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잊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개인도 그렇지만 사회도 그렇다. 그래서 기록이 중요하고 역사가 중요하다.
2005년 11월2일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이날은 정부가 군산·포항·경주·영덕 등 4곳에서 중·저준위 핵폐기장(방폐장) 유치 찬반 주민투표를 실시한 날이다. 그리고 찬성률이 가장 높았던 경주를 중·저준위 핵폐기장 부지로 확정지은 날이다.
절반 이상 암반이 최하 등급이후 정부는 관계 공무원 등에게 훈포장까지 수여하며 자축을 했다. 당시 공로(?)를 세운 국가정보원 직원 5명을 포함한 86명에게 훈포장이 수여됐다. 그중에는 조석 현 한국수력원자력 사장, 현재 새정치민주연합 원전특위 간사를 맡고 있는 홍영표 의원(당시 국무총리실 비서관) 등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경주를 핵폐기장 부지로 선정한 것은 최악의 선택이었음이 나중에 드러났다. 경주 핵폐기장 부지는 하루 1200t의 지하수가 쏟아져나오는 부실한 암반이었다. 절반 이상의 암반이 최하 등급인 5등급 이하인 땅이었다.
이런 곳에 핵폐기장을 지어서 안전할 리가 없다. 경주 중·저준위 핵폐기장의 문제점을 파헤쳐온 동국대 의대 김익중 교수는 “100% 확률로 방사능이 누출될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김익중 교수가 예상하는 방사능 누출 시나리오는 이렇다. 경주의 핵폐기장은 지하에 동굴을 파서 핵폐기물이 든 드럼통을 묻는 방식이다. 콘크리트로 지하수 침투를 막는다고 하지만, 300년 동안 콘크리트에 균열이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만약 균열이 생겨 주변을 흐르는 막대한 양의 지하수가 내부로 들어오면 방사능이 누출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오염된 지하수는 방사성물질을 걷잡을 수 없이 확산시킬 것이다. 당장 핵폐기장 주변의 경주 양남면·양북면·감포읍 일대가 문제다. 이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지하수를 식수로 먹고 있다. 또한 오염된 지하수는 동해로 빠져나가 바다까지 오염시킬 가능성이 높다.
중·저준위 핵폐기장에는 고준위 핵폐기물(사용후 핵연료)을 제외한 모든 폐기물이 들어온다. 원전에서 교체한 부품, 병원이나 연구소에서 사용한 방사성물질도 들어온다. 그래서 최소 300년 동안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시설이 들어설 부지가 이렇게 엉터리로 선정된 것이다. 그것은 정부가 안전성을 무시하고 부지 선정을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38.16%, 말도 안 되는 부재자투표 신고율주민투표를 실시했지만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주민투표였다. 당시 정부는 3천억원의 현금과 한국수력원자력 본사 이전을 내걸고 4개 지방자치단체에 경쟁을 시켰다. 찬성률이 가장 높은 지역에 핵폐기장을 설치하겠다고 한 것이다. 이것을 보고 경주시장을 비롯한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사생결단하듯 달려들었다. 본래 주민투표는 특정한 지역에서 주민들의 의견을 모으기 위해 실시하는 것이지만, 정부는 ‘누가 찬성률이 높냐’로 경쟁을 시키는 이상한 방식의 주민투표를 실시했다.
지방자치단체장들은 삭발까지 했다. 찬성하는 단체에 막대한 예산을 지원했다. 경주시장은 찬성 단체에 12억원을 지원했다. 공무원들도 동원됐다. 현지에 파견된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양심적인 기자들은 ‘이건 조직적인 부정선거’라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 정상적인 선거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결과가 나왔다. 찬성률이 89.5%에 달했던 경주시에서는 부재자투표를 하겠다고 신고한 비율이 전체 유권자의 38.16%에 이르렀다. 이것은 조직적인 관권 개입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전에 치러진 선거에서 부재자투표 신고율은 2~3%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민주정부’ ‘참여정부’를 자처했던 노무현 정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노무현 정부가 저지른 큰 실책 중 하나가 이런 식의 주민투표를 통해 경주 핵폐기장 부지를 선정한 것이었다.
고준위 핵폐기장이든 중·저준위 핵폐기장이든 안전성이 최우선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시설이다. 이미 나온 핵폐기물을 어떻게 할 수 없다면, 최대한 양을 줄이고 안전하게 보관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핵폐기장 부지만 선정하면 끝’이라는 잘못된 사고가 무리수를 낳은 것이다. 그리고 관료, 한국수력원자력 등 핵마피아들에게 끌려다닌 것이 이런 잘못을 낳았다.
5차례 설계 변경 거쳐 2배 넘게 불어난 공사비지금 경주 핵폐기장은 어떤 상태일까? 수많은 문제제기가 있었음에도 공사는 강행되었다. 물론 공사가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는 없었다. 지하수가 쏟아져나오는 상태에서 공사를 제때 마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초 2010년 6월 완공 예정이던 공사는 2014년 6월이 되어서야 끝났다. 4년이나 지연된 것이다. 게다가 공사비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당초 2548억원이던 공사비는 5차례의 설계 변경을 통해 6080억원까지 늘어났다. 모두 국민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다.
이런 식으로 공사가 진행되는데 비리가 없을 리 없다. 지난 6월25일 대구지방법원은 경주 핵폐기장 건설 과정에서 뇌물을 주고받은 죄로 기소된 한국원자력환경공단 관계자와 건설업체에 유죄를 선고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핀란드가 건설 중인 고준위 핵폐기장은 전혀 균열이 없는 1등급 암반 위에 지어지고 있다. 지하수는 수십km 밖에서 흐른다. 이와 비교하면 경주 핵폐기장은 말도 안 되는 시설이다. 아까운 돈을 낭비하면서 방사능 누출이 예상되는 시설을 지은 어리석음을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까?
경주 핵폐기장은 공사가 끝났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언젠가는 경주 핵폐기장 문제에 대해 철저한 진상조사를 해야 한다. 이것은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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