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7일 염호석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양산센터 분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7개월 전 최종범 천안센터 조합원이 “노조 인정”을 요구하며 먼저 그 길을 갔다. 딸 ‘별이’를 키우며 남편 없는 시간을 견뎌온 고 최종범씨의 아내 이미희씨는 염 분회장의 빈소에서 주검을 빼앗는 경찰과 대치했다.
【분급】[명사] 삼성은 수리 기사들에게 월급이나 주급 대신 건당 수수료를 지급한다. 수수료는 이동 시간과 수리 전후 시간, 상담 시간 등을 모두 빼고 오직 수리하는 데 걸린 시간에만 분급 225원(2013년 기준)을 책정한다.
【24시간 편의점】[관용어]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을 가리지 않고 고객들의 수리 요구 전화에 시달리는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자조적으로 일컫는 말.
【넥타이 맨 거지】[관용어] 삼성전자서비스 수리 기사들은 와이셔츠와 넥타이, 구두를 의무적으로 착용해야 한다. 말끔한 옷차림과 달리 가난에 허덕이는 삶을 빗댄 표현.
【발병자】[명사]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사망한 노동자들을 삼성은 ‘피해자’ 대신 ‘발병자’라고 칭한다. 업무와 질병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표현.
[사용례] 가파르고 완고합니다. 흠이 없고 틈도 없습니다. 성뿐이며 벽뿐입니다. 부유한 시대에 궁핍한 우리는 ‘여전히’(제986호 ‘형, 이렇게 일하는데 사는 건 왜 힘들어져?’ 참조) 설 곳도 쉴 곳도 없습니다.
장례식장(5월18일 서울의료원 강남분원) 주위로 고함이 터지고 눈물이 부풀었습니다. 별이(생후 18개월)를 옆 사람에게 맡기고 최루액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아빠(천안센터 노동자 최종범·2013년 10월31일 사망)가 떠난 뒤부터 별이는 엄마가 안 보일 때마다 울었습니다. 떼어놓지 못해 데려온 별이가 처음 보는 아저씨 품에서 저(이미희·31)를 찾으며 울었습니다. 세상을 버림으로써 전하고 싶었던 젊은 노동자(삼성전자서비스지회 양산분회장 염호석·5월17일 사망)의 뜻이 분사하는 최루액과 내리찍는 방패 아래서 외로웠습니다. 저항하는 동료들을 뚫고 경찰이 그의 주검을 빼앗았습니다. 별이를 데리고 남편을 따라갈까 울며 고민한 날이 많았습니다. 누군가 죽어야 그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사회는 어린 별이가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일 리 없습니다. 주검을 빼앗음으로써 죽음을 통해 하려던 말까지 빼앗는 시대는 잔혹합니다. 분급 노동자들의 절규를 틀어막는 짐승의 근육을 최루액이 날리는 장례식장 앞에서 저는 봤습니다.
허벅지살 찢겨도 “옷값 줄 테니 일 끝내라”이틀 만에 남편을 만났습니다. 2013년 11월1일 남편은 냉동고에 있었습니다. 자는 듯 얼굴이 평온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를 만졌습니다. 온기가 사라진 몸이 차가웠습니다. 집에 데려가서 편히 재우고 싶었습니다.
10월30일 남편은 평소처럼 출근했습니다. 특별한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후 내내 전화 통화도 없었습니다. 밤 10시가 넘어 휴대전화에 남편의 번호가 떴습니다. 술 취한 목소리로 그는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뭐가 미안하냐”는 물음에도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남편은 “별이를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별이는 평소처럼 옹알이도 하지 않았습니다. 후회됩니다. 만일 제가 별이를 꼬집어 울리기라도 했다면 남편은 생각을 고쳐먹었을까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이에 연필로 급하게 써서 옆방에 있던 친정오빠한테 줬습니다. “빨리 119에 전화해.” 저는 남편이 전화를 끊지 못하도록 계속 말을 시켰습니다. “우리 별이 너무 귀엽지. 밥 먹는데 너무 예뻤어.” 친정오빠가 119에 위치추적을 요청하는 동안 저는 남편에게 딴생각하지 말란 마음을 담아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빠야.” 남편이 전화를 끊었습니다. 119가 알려준 장소에 남편은 없었습니다. 10월31일 저녁 7시쯤 모르는 번호가 전화기를 울렸습니다. 전화기 너머 목소리가 물었습니다. “최종범씨와 어떤 관계십니까?” 저는 “와이프”라고 했습니다. 목소리가 말했습니다.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꿈이 틀림없다”고 했습니다. 목소리는 단언했습니다. “현실입니다.”
