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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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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는 없다, 필승 로맨스!

나이 이유로 ‘여성’으로서의 존재감 잃어버릴 수 없어
등록 2015-01-09 17:16 수정 2020-05-03 04:27

남자들은 정말 어린 여자를 좋아할까? 너무 뻔한 질문이 아니냐고? 그럼 이건 어떨까? 어린 여자와 예쁜 여자 중, 남자들은 어느 쪽을 더 좋아할까? 예쁘지도 어리지도 않은 내가 쓸데없이 이런 궁금증을 갖게 된 이유는 한 지인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평생 어딜 가든 주목받고 누구에게나 환영받아온 분, 그분은 올해 40대 중반을 가열차게 지나고 있으며 가정도 꾸리신 지 오래다. 내가 보기에 이미 누릴 것은 다 누려본 것 같은 그분이 어느 날 내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일러스트레이션/ long

일러스트레이션/ long

“언제부턴가, 남자들이 나를 여자로 보지 않더라. 외모는 내가 훨씬 나은 것 같은데도 그냥 나이가 어린 애한테 환호하더라고. 지금은 괜찮은데, 한동안은 아무리 안 예뻐도 그냥 어린 여자들만 보면 막 화가 나고 미웠어.”

너무 지나친 욕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누구는 평생 한 번도 여신 소리를 못 듣고 사는데, 이제 가정도 있는데 현역에서 좀 떠나셔도 되지 않나 싶기도 했고. 그런데 곰곰이 그 마음을 생각해보니 이게 그냥 단순히 남자를 놓고 경쟁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예쁘냐, 안 예쁘냐를 떠나서, 내가 더 이상 ‘여성’의 존재가 아닌 상황. 그 상황을 상상해보니 마치 ‘엄마’도 여자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고 되게 미안하고 황망해졌을 때 같았다. 여자는 육십이 되어도, 팔십이 되어도 그냥 여자다. 엄마도, 이모도, 우리 할머니도 다 겪었을 거다. 헤어짐이 아쉬워 추운 날 지하철 역사에서 몇십 분씩 시간을 보내던 그날들, 몇 번이고 다짐했던 둘만의 작은 약속, 영원과도 같은 그 순간을 그녀들도 지나왔을 것이다. 너무나 중요한 역할과 책임들을 맡으며 당연한 듯 포기하며 살았지만, 어느 날 문득 그녀들도 몸서리치게 그날들이 그리울 것이다. 그녀들도 여자였으며, 지금도 여자이니까.

내가 다시는 누군가에게 설레는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 내 인생에 더 이상 로맨스나 연애는 없다는 것. 여태껏 나를 있게 한 ‘여자’라는 달콤한 포장이 어느새 녹아져 사라져버렸음을 느끼게 되는 그 어느 날이 온다면, 예쁘게 입고 나온 날에 당연한 듯 누리던 시선을 다시는 경험할 수 없게 된다면, 서로를 애달아하며 바라보는 시간이 이제는 없다면, 대비도 준비도 할 수 없이 찾아올 그날에 나는 어떤 생각을 하며 버텨야 할까. 나이 들었으니 이제 여자로서 ‘현역’을 떠나도 되지 않겠느냐는 그 생각은, 한 사람에게 그동안 살아온 자기 자신을 버리라고, 나이 먹었으니까 이제 당신은 당신으로 살지 말라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이렇게나 잔인한 사고를 우리는 참 단순하고 쉽게 하고 만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설문을 해봤다. 여신급 40대 여성과 완전 평범 20대 여성 중, 어느 쪽에 매력을 느끼느냐는 질문에 1.5:8.5 정도의 비율로 평범 20대녀가 우세였다. 미녀 여배우를 예로 들었음에도, 결과는 같았다. 역시 예쁜 ×보다 어린 ×가 더 무섭다는 말은 진리였나. 에라이, 남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당당하고 주체적으로 여성의 삶을 살겠다며 다짐해봐도, 여자로서 매력을 막 터뜨리고 내뿜는 상대는 또 남자니까 이건 뭐 총체적 난국.

하지만 혹시나 어딘가에 한 명은 있겠지. 매년 생겨나는 스무 살들보다 지금의 나를 더 여자로 보아줄 한 사람이 있기는 있으리라. (없으면 세뇌시켜 만들어내리라.) 무수한 남자들의 시선을 저 스물 몇 살짜리 애가 독차지할지라도, 내게 시선을 주는 그 한 사람. 그런 한결같은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오늘도, 몇십 년 뒤에도 늘 여자로 달달하고 수줍게 그렇게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필승 로맨스. 그 강을 건너지 말라고 해주는 나만의 임을 찾아 평생 ‘여자’로 살고야 말겠다.

구여친북스 대표 @9lover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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