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10일 나도 거리에 있었다. 6월 민주항쟁이 시작된 날이다. 시위 구호는 ‘호헌철폐 독재타도’, 그리고 대통령 직선제 쟁취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당시 5공화국 헌법은 대통령 간선제였다. 대통령을 5천 명 이상으로 구성된 대통령 선거인단에서 뽑도록 돼 있었다.
그런데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이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하려고 ‘호헌’(護憲)을 선언했다. 이에 맞서 야당과 운동세력, 시민들이 들고일어나면서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났다. 그 결과 1987년 가을에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이 개정됐고, 이후 5년마다 선거를 거쳐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로 대통령이 교체돼왔다.
<font size="3"><font color="#C21A8D">대통령이 불안하다면?</font></font>
이제는 대통령을 직선으로 뽑든, 간선으로 뽑든 간에 ‘대통령제’ 자체에 회의가 든다. 흔히 대통령제의 장점을 ‘안정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면, 대통령제가 과연 안정적인가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간단하게 생각해보자. 대통령 한 사람에게 많은 권한이 집중됐는데, 대통령이 불안정하다면 어떻게 될까? 불안정하다는 것은 정책적으로 불안정할 수도 있고, 감성·정신적으로 불안정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물론 대통령이 되려면 많은 검증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임기 5년의 대통령이 집권 기간 동안 ‘안정’적일 것이란 보장은 전혀 없다.
예전에 어느 세미나 자리에서 어떤 학자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국의 대통령제에는 치명적이 결함이 있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헌법 제71조에는 “대통령이 궐위되거나 사고로 인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에는 국무총리, 법률이 정한 국무위원의 순서로 그 권한을 대행한다”고 돼 있는데, 사망·사고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앓고 있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에 아찔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좌지우지할 만큼 강력한 권한을 지닌 대통령에게 정신적 문제가 있을 경우 어떻게 하느냐? 이 질문에 대해 대한민국 헌법 안에는 답이 없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대통령은 입법부로부터도 독립해 임기를 보장받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헌법이나 법률을 위반했을 경우 국회가 탄핵소추를 할 수 있지만,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하고, 재판의 속성상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현재와 같은 방식의 대통령제는 매우 불안한 제도다.
<font size="3"><font color="#C21A8D">의원내각제가 ‘큰 사고’는 안 친다</font></font>대통령제가 아닌 의원내각제를 택한 나라와 비교해보면, 어느 쪽이 ‘안정’적일까? 의원내각제를 택한 국가에서는 국회의원 선거 결과에 따라 다수파가 총리를 맡게 된다. 한 정당이 단독 집권하는 것이 불가능하면 여러 정당이 연합해 연립정부를 구성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시간이 오래 걸려 ‘권력 공백’이 나타날 수 있다. 이런 문제가 의원내각제의 단점으로 지적된다.
실제 의원내각제 국가에서 권력 공백이 나타난 사례가 있다. 최근에는 2010~2011년 벨기에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 벨기에는 2010년 6월 총선이 끝난 뒤 정당들 간의 연립정부 구성 협상이 실패하면서 540일 동안 정부 구성이 지연됐다. 그러면서 재정적자 감축 대책 같은 중요한 정책이 수립되지 못해 국가신용등급이 하향 조정됐다. 그러나 이 기간에 벨기에의 정부 기능이 정지됐던 것은 아니다. 전임 총리를 중심으로 일종의 관리내각이 운영되면서 대내외적으로 필요한 일들을 처리했다. 외교적으로도 문제는 없었다. 우리나라 언론은 ‘무정부’라고 떠들었지만, 벨기에에서는 정부 기능이 정상적으로 수행되고 있었다. 단지 새로운 정책을 추진하지 못했을 뿐이다. 최소한 수백 명의 생명이 바다 속으로 사라져가는데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한 대한민국 정부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벨기에는 지방분권이 잘돼 있기 때문에 시민 생활에 큰 불편이 초래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벨기에보다 심각한 것은 대한민국이다. 대통령이 강력한 권한을 독점하고 있는데도, 국무총리 한 명 임명을 못해서 사퇴한 정홍원 총리를 유임시키겠다고 하는 마당이다. 세월호 참사 같은 엄청난 사고를 겪었는데 진상 규명도 제대로 못해내는 무능함을 보이고 있다. ‘소통’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워, 시민들은 어디에 가서 호소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font size="3"><font color="#C21A8D">1987년엔 현실적 답이었지만</font></font>대통령제는 ‘선출된 독재’가 될 우려가 있는 제도다. 실제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왕조시대의 ‘왕’과 같은 막강한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 삼권분립도 의미가 없다. 사실상 입법부·사법부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임기가 5년으로 제한돼 있어서 그렇지 ‘선출된 왕’이다. 아마 지금 박근혜 대통령은 스스로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사람이 바뀐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을 구조적 문제도 있다. 지금의 권력 구조는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단기적 정쟁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래서 시대적 과제가 정치 영역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기 힘들다. 포지티브를 하든 네거티브를 하든 눈앞의 권력만이 중요한 게 현실이다. 대통령 독식, 승자 독식의 권력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후변화 같은 생태위기,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불평등’은 정치의 중요한 주제가 되기 어렵다. 의원내각제에서는 연립정부 구성 과정에서 여러 정당의 정책이 섞여 들어갈 여지라도 있지만, 대통령제에서는 그것조차 안 된다.
이런 대통령제를 계속해야 할까? 1987년에는 대통령제가 현실적 답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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