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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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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는 이곳에 오지 않았다

예산군 비오톱 1등급 숲에 추진되는 쓰레기매립장, 군청은 ‘부적합’ 판정했지만 사업자 행정소송 제기…
쟁점은 ‘건강이나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지만 재판부나 변호사 현장에 온 적 없어
등록 2014-10-30 15:48 수정 2020-05-03 04:27

지난 10월16일 대전지방법원에 가서 재판을 방청한 뒤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예산·홍성환경운동연합 분들과 함께 무작정 길을 나섰다. 고개를 넘고 꼬불꼬불한 임도를 따라가니 정겹게 자리잡은 마을이 나온다.
“판사든 변호사든 이 마을에 온 적 없습니다.” 안내하는 마을 주민의 얘기다.
이곳은 충남 예산군 대술면 궐곡리 고새울 마을이다. 높은 산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산들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촌이다. 고사리가 많이 난다고 해서 ‘고새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삵이 사는 곳, 황새 방사하려던 곳

충남 예산군 대술면 궐곡리 쓰레기매립장 예정지 부지를 주민이 가리키고 있다. 하승수 제공

충남 예산군 대술면 궐곡리 쓰레기매립장 예정지 부지를 주민이 가리키고 있다. 하승수 제공

그런데 이 산촌마을이 3년째 쓰레기매립장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 ‘보광바이오텍’이라는 회사가 3만여 평 부지에 일반폐기물매립장을 설치하려고 하는 것이다. 지역 주민들이 반발하자, 예산군청은 사업자에게 사업계획이 ‘부적합’하다는 통보를 했다. 그러나 사업자는 예산군청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마을 주민들로서는 생사가 걸린 사건이다. 그냥 작은 쓰레기매립장이 아니다. 매립 용량이 132만㎥에 달한다. 지하를 깊이 파고 에어돔이라는 거대한 구조물을 설치해 쓰레기를 매립한다는 것이다.

마을을 가보니, 매립장을 설치하려는 곳은 우거진 숲이었다. 예산군에서 작성한 도시생태현황지도(비오톱지도)에 따르면 사업 부지의 90% 이상이 보전가치 1등급 지역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멸종위기 2등급 동물인 삵도 서식하는 곳이다.

마을 곳곳에는 ‘청정지역’ ‘친환경마을’ 같은 푯말이 보인다. 습지·논·숲과 마을이 어우러진 곳이다. 예산군은 이 부근에서 황새 방사 사업을 할 예정이다. 이런 곳에 거대한 폐기물매립장이 들어선다는 것 자체가 상상이 되지 않았다.

행정소송 담당 재판부가 이런 현장에 와보지 않았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아서 주민들에게 여러 번 물어보았다. ‘정말 현장검증이라도 오지 않았느냐’고 하니, 판사는 물론 예산군청을 대리한다는 군청 쪽 변호사도 현장에 온 적이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폐기물관리법상 이런 사건의 쟁점은 ‘쓰레기매립장이 사람의 건강이나 주변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지 여부’이다. 그런데 현장에 와보지도 않고 주변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도면과 사진으로 보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사람에 대해 서류와 사진만으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면접을 보는 것처럼, 환경 사건에 대해 재판을 하면서 현장에 와보지 않는다는 것은 기본이 안 된 일이다.

군청 쪽엔 ‘지면…’ 사업자 쪽엔 ‘이기더라도…’

마침 결혼을 한 집이 있어서 마을 주민들이 국수를 먹으러 모였다. 그 자리에 가니 마을 주민들이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고 있다.

안내를 해주신 주민이 지난 3년간 겪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 사업자가 이 폐기물매립장을 추진한 이후에 마을공동체가 파괴되고 있다고 했다. 마을 이장이 사업자 쪽에 서는 바람에 주민들이 이장을 해임하기 위한 투표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업자가 이장 투표에 영향을 미치려고 자기 쪽 사람들을 마을에 위장전입시키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마을 이장은 해임되고 새로운 이장을 뽑았다. 마을 주민들이 위장전입 건으로 사업자를 주민등록법 위반으로 고발했는데, 검찰은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고 한다.

법은 주민들의 편도 아니고, 정의의 편도 아니었다.

다시 오전에 방청했던 재판 장면이 떠올랐다. 그날 대전지방법원에서는 두 개의 일반폐기물매립장 행정소송 재판이 열렸다. 두 사건이 이어서 열리는데, 그날 법정에서 본 재판장의 재판 진행 태도는 정말 실망스러웠다.

예산군청을 대리하는 변호사에게 ‘이렇게 하다가 지면 어떻게 할 거냐’고 얘기하는가 하면, 사업자를 대리하는 변호사에게는 ‘이기더라도 주민들에게 뭔가를 좀 해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식의 얘기를 했다. 자신의 심증은 이미 사업자에게 기울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말로도 들렸다. ‘판사는 판결로 얘기한다’는 원칙조차 사라진 법정이었다.

이어진 다른 사건 재판에서도 현장검증을 요청하는 변호사에게 ‘(현장에) 간다고 해서 볼 수 있는 게 뭐겠느냐’는 식으로 말했다. 쓰레기매립장이 마을에 들어오게 생긴 주민들은 생사가 걸려 있다고 느끼는데, 재판부는 안이하기 짝이 없었다. 버스를 대절해서 방청을 간 주민들의 입에서는 탄식이 나왔다.

이런 법정이 예외적인 모습일까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해서 많은 사건이 진행되었다. 사업자는 탐욕스럽고 집요한데, 지방자치단체의 대응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주민들과 소통도 잘 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건이 법정으로 가면, 무성의한 재판부는 실정법 조항만 보려고 한다.

정의는 법전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존의 절박함에 걸린 현장에서 발견하는 진실 속에 있다. 그러나 현장에 가보려는 최소한의 성의도 보이지 않는 재판에서 어떤 정의가 실현될 수 있을까?

이날 대한민국의 사법에 대해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변호사 휴업을 한 뒤 8년 만에 가본 법정은 오히려 퇴행한 모습이었다. 물론 한 법정의 모습이 모든 것을 보여주는 건 아니겠지만, 이런 법정이 아주 예외적인 모습이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한때 떠들던 ‘국민을 위한 사법’은 어디로 갔을까? 사법부의 근본적인 성찰과 뼈를 깎아내는 쇄신이 필요하다.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생태운동가이자 ‘우연히’도 형제인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과 하승우 땡땡책협동조합 땡초의 칼럼을 격주로 연재할 예정입니다. 다음 1035호에서 ‘하승우의 오, 마을!’ 첫 회가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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