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내 20대는 늘 연애에 빠져 있었다. 어느 예비역에게 반해 대학 시절 내내 과 CC를 했었고, 그에게 차이고는 한 달도 안 되어 보란 듯이 네 살 아래 스무 살 꼬맹이를 잠깐 만났다. 그다음에는 덩치는 좋지만 머리숱이 없던 남자를 만났고, 그 이후에는 추리닝 성애자 등등을 만났다. 술자리도 아닌데 이게 뭐 자랑이라고 뭣도 아닌 남성 편력을 늘어놓느냐 하면, 이 얘기를 하기 위해서다.
여러 번의 이별을 겪으며, 내게 스스로 수없이 되물은 질문이 있었다. 그 질문은 바로 “내가 다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남자 없이는 하루도 못 사는 양 지조 없고 줄기차게 환승해놓고 이 무슨 개소리냐 한대도 할 말은 없지만, 진짜 그랬고 그렇다. 길게는 4년, 짧게는 한 달을 만난 그 모든 연애에서 나는 늘 진심이었다. 그 사람만이 내 운명의 상대고, 그와의 오랜 삶을 상상하고 꿈꿨다. 그런데 이게 뭐 로또도 아니고, 번번이 꽝이었다. 마치 영원인 것처럼 속삭이던 사랑의 말들도, 눈을 맞추고 진지하게 이야기한 미래들도 그 모두가 억울하고 잔인하게 한낱 거짓이 되고 말았다. 괜찮다고, 이 모든 게 경험이고 후회 없이 사랑했으니 됐다고, 아무리 좋게 포장하려 해도 술 먹은 어느 날이면 눈물과 함께 쌍욕이 방언처럼 터져나왔다. 개놈의 시키들.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들에게 속고 싶지도 배신당하고 싶지도 않았다.
또 연애가 여러 번 이어지다보니 나중에는 데이트를 하면서 실소가 터진 적도 있었다. 구남친과 와보았던 그 장소들, 먹었던 음식들, 특별하고 유일할 것만 같던 그 순간들은 순진했던 나를 비웃듯 이후의 남친들과도 얼마든지 쉽게 반복되었다. 특별한 것은 결국 없었다. 아련하게 혹은 더럽게 떠오르는 옛 기억들 때문에 아름다울 순간에도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의 남자친구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모두 믿지 못했다. 사랑을 고백하는 그의 떨리는 목소리도 금세 질린다는 말투로 바뀔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아픈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영화를 보고 그와 이어폰을 사이좋게 나눠 끼고 청계천을 걸었다. 가을의 차가운 공기가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너무나 익숙했다. 그랬다. 아름다운 그 순간에 나는 구남친들과의 비슷했던 데이트가 떠올랐다. 그 모든 기억 속에서 나는 행복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점점 잊혀졌고 어느새 그 기억들 없이도 잘 산다. 아마 행복한 지금도 얼마든지 쉽게 변하고 또 잊혀질 수 있고, 그래도 나는 곧 괜찮을 것이다. 씁쓸하게 자조하던 그때, 그가 뜬금없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네 지나간 기억들까지 모두 사랑할 수 있다고, 자신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고. 괜찮다고. 그리고 나는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카메라를 멘 중국인들 천지인 주말의 청계천에서.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이 ‘답정너’ 질문의 답은 단 하나다. 이별을 반복하며 닳고 닳은 여자가 되어버린 기분을 느껴도, 세련된 이별 노래처럼 이제는 모두 지겹다고 자조해보아도 우리는 안다. 그 질문이 이제 사랑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기에’ 생기는 물음임을. 또다시 거짓이 되고 씁쓸한 기억만이 남을지라도 그래도 좋다고, 다시 호구처럼 믿고 싶은 이 순간, 이미 사랑은 시작되었다.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
구여친북스 대표 @9loverbooks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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