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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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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이 사랑하는 게 뭐 어때서

서럽고 아프면 헤어지면 될 테지만 사랑하기에 그럴 수 없는 ‘을의 연애’를 하는 모든 이에게 바치는 정신승리법
등록 2015-07-18 21:11 수정 2020-05-03 04:28

“싸우고 싶을 때도 있는데 왜 참고 넘어가는 줄 알아? 내가 져주지 않으면 헤어지게 될 것 같으니까. 그래서 나는 언제나 져줄 수밖에 없어. 사실은 그 느낌이 얼마나 싫은 줄 알아? 내가 져주지 않으면 우리가 헤어지게 될 거라는 그 느낌.“( 12회)
나온 지 몇 년이나 된 드라마를 보다가, 어느 말끔한 남자 배우가 아프게 자조하던 이 장면에서 갑작스레 눈물이 마구 쏟아져나왔다. 남자친구에게 주말 데이트를 일방적으로 취소당하면서도 화 한 번 내지 못했던 그 주말 저녁, 나는 확신했다. 이제 나는 이 연애의 완벽한 을이 되었다는 것을. 서럽고 아프면 헤어지면 될 것을, 사랑하기에 그렇게는 할 수 없다. 이제는 지는 것에 너무도 익숙해져버린, 오늘도 을의 연애를 하는 나와 같은 이들을 위해 구질구질 슈퍼을인 내가 실제 효과를 보았던 몇 가지 정신승리 솔루션을 소개한다.

일러스트레이션 l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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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사람은 정말 바쁜 상황이라서 그렇다

그렇다. 그건 정말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나도 그가 얼마나 바쁘고 힘든지 안다. 물론 내게 뜨겁게 대시하던 연애 초반에도 마찬가지로 바쁘지 않았느냐는 반문은 꾹꾹 짓밟아 땅속에 묻어두자. 사람이 언제나 뜨거울 수는 없다. 사람은 누구나 바쁘면 여유가 없고, 또 어느 정도는 지치기도 한다. 그렇지 않아도 바쁘고 피곤한 그에게 나와의 연애가 휴식이 아니라 의무나 족쇄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따져묻거나,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그가 나 때문에 행복하길 바라니까 나는 더 노력할 것이다.

2. 그 사람은 솔직한 것뿐이다

지금처럼 솔직하게 피곤하다고, 다른 약속이 있다고 말해주는 것이 내게 거짓말을 하거나 억지로 꾸며내는 것보다 차라리 더 낫다. 그 정도는 쿨하게 이해해줄 수 있는 가까운 사이니까. 내게 솔직하게 그렇게 이야기해도 우리 사이가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의 증거라고 볼 수도 있다. 나를 우습게 보거나 하찮게 보는 것이었다면, 이토록 내게 솔직한 그 사람이 애초에 그렇게 말했거나 헤어졌겠지.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말하는 지금은 불안해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는 내게 솔직한 것일 뿐,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의 거절에 마음이 쓰려도 조금은 참을 수 있다.

3. 그래, 내가 더 많이 사랑하는 게 뭐 어때서

맞다. 나는 그와의 관계에서 을이다. 먼저 연락하는 것도, 만나고 싶어 안달하는 것도, 사랑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힘주어 하는 사람도 그가 아니라 나지만 괜찮다. 사랑을 받는 것만큼이나 사랑을 주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아니, 돈 몇 푼 줘도 갑으로 모시는 상황에, 더군다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인데 뭐 어떤가?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다. 더 사랑하고, 더 참아주는 사람, 더 감싸주는 사람이 내가 된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서러워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는 말이다. 사랑을 주는 것은 아주 가치 있는 일이고,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그 사람을 위해 지금 그 가치를 실천하고 있다. 그러니까 괜찮다.

“하루도 더 못해. 그래 내가 졌어. 에라 이 비겁한 남자야.” 아이유양은 을의 연애를 노래하며 이토록 화끈한 결론을 내려주었지만, 이건 우리한테는 너무나 어려운 결론이다. 슬프지만 그 사람의 사랑이 처음과는 다른 모양이라는 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을이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그 사람을 믿기에, 언젠가는 그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내 사랑을 알아주리라 믿는다. 아니면 뭐, 마는 거지. 손해를 계산하기보다 지금 내 사랑에 후회가 없는 것이 우리에겐 더 중요하다. 더 많이 사랑하기에 돌아설 수 없는, 약하지만 강한 을의 연애는 멋지다. 하얗게 불태우자. 뜨거운 을, 당신의 완전연소 연애를 응원한다.

저자·구여친북스 대표 @9lover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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