남편 주검의 허벅지엔 깊은 상처가 선명했습니다. 언젠가 남편이 울먹이며 전화했던 일이 기억났습니다. “에어컨을 설치하다 난간에서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몸이 나뭇가지에 걸리면서 남편 허벅지 살이 S자로 찢겨 파였습니다. 남편은 “사장이 찢어진 옷값을 줄 테니 수리를 끝내고 오라더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늘 시커먼 기름때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퇴근했습니다. 여름엔 에어컨을 고치다가 동상을 입었고, 겨울엔 냉장고를 고치다 화상을 입었습니다. 남편과 동료들은 자신들을 넥타이 맨 거지라고 불렀습니다.
남편이 죽은 뒤 언론에 공개된 사진이 있습니다. 사진 속 남편은 사다리차는 물론 난간도 없는 4층 건물에서 창문을 디딘 채 에어컨을 설치하고 있었습니다.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의 작업이 얼마나 위험하고 고된지를 보여주는 증거로 회자됐습니다. 남편은 이 사진을 동료들끼리 소통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채팅방에 올렸습니다. “목숨은 하나”라거나 “가족 생각 하라”며 그를 말리는 글들이 주르륵 달렸습니다. 중간쯤에 남편이 남긴 글도 있었습니다. “다음주에 저거(에어컨) 다시 떼서 작업할 건데 저 혹시 떨어져서 죽으면(죽을지 모르니) 삼성에 엄청난 피해 줄 유서를 제 오른쪽 주머니에 써넣겠습니다.” 실제 남편은 제게 ‘유서’라는 걸 보여준 뒤 오른쪽 주머니에 넣은 일이 있습니다. 저는 장난일 줄 알았습니다. 남편이 죽은 뒤 그 유서를 찾아봤으나 세탁기에 옷째 넣고 빨았는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마음에 어떤 분노가 자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별아, 비수기에 태어나줘서 고마워2013년 7월19일 밤 남편은 소주를 사들고 퇴근했습니다. 사진을 올리기 열흘 전쯤이었습니다. 한 고객에게 심한 모욕을 당한 뒤 마음이 상해 있었습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있을 때 천안센터 사장한테서 ‘문제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섬뜩한 사장의 욕설 소리가 남편의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습니다. 별이는 칭얼거렸고, 저는 무서웠습니다. 전화를 끊은 남편은 “비참하다”며 소주만 들이켰습니다. 저와 별이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그가 직장에서 어떤 대우를 받으며 일하는지 그때 알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출근하는 남편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았습니다. 차마 말은 못했지만 그런 욕을 듣고 일하느니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남편은 전날의 고객에게 사과 문자를 보낸 뒤 사장에게 문자 내용을 전송해 보고했습니다.
그 무렵부터였습니다. 남편은 포장마차를 알아보고 다녔습니다. ‘투잡’을 뛰어야겠다며 자리를 물색했습니다. 대리운전도 생각했습니다. 천막사를 하는 큰형님에게 찾아가 일거리를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표적감사와 지역 쪼개기(본사가 협력업체 직원들이 담당하던 지역의 일감을 가져가는 행위) 탓에 일거리가 급감했기 때문이란 사실은 나중에 알았습니다.
남편은 정말 일만 하고 살았습니다. 결혼식(2012년 4월1일 일요일) 다음날도 남편은 출근했습니다. 신혼여행은 겨울 비수기 때 가자고 저를 설득했습니다. 별이가 태어나던 날(2013년 12월13일) 진통이 심해 병원으로 옮겼을 때 남편은 간호사에게 물었습니다. “양수가 터지려면 얼마나 남았습니까? 양수가 터지면 아기가 바로 나옵니까?” 시간이 걸린다는 간호사 말에 남편은 오전에 들어온 ‘콜’(수리 요청 접수)을 처리하러 갔습니다. 양수가 터졌을 때도 “빨리 오라”는 제 전화에 그는 말했습니다. “급한 콜만 마무리하고 갈게.” 별이는 펑펑 내린 눈이 세상을 하얗게 덮은 날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는 별이에게 늘 “효녀”라고 했습니다. “비수기 때 태어나줘 고맙다”는 말이었습니다.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원망할 수 없음을 그의 부재 뒤에야 깨닫습니다. 그는 일중독자가 아니었습니다. 고정급 없는 노동자 아빠로서 사랑하는 딸을 지키려는 발버둥이었습니다. ‘빨리 와서 세탁기 고치라’는 고객의 전화로 새벽 5시부터 잠을 설치는 그는 24시간 편의점이었습니다. 남편은 제게 월급명세서(회사가 건당 수수료를 월급처럼 꾸민 ‘가라’ 서류)를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신용카드 한 장만 줬습니다. 100만원 남짓하는 비수기 수입을 제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남편의 동료들도 그래왔다는 사실을 그가 죽은 뒤 다른 가족들과 이야기하면서 알았습니다.
