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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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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출되지 않은 ‘돈의 권력’이 지배하는, 여기는 중세인가

몇몇 재벌 왕조들이 민주주의도 위협… 재벌과 타협하지 않는
정치세력이 존재할 때 경제민주화도 가능, 재벌이 관리 불가능한 다당제 정치 구조 만들어야
등록 2015-01-08 15:56 수정 2020-05-03 04:27

장 자크 루소는 “부유한 정도가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다른 시민을 매수할 정도여서는 안 되며, 또 아무리 가난하다 할지라도 자신을 팔 정도로 가난해서는 안 된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을 보면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다. 돈이 곧 권력이고, 돈으로 사람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영혼도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대한항공 조현아씨 사건은 그런 믿음이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법원장이 법무부 소관 ‘가석방’ 언급

대한민국은 선출되지 않은 ‘돈의 권력’이 지배하고 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이야 선거를 통해 주기적으로 교체되지만, 재벌이라고 하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은 교체되지 않는다. 이들은 기업 내부에서 ‘왕조’를 구축하고 있다. 이들의 권력은 재벌 2세, 재벌 3세, 재벌 4세로 세습돼간다. 이 세습 과정에서 편법과 불법도 저지른다.

대한민국은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다. 2014년 12월30일 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서울 공덕동 서울서부지검을 나와 서울남부구치소로 향하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대한민국은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다. 2014년 12월30일 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서울 공덕동 서울서부지검을 나와 서울남부구치소로 향하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이들의 행태는 회삿돈을 횡령했거나 조현아씨 같은 일탈행동을 했을 때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른다. 그래서 구속되기도 하지만, 법원은 ‘국가경제에 기여’한 것을 인정해 선처해주기 마련이고, 그래도 안 되면 ‘가석방’을 해주도록 정치권력을 움직인다.

지금 정치권에서 논의되는 ‘경제인 가석방’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분명하다. 횡령죄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SK그룹 최태원 회장을 가석방해주자는 것이다. 재벌 총수 1명을 빼내기 위해 재계뿐만 아니라 여야 정치권, 대법원장까지 거들고 나섰다.

1월1일 양승태 대법원장은 몇몇 언론과의 신년 인터뷰를 통해 재벌 기업인의 가석방을 언급했다고 한다. 그는 ‘법 앞의 평등’을 강조하며 기업인이라고 해서 역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얘기했다고 한다. 해당 언론들은 ‘기업인 역차별 안 돼’를 헤드라인으로 뽑았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대법원장이 자기 소관도 아닌, 법무부 장관의 소관인 ‘가석방’ 문제를 언급했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정치권력뿐만 아니라 ‘돈의 권력’으로부터도 독립해야 할 대법원장이 특정 기업인을 편드는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는 발언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참 무서운 일이다. 일반 시민들이야 죄를 지어 형을 받으면 그냥 살고 나오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재벌 총수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써서 형을 채우지 않고 나올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만큼 대한민국의 ‘돈의 권력’은 무섭다. 그리고 그들은 오만한 자신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조현아씨의 동생 조현민(대한항공 전무)씨가 “반드시 복수하겠어”라는 다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국영기업을 인수하면서 출발한 대한항공

이들의 힘은 소유에서 나온다. 그러나 이들이 소유한 것이 그들의 힘만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대한항공은 1969년 국영기업이던 대한항공공사를 당시 한진상사 사장이던 조중훈씨가 인수하면서 출발한 회사다. 1988년 서울항공(현재 아시아나항공)이 설립되기 전까지 20년간 국내 항공운송을 독점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진그룹이 되었고 재벌 1세 조중훈씨 다음으로 재벌 2세 조양호, 재벌 3세 조현아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이런 성장 과정은 다른 한국 재벌들도 마찬가지다. 국가권력으로부터 특혜나 비호를 받지 않고 성장한 재벌그룹은 없다. 재벌 총수들의 탁월한 능력으로 성장한 것이 아니다. 국가가 독점적 사업권을 보장해주기도 했고 온갖 혜택을 주기도 했다. 이에 대해 불법 정치자금으로 보답했던 재벌들도 있다. 그래서 ‘정경유착’이라는 단어가 나왔던 것이다.

이런 어두운 과거가 있기 때문에 재벌들은 성공신화를 만들어 유포한다. 이건희 신화, 정주영 신화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2세, 3세, 4세로 내려갈수록 ‘이들이 왜 제왕처럼 군림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재벌의 아들·딸, 손자·손녀가 모두 유능하다는 보장은 전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이들은 왕조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왕의 아들·딸이므로 태생부터 평민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계열회사에 입사를 시키고 초고속 승진을 시켜 몇 년 뒤에 임원을 시킨다. 아예 다른 존재임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 경제는 몇몇 왕조에 의해 지배되는 양상을 보인다. 그것은 점점 더 심해진다. 중세 유럽에서는 제후나 영주가 일정한 땅을 지배하면서 그 내부에 사는 사람들을 농노로 지배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재벌 일가들이 자신들이 지배하는 기업집단 내부에 사는 사람들을 인격적으로도 지배하려 한다.

이들의 힘은 기업집단 내부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다. 이번 가석방 논란에서 보듯이 이들은 정치까지 지배하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대표로 출마한 박지원 의원 역시 ‘기업인 역차별’ 운운하면서 가석방에 힘을 실어주는 발언을 했다. 재벌을 비호하는 정치는 여야를 가리지 않는다.

사실 가석방 논란은 일회적인 것이다. 더 심각한 점은, 모든 경제정책과 통상정책에서 재벌들의 이익을 비호하거나 이에 침묵하는 정치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의 변화가 중요하다. 재벌이 관리 가능한 양대 정당 구조가 아니라, 관리 불가능한 다당제 정치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재벌과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정치세력이 존재할 때 경제민주화도 가능하다. 비례대표제의 전면 확대 같은 정치제도의 변화가 절실한 이유다.

경제민주화와 정치민주화는 함께 간다

제헌헌법에는 지금의 눈으로 보면 파격적인 경제민주화 조항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중요한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수도, 까스 및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

최소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태어날 때는 이런 문제의식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돈의 권력’이 지배하는 것은 헌법정신의 후퇴이기도 하다. 이대로 가면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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