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 가는 길, H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가 지금 숨이 차오는 건 빠르게 뛰는 이유만은 아니’라고, ‘너를 보게 되고 그리움이 끝나기에’ 하며 평소 좋아하던 절절한 발라드가 혀끝에 맴돌기도 했다. 가장 로맨틱해지는 크리스마스이브날, 그는 내내 그리워하던 그녀를 만나기 위해 서울에서 부산까지 단숨에 왔다. 품 안에는 그녀를 향한 러브레터도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물론 단 하나 H가 간과한 것이 있었지만, 곧 그는 벅찬 마음을 고백할 것이기에 그것은 문제도 아니라 생각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예상되듯, 그 고백은 처절하게 끝을 맺었다. H가 가벼이 넘겨버린 그 하나는, 그와 그녀는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으며 또한 그는 그녀와 사전에 약속을 잡지 않았다는 점이었다(그렇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이 ‘시ㅋ망ㅋ’한(완전히 망한) 고백 (시도) 사건을 듣고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내게 H는 말했다.
일러스트레이션/ long
“그래도, 나는 좋았어. 내가 가고 싶어서, 고백하고 싶어서 갔으니까. 괜찮아.”
그 말은 복잡한 연애에 속 끓이던 내 머릿속을 띵 울렸다. 그것은 연애의 맹점 그 자체였다. 바로 “내가 하고 싶어서, 내가 해주고 싶어서”에서 시작되는 어긋남이다. ‘내가 더 해주겠다는데, 뭐가 또 문제’냐 하면, 연애는 서로 철저하게 ‘합의’되고, 충분하게 ‘교류’된 감정 없이는 이루어지기도, 지속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내가 해주고 싶은 것 말고, 상대가 바라는 것”을 해주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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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가 시작되지 않거나, 혹은 틀어지더라도 “내가 하고 싶어서” 밀어붙인 사랑의 방식은 나 혼자만의 만족이고 낭만일 뿐, 어쩌면 상대에게는 부담이자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나름의 사랑과 노력으로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을 더 괴롭게 만들곤 한다. 그러고는 혼자 자조하고 괴로워한다. ‘나는 열심히 사랑했는데, 나는 그를 위해 이렇게도 저렇게도 노력했는데 왜 그는 내 성의를 몰라줄까? 그는 왜 내게 그만큼 해주지 않을까?’ 안타깝지만, 상대는 당신이 ‘해주고 싶어서 해준 그것’의 고마움보다 ‘그만큼 내게도 해달라는 당신의 무언(혹은 유언)의 요구’에 관한 부담이 더 클지 모른다. 당신이 더 많이 노력하고 더 주었거나 어쨌거나, 그것 역시 당신이 ‘하고 싶어서’였음을 잊지 말자. 그런 고로, 그동안 내가 쏟은 노력에 관해 억울해하지도 후회하지도 말라는 거다. 사랑하며 늘 동등한 대가를 바라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그 사랑은 행복할 수 없다. 상대방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것, 그것이 우리가 시작한 그 사랑의 본질이 아니었는가.
첫눈에 반해 ‘뿅!’ 시작된 사랑이라 해도 그 관계를 지속시키는 노력과 지혜가 없다면 그 연애는 결코 순조로울 수 없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하고 싶은 대로 말고, 상대가 받고 싶은 형태로 사랑하려 노력해보자. 당신과 상대의 원하는 바가 일치한다면 가장 좋겠지만, 인생 그렇게 쉽지 않다. 그런 거는 우리에게 있을 수가 없다. 물론 이런 사랑의 노력을 기울이다보면 하루에도 열두 번씩 욱할 수 있으며, 내가 예수냐 부처냐 염병, 어디까지 해주란 거냐 하며 폭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원래 사랑은 그만큼 어렵고, 연애는 그만큼 까탈스러운 것을. 거래처랑 거래 틀 때도, 거래처 입맛 하나하나 맞춰주는 판에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내가 그만큼 노력 못할 건 또 뭐가 있겠나.
H의 넘치는 사랑도, 벅찬 낭만도 모두 잘못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그가 사랑하는 그녀가 바라는 모양으로 다가왔더라면 그 결말도 더 아름다웠을 것이다. 결국 내가 행복하기 위해 사랑도 하는 거라지만, 원래 그 ‘사랑’ 자체가 철저히 이타적 본성을 가진 것임을 기억해야겠다. 당신의 그 노력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것. 그러니 억울해 말고, 그만큼 당신에게 충분히 가치 있는 일임을 확신하자. 분명 빡칠 테지만, 당신의 한층 더 깊어질 사랑에 응원을 보낸다.
구여친북스 대표· 저자 @9loverbooks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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