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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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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콩비지밥 안 남았는가”

맛있는 것을 많이 싸와서는 촌스런 나물이나 먹고 가는 대화 할머니
등록 2014-12-13 14:44 수정 2020-05-03 04:27

대화에 사시는 박병수네 할머니가 작은아들과 같이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셨습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먹는 자반고등어와 돼지고기, 쇠고기, 과자도 많이 사오셨습니다. 가족들 옷과 양말도 사오셨습니다.
박병수 할아버지는 돌아가셔서 그냥 대화 할머니라고 부릅니다. 우리 할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셔서 할머니만 계십니다. 두 할머니는 친척이기도 하지만 이웃에 살면서 친구처럼 다정한 사이여서 대화 할머니는 이사 가서도 어두니골이 그립고 우리 어머니 음식이 늘 먹고 싶다고 놀러오시곤 합니다.

김송은

김송은

사람들은 대개 봄을 타 봄에 밥맛이 없다든가 여름을 탄다든가 하는데 대화 할머니는 겨울에 밥맛이 없다고 합니다. 대화 할머니가 오시면 묵은 나물도 삶고 매달아놓은 시래기도 물렁하게 삶습니다. 대화 할머니는 그렇게 맛있는 것을 많이 싸들고 와서 오랫동안 묵으면서 아주 촌스런 나물 반찬이나 시래기, 두부나 뭐 그런 것을 드시고 가십니다. 어머니보고 자네 손길이 닿으면 무엇이나 구수하고 맛이 있다고 끼니때마다 칭찬하시며 많이 드십니다.

대화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밥은 콩비지밥입니다. 콩비지밥을 하자면 오후 내내 종종걸음을 쳐야 저녁을 먹을 수 있습니다.

큰 함지 위에 죽대를 올리고 맷돌을 깨끗이 씻어 올려놓고 미리 불려놓은 흰콩을 어머니와 마주 앉아 맷돌 손잡이를 잡고 돌리면서 맷돌 입구에 콩을 조금씩 수저로 떠넣어 곱게 갑니다. 맷돌 밑으로 콩 모양은 간데없고 묽고 하얀 죽같이 되어 뚝뚝 흘러 떨어지는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습니다. 한 손으로 맷돌을 돌리면서 떠넣는 것이 재미있을 것 같아 나도 해보고 싶었습니다. 어머니 몰래 수저를 감추어 가지고 있다 어머니가 떠넣기 전에 얼른 콩을 떠넣는다는 것이 어머니 수저와 부딪쳐 콩이 다 흩어져 혼나기도 하고 맷돌 입구에 콩을 넣는 것이 쉽지 않아 엉뚱하게 퍼 흩트리고 일만 더디게 한다고 야단맞으면서 합니다.

콩비지밥은 밥물 맞추기가 까다롭습니다. 맨 밑에 적두팥 탄 것을 깔고 위에 쌀을 씻어 안치고 그 위에 생콩 간 것으로 밥물을 맞춥니다. 생콩 간 것은 버글버글한 것이 물의 양이 짐작이 안 되지만 어머니는 어떻게 잘도 물을 맞춥니다. 보통 밥을 할 때는 솥에 물을 붓고 불을 때면서 쌀을 안치고 불을 잘 조절해 밥물이 넘치지 않도록 솥뚜껑을 한 번도 열지 않고 귀기울여 소리를 들어보고 밥을 하지만, 콩비지밥은 잘 넘치기 때문에 솥뚜껑을 열어놓고 잠시 동안 끓은 뒤에 뚜껑을 덮습니다.

대화 할머니는 아침 먹을 때면 어제 콩비지밥 안 남았는가, 넌지시 묻습니다. 남기는 했는데 다 식어서요, 하면 괜찮다고 하셔서 부랴부랴 화롯불에 데워서 드립니다. 다음부터는 아주 넉넉히 하여 끼니때마다 밥 위에 쪄서 드리면 부들부들한 것이 맛있다고 잘 드십니다.

대화 할머니는 이사 가기 전까지 우리 옆집에 사셨습니다. 뒷동산도 우리 산 옆의 산은 대화 박병수 할아버지의 산이고 우리 집 땅을 경계로 박병수 할아버지네 땅이어서 우리 할머니와 옆에서 농사짓고 살던 시절, 막상막하로 부지런해 서로 다투어 농사를 지었답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강변 따라 줄밤나무를 심고 박병수 할아버지네는 강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우리보다 더 많이 심으려고 산에도 심고 밭 가운데도 여기저기 심었다고 합니다. 뒷동산에는 산머루, 다래가 많았는데 어느 가을날 올머루를 서로 빼앗기지 않으려고 밤중에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관솔불을 켜들고 가 주루먹(짚으로 엮은 어깨에 메는 자루)으로 하나 따서 지고 할머니는 다래끼로 이고 왔답니다. 산에 있는 것은 내 집에 갖다놔야 내 것이 되기 때문이라면서요. 다음날 박병수 할아버지네가 아침 일찍 일어나 할머니와 같이 갔는데 언놈이 밤새 따가고 없더랍니다.

박병수 할아버지네 아버지가 대화에서 부자로 살았는데 돌아가시면서 모든 돈과 재산을 다 물려주고 가시어서 어두니골 토지를 그대로 두고 이사 가서 사십니다.

그때는 언제 난리가 날지 불안한 시기여서 곡간 안 쌀독에는 3년 묵은 곡식들이 많다고 했습니다. 난리가 나도 3년은 먹고살 만큼 먹고사는 것이 걱정이 없는데, 대화 할머니는 입맛이 없고 늘 어두니골에서 먹던 음식이 그리워 겨울마다 오셔서 우리 할머니와 한겨울을 나다시피 하고 가시곤 했습니다.

전순예 1945년생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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