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구렁이 눈이 순박하다?

바라건대 ‘너 살 데 너 살고 나 살 데 나 살’았으면 싶은 뱀과 구렁이,
불가근 이들이 나타나는 철이 되었으니
등록 2014-06-21 14:12 수정 2020-05-03 04:27
온실 석축 사이에 벗어놓고 도망가버린 뱀의 허물. 꽤 굵고 길이가 족히 80cm는 넘을 것으로 보아 예전의 그 황구렁이 후손 아닌가 한다. 강명구 제공

온실 석축 사이에 벗어놓고 도망가버린 뱀의 허물. 꽤 굵고 길이가 족히 80cm는 넘을 것으로 보아 예전의 그 황구렁이 후손 아닌가 한다. 강명구 제공

조선시대 최고 ‘찌질이’ 임금 중 하나인 선조를 향한 낯간지러운 구애(求愛)의 문장과 손에 흙 한 번 묻히지 않고 살았을 사람의 자연 찬미가 내심 마뜩지는 않아도, 정철의 도입부인 “강호(江湖)에 병이 깊어”는 쉽게 내치기 힘든 인상 깊은 문구(文句)다. 강호에 병이 깊어, ‘집 위에 집 있고, 집 밑에 집 있고, 집 옆에 집 있는’ 아파트 대신 ‘집 위에 하늘 있고, 집 밑에 흙 있고, 집 옆에 나무 있는’ 안골로 이사 온 지 벌써 15년째다.

한데, 그렇게 원하던 강호로 와보니 집 옆, 집 아래, 집 위에는 나의 ‘안골별곡’에 등장하는 하늘·땅·나무 외에도 부지기수의 생명체가 존재함을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유려한 문장과 사색으로 우리 삶을 한갓 ‘한여름 밤의 꿈’ 정도로 왜소화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마지막 저서 (Billions and Billions) 제목처럼 요즈음은 모르긴 몰라도 내 주변이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체로 온통 가득 차 있을 것이라는 상상에 빠지곤 한다.

텃밭에 가면 지렁이는 기본에, 달팽이며 두더지며 들쥐며 땅강아지며, 그리고 온갖 곤충들에다 밤이면 깜빡깜빡하는 반딧불까지 정말로 다양하다. 주목 수벽 안에는 온갖 조그만 새들이 거처를 정해 지지배배 지저귀고,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수십 마리씩 떼지어 나는 노란 꾀꼬리를 보노라면 산 아래에서 들리는 뻐꾸기 소리 정겹다. 새벽녘 어스름에 들리는 소쩍새 소리 또한 구슬프고 한낮에 나무둥치 쪼아대는 딱따구리 소리가 산사의 목탁 소리처럼 통랑하다.

그러나 많은 생명체들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이 손쉽게 전이되지 못하는 동물의 대표주자가 뱀이다. 누구는 구렁이의 눈이 그리 순박할 수 없다고 하고, 누구는 이 동물의 살갗이 그리 매끄러울 수 없다고 찬탄하지만, 우리 부부는 이러한 주장을 한 번도 진지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한 적이 없다. 그저 바라건대 피차 마주치지 말고 ‘너 살 데 너 살고 나 살 데 나 살자’ 유의 불가근(不可近) 원칙이 관철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러나 이런 원칙은 인간의 바람일 뿐이지 뱀들의 선호는 결코 아니다. 피차간 대화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뱀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도 동감인데 왜 너 살 데와 나 살 데를 인간인 너 혼자 정하냐?’고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뱀은 여름철 비 온 뒤 풀섶이나 돌축대 틈새에서 슬슬 기어나오는 경우가 다반사다. 책을 보니 변온(變溫)동물인 뱀은 체온 조절을 위해 더울 때는 시원한 곳으로, 추울 때는 따뜻한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니 더운 여름에는 시원한 풀섶이나 축대 바위틈이 제격이고 비 온 뒤에는 추우니 햇살 좋은 잔디밭이나 시멘트 바닥으로 기어나와 몸을 말리기 마련이다. 이 원칙을 고려하면 당신이 뱀과의 조우를 피하려면 언제 어느 곳을 조심해야 하는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자, 이제 당신이 텃밭에 일하러 나간다 치자. 물론 뱀도 만나기 싫다. 그러면 다음과 같이 하시라. 먼저 슬리퍼나 운동화 말고 장화를 신으시라. 다음으로 꼭 장갑을 끼시라. 그리고 허리춤까지 오는 막대기 하나를 드시라. 풀섶 근처로 가서 먼저 헛기침을 하고 막대기로 이곳저곳 풀섶을 탁탁 한 번씩 쳐주시라. 뱀이 있다면 저도 놀라서 소리 없이 스르르 사라질 것이다.

몇 해 전 닭을 댓 마리 키울 때 이야기다. 어쩐지 달걀이 줄어서 의아했다. 길이가 1m는 족히 되는 그 귀하다는 황구렁이가 막 달걀을 입안 가득 넣고서는 넘기려는 찰나를 목격한 순간 의문은 저절로 풀렸다. 집게에 막대기에 양파망에 온갖 도구를 사용해 포획한 녀석을 재 넘고 개울 건너 산기슭에 풀어주었다. 그런데 몇 마리를 이런 식으로 불가근하니 쥐가 늘어났다. 그러나 생태계 교란의 주범으로 몰리는 한이 있어도 우리 부부는 동동이가 반쯤 혼절시킨 뱀을 주인에게 자랑하기 위해 물고 오지 않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강명구 아주대 사회과학대학 행정학과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