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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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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한다면 국민발의제도를

지금의 ‘권력 나눠먹기식’ 개헌 아니라, 시민들이 헌법 개정할

수 있고 원전 반대 투표할 수 있는 제도 포함한 개헌 해야
등록 2014-11-15 12:41 수정 2020-05-03 04:27

이번 국정감사에서 대한민국 원전과 관련해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졌다. 5년 전 경북 경주 월성원전에서는 발전에 쓰고 난 사용후 핵연료를 옮기다가 떨어뜨려 방사능이 심각하게 유출된 사고가 있었다. 한국수력원자력은 지금까지 이 사건을 은폐하고 있었는데, 이번 국정감사를 통해 은폐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또한 대한민국의 원전에서 삼중수소를 비롯해 막대한 양의 기체 및 액체 방사능 폐기물이 방출돼왔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한마디로 대한민국도 방사능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게 명백히 밝혀진 것이다.

자기 밥그릇 지키는 개헌 논의만

이쯤 되면 원전을 이대로 가동해도 되는지가 정치의 쟁점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정치권은 ‘어떻게 권력을 나눠먹을 것인가’ ‘자기 밥그릇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라는 논의로 급속하게 빨려들어가고 있다.

국민발의-국민투표는 원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절실하다. 강원도 삼척 원자력발전소 유치 찬반 주민투표 뒤 투표함을 개봉하고 있는 주민들. 투표 결과 반대가 84.97%로 나왔지만 정부는 법적 효력이 없다며 투표의 의미를 깎아내리고 있다. 박승화 기자

국민발의-국민투표는 원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절실하다. 강원도 삼척 원자력발전소 유치 찬반 주민투표 뒤 투표함을 개봉하고 있는 주민들. 투표 결과 반대가 84.97%로 나왔지만 정부는 법적 효력이 없다며 투표의 의미를 깎아내리고 있다. 박승화 기자

여당과 제1야당의 대표는 개헌을 언급하고 있다. 한마디로,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권력을 나눠먹을지 논의하자는 얘기다. 지난 10월30일 헌법재판소가 ‘현행 선거구제가 인구 편차를 3:1까지 허용하는 것이 헌법에 불합치한다’는 결정을 내린 것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국회의원들은 자기 지역구를 지키는 데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전국의 62개 선거구가 조정이 불가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호남에선 상대적으로 유권자 수가 적은 선거구가 많아서 헌법재판소의 결정대로라면 국회의원 정수가 줄어들게 생겼다. 그래서 야합의 가능성도 더 커졌다.

이런 식으로 가면, 개헌과 선거법 개정을 가지고 여당과 제1야당이 ‘거래’할 수도 있다. 선거법 개정에서 제1야당의 기득권을 어느 정도 보장하면서 여당의 장기 집권과 ‘권력 나눠먹기’가 용이한 형태로 개헌을 추진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것이 지금 나오고 있는 이른바 ‘분권형 대통령제’다.

분권형 대통령제에서 ‘분권’은 자기들끼리의 분권이다. 이들의 사고에는 시민들의 참여를 확대하고 시민들에게 권력을 돌려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 논의 과정에서도 시민들은 완전히 배제돼 있다. 원전처럼 절박한 문제도 배제돼 있다. 그래서 정치권 중심으로 이뤄지는 개헌 논의에 대해서는 부정적 의견이 많다. 같은 보수언론의 논설위원도 ‘노골적인 권력 나눠먹기’ 시도라고 평가하고 있다.

국민발의 조항 없는 헌법

만약 지금 정치권에서 논의되는 식으로 개헌이 이루어진다면 탈원전은 더 어려워질 것이다. 정치는 더욱 기득권화되고, 그렇게 되면 새로운 가치나 의제가 정치에서 다뤄지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의 시스템에서 이익을 얻고 있는 재벌이나 원전 마피아의 힘은 더욱 커질 것이다. 따라서 정치권 중심의 개헌을 해서는 안 된다. 개헌을 한다면 원전 같은 문제를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풀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

예를 들면 대한민국 헌법에는 국민발의에 관한 조항이 없다. 중요 정책에 대한 국민투표는 오로지 대통령만이 발의할 수 있다. 그것도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 안위에 관한 중요 정책”에 대해서만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어서, 이 조항의 해석을 둘러싸고 여러 번 논란이 있었다. 예를 들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대해 국민투표를 할 수 있는지, 원전 문제에 대해 국민투표를 할 수 있는지가 논란이 돼온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한-미 FTA나 원전 문제가 ‘국가 안위에 관한 중요 정책’이어서 국민투표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그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런 논란도 실익은 없다. 어차피 대통령이 하겠다고 마음먹지 않는 이상 국민투표는 못하기 때문이다.

헌법 개정과 관련해서도 시민들의 참여는 막혀 있다. 지금 헌법에서는 헌법개정안을 발의하는 것도 오로지 대통령과 국회만 할 수 있다. 시민들은 헌법개정안을 발의할 수도 없고, 의견을 제시할 통로도 없다. 한마디로 시민들의 직접 참여가 완전히 봉쇄돼 있는 것이다.

만약 헌법을 개정한다면 이런 부분부터 풀어야 한다. 스위스는 국민 10만 명이 서명하면 정책에 관한 국민투표를 실시해야 한다. 국민 10만 명이 서명하면 헌법개정안도 낼 수 있다. 이런 국민발의-국민투표는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필요하고, 원전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원전은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문제다. 원전으로 돈을 번 기업들, 그와 유착해온 정치인, 관료, 언론, 전문가가 너무 많다. 그래서 이 문제를 지금의 정치가 해결해주기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원전을 확대할 것인가, 아니면 탈원전을 할 것인가를 시민들에게 물어보고, 시민들이 결정하지 않으면 탈원전은 불가능하다.

시민들의 의사를 묻는 방법으로 선거에서 탈원전을 쟁점화해서 물어보는 것도 있다. 그러나 선거의 쟁점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기 마련이어서 이 방식은 한계가 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그래서 제안을 하나 한다. 만약 개헌을 하겠다면, 반드시 국민발의 같은 직접참여제도를 헌법에 도입해야 한다. 국민발의제도가 도입된다면, 시민들의 서명으로 탈원전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국민발의를 해서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시민들이 결정하는 것이 가장 민주적으로 원전 문제를 푸는 방법이다.

외국의 사례를 봐도 그렇다. 원전 문제를 민주적으로 결정한 사례를 보면, 국민투표로 결정한 사례와 원전 문제가 선거에서 핵심 쟁점이 돼서 결정한 사례밖에 없다. 전자에 해당하는 국가가 오스트리아·이탈리아이고, 후자에 해당하는 국가가 독일·스웨덴이다. 스웨덴의 경우 최근 총선을 통해 사민당-녹색당 연립정부가 구성되면서 원전을 줄이기로 결정했다.

대한민국도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 개헌을 하겠다면 국민발의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그래서 국민투표로 탈원전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아니면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에서 탈원전을 선거의 핵심 쟁점으로 삼고, 각 정치세력이 책임 있게 논쟁해서 유권자들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어쨌든 이제는 결정해야 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언제 대재앙이 닥칠지 모른다.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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