살아서는 차별을, 죽어서는 외면을염호석 분회장의 소식을 남편 묘소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었습니다. 아득하고 두려웠습니다. 남편의 장례(사망 55일 만인 2013년 12월24일)를 치른 지 반년 만이었습니다. 남편 사망 뒤 삼성 본관(서울 서초동) 앞에서 삼성을 비판하던 그의 얼굴을 기억합니다. 그의 죽음과 남편의 죽음은 그들의 염원만큼이나 닮았습니다. 두 사람은 2010년 삼성전자서비스 수리 기사가 됐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낡은 자동차를 마지막 장소로 택했습니다. 모두 번개탄을 피웠고, 모두 서른네 살이었습니다. 그들의 동료들은 두 사람의 죽음을 기리며 삼성 본관 앞에서 노숙농성을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죽은 뒤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이건희 회장의 위독 소식을 다급하게 전했던 언론들은 염호석 분회장의 죽음엔 무관심합니다. 주검을 빼앗기기 전 그의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먼저 떠난 사람의 아내”라고 저를 소개했습니다. “저도 겪어봤다”며 “아들의 유언을 생각해달라”고 설득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거부했습니다. 삼성 직원들을 만난 뒤 마음이 바뀐 듯했습니다. 빈소가 차려진 첫날부터 경찰이 들이닥칠 거란 생각도 못했습니다. 백혈병 피해자의 이름을 얻지 못하고 발병자로 지칭되는 사람들의 가족들도 경찰 앞에 섰습니다. 남편과 그들은 살았을 때도 차별받고 죽은 뒤에도 외면받는 세월호 아르바이트 노동자들과 같습니다.
시어머니는 수리 기사들이 집에 오면 꼭 밥을 차려 먹여 보내곤 했습니다. 수리 기사 아들을 둔 어머니는 다른 회사의 수리 기사들까지 아들처럼 챙겨야 맘이 편하셨나봅니다. 오랜 병으로 입원 중인 어머니는 매일 문병 오던 아들의 발길이 끊기자 걱정하셨습니다. 제가 전화를 걸어 “중국 출장 갔다”고 안심시켜드렸습니다. 어머니는 “회사에서 인정받으니까 중국 출장까지 간다”며 “잘됐다”고 하셨습니다. 장례 직전 더는 숨길 수 없었을 때도 어머니께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지금도 그렇게 알고 계십니다.
별이는 벌써 뛰어다닙니다. 고무줄로 묶을 만큼 머리카락도 많이 자랐습니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 별이는 친정오빠가 품에 안기만 하면 울었습니다. 남편이 묻힌 뒤 별이는 친정오빠 곁에 가서 안겨 잡니다. 외삼촌을 아빠라고 별이는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별이가 크면 아빠를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학교에서 아빠를 모셔오라고 할 땐 손잡고 갈 아빠가 없어 울지도 모릅니다. 기억으로 붙들진 못해도 체온과 형상으로라도 별이가 아빠의 삶과 죽음을 새겨줬으면 좋겠습니다.
“전태일처럼 그러진 못해도 전 선택했어요”살았을 때 남편은 다짐했습니다. 어머니와 별이와 저 세 사람을 위해 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우리를 남겨두고 떠난 남편이 야속했습니다. 이젠 남편을 믿습니다. 그는 분명 더 많은 사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남편이 SNS에 남긴 유언(“전태일님처럼 그러진 못해도 전 선택했어요”)을 잊지 못할 겁니다. 별이가 크면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게 아빠 마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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