는 노인이 몇 명 있어서 겨울이면 맘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병원을 간다거나 약 먹을 형편도 안 돼서 겨울은 위험한 계절이었습니다.
구장님과 각 동네 반장님들이 모여 어떻게 하면 온 동네가 감기 없는 겨울을 보낼까 대책회의를 했습니다. 우선 감기에 걸렸을 때 어떻게 하는지부터 각자 이야기합니다.
꿀물을 팔팔 끓여 먹는 집도 있고 인동덩굴에 차조기와 꽈리·밤·대추 등 여러 가지 약재를 삶아 먹는 집도 있는데 그중에서 인동덩굴과 차조기가 감기에 가장 잘 듣는다고 이야기들 합니다. 흰 눈 속에서 파란 잎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인동덩굴은 감기에 특효약으로 꼽습니다.
모두가 이런저런 얘기를 하더니 그러지 말고 올겨울은 온 동네가 감기약과 보약을 겸해 함께 만들어 먹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집집마다 무엇이든 약재 한 가지씩은 다 있을 터이니 약재를 모아서 삶자고 합니다. 하지만 약재를 거둬들이는 것도 어렵고 어디서 누가 삶을지가 문제입니다. 그러다보면 시간이 많이 걸려 겨울이 지나가고 말겠습니다. 이야기 끝에 장날 어두니골 강변에서 지나가는 장꾼들한테 얘기하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뇌운리 본말 반장인 광덕씨가 막 웃으면서 하는 말이 우리 백사를 한 마리 잡았다고 소문을 내자고 합니다. 어두니골에는 백사가 살고 있다는 소문이 있으니 사람들이 곧이들을 것이고, 백사는 죽는 사람도 살린다는 말이 있으니 쉽게 약재를 모아서 보약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강에 큰물이 나갈 때 떠내려가다 여기저기 걸린 나무를 주워 황닥불을 피우고 종일 산지슬(산기슭)로 돌아다니면서 눈 속에 묻힌 인동덩굴을 베어 날라다 가마솥에 끓입니다. 장에 갔다 일찍 오는 사람들도 나무를 주워 모아 산더미처럼 나무가 쌓였습니다. 인동덩굴을 먼저 삶아 물을 내놓고, 내일 가져오는 약재가 많을 터이니 각종 약재를 넣어 삶기로 합니다.
다음날, 생전 남 줄 줄 모르고 얻어만 먹던 굳은배기로 소문난 약초꾼인 최씨도 영지버섯 한 다래끼와 물초롱을 들고 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큰 호박을 가져오고 말려두었던 도라지도 가져오고 묻어두었던 더덕도 가져오고 오미자도 가져오고 대추도 가져왔습니다. 집집마다 매달아두었던 차조기와 엄나무, 오가피 등 많은 약재를 넣고 한 가마솥 뻑뻑하게 달입니다.
약재가 없는 사람은 강냉이도 가져왔습니다. 고구마와 감자도 가져왔습니다. 사그라지는 황닥불에 고구마와 감자를 묻어놓고 다른 불을 피우고 놀다보면 고구마와 감자가 잘 익었습니다. 작은 솥단지를 내다 걸고 마른 강냉이도 삶습니다.
“개뿔 백사는 무슨 백사.” 최씨가 갑자기 소리칩니다. “풀떼기만 삶으면서 사기꾼 같은 놈들, 내 아까운 영지 내놔라.” “미안하네. 너무 과한 농담을 했네.” 최씨는 자기 영지를 건져간다고 막무가냅니다. 한쪽에서는 말리는 동안 구장님은 영지를 최대한 많이 우려내려고 불을 많이 지펴 세게 펄펄 끓입니다. 최씨는 끓는 가마솥을 막대기로 휘저으며 영지를 건져 초롱에 담고 여러 가지 달인 약물을 담아 가지고 휭하니 가버렸습니다.
끓을 만큼 끓었으니 불을 멈추고 식힙니다. 큰 통나무 함지에 죽대를 올리고 삼베 자루에 약재를 퍼담아 자루 주둥이에 나무 막대기를 휘감아 꾹꾹 눌러 짜서 다른 그릇에 퍼담고 알뜰히 짜서 모두 다 똑같이 나누어 담습니다. 참석하지 못한 연로한 노인들 몫은 반장들이 챙깁니다. 먹어보고 효과가 좋으면 다시 한번 해먹자고 약속을 합니다. 모두 다 헤어져 갔지만 반장님과 구장님은 뒷설거지를 하느라고 어두워서야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전순예 1945년생 주부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뚜껑 열린 미 대선…‘핵심 넘버’ 226·219·270 알면 개표가 보인다
해리스로 기운 선거당일 승률 예측…“50:50 → 56:43”
“명태균씨 억울한 부분 있어 무료 변론 맡았다”
황룡사 터에 온전한 접시 3장 첩첩이…1300년 만에 세상 밖으로
이번 미 대선, 개표 빨라지지만…경합주 접전 땐 재검표 ‘복병’
트럼프 ‘인디애나·켄터키’, 해리스 ‘버몬트’ 승리로 첫발
회견 이틀 전 “개혁 완수” 고수한 윤...김건희 문제, 인적 쇄신 어디까지
‘보수’ 조선·중앙도 “윤 기자회견서 무조건 머리 숙여야”
미 대선 윤곽 6일 낮 나올 수도…끝까지 ‘우위 없는’ 초접전
백종원 더본코리아 상장 첫날 껑충…장 초반 60% 급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