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 은 1999년 10월1일 초판본을 내며 탄생했다. 국립국어원의 은 국어사전의 표준임을 자부한다. ‘국어’라고 일컫는 단어들에 ‘표준’의 자격을 부여하고 ‘비표준’의 딱지를 붙인다. 엔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가 없다. 이 밝힌 ‘표준어’와 ‘국어사전’의 정의를 활용해 ‘표준국어대사전’의 뜻을 풀면 이렇다. “한 나라에서 공용어로 쓰는 규범으로서의 언어”이자, “의사소통의 불편을 덜기 위하여 전 국민이 공통적으로 쓸 공용어의 자격을 부여받는 말”이며, “우리나라에서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인 표준 “국어를 모아 일정한 순서로 배열하여 의미, 주석, 어원, 품사, 다른 말과의 관계 따위를 밝히고 풀이한 책”. 말을 다루는 권력이 이 책 안에 있다.
【사랑】[표준국어대사전] 이성의 상대에게 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 마음의 상태→어떤 상대의 매력에 끌려 열렬히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2012년 12월 개정)→남녀 간에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런 일(2014년 1월 재개정). 보수 기독교계의 압박이 컸다. 은 ‘규범’과 ‘자격’과 ‘교양’이란 잣대로 수많은 빛깔의 사랑을 ‘사랑’의 경계 밖으로 쫓아냈다. 이성 간의 사랑만을 ‘韓국어’로 인정하고 다른 모든 성(gender·sexuality)의 사랑을 ‘恨국어’로 낙인찍었다. 젊은 퀴어활동가 10명이 노동당사(4월9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모였다. 자민(노동당 성정치위원회), 강은하(노동당 성정치위원회·‘성소수자 안녕들하십니까’ 네트워크), 엘봉(노동당 성정치위원회·‘성소수자 안녕들하십니까’ 네트워크), 신동진(혐오반대퍼포먼스 REP), 규환(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서울LGBT영화제), 상근(동성애자인권연대·중앙대 성소수자모임 레인보우피쉬), 오낑깡(동성애자인권연대), 도구(사람을 생각하는 인권·법률공동체 두런두런), 폴라(성공회대 성소수자 인권모임 무아지경), 반순웅(고려대 성소수자 동아리 사람과 사람). 자신의 성정체성을 LGBT 중 어느 하나 혹은 하나 이상이라고 밝힌 9명과 범성애자(Pansexual)라고 밝힌 1명이 ‘표준의 사랑’에 맞서 ‘표정 있는 사랑’을 이야기했다.
차별받는 사랑[사용례] 어린 시절부터 규환에게 사전은 ‘아픈 책’이었다. 자기 감정의 결에 스스로 이름 붙이기 버거울 때마다 그는 을 찾았다.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는 감정의 뿌리가 어디서부터 자라난 것인지, 말의 근원을 탐색하는 사전은 답해줄 것 같았다. ‘ㅅ’으로 시작되는 페이지들을 펼칠 때마다 그의 손가락은 긴장했고, 모음 ‘ㅏ’를 거쳐 자음 ‘ㄹ’로 넘어갈 때쯤 마음은 무거워졌다. 동성에게 끌리고, 설레며, 아껴주고 싶은 마음을 사전은 ‘사랑’이라고 정의하지 않았다. 사전은 이성을 좋아하는 마음만을 사랑이라고 불렀다. 한때 규환은 감정이 평등한 것이라고 믿었다. 사랑이란 이름을 쓸 수 없는 그의 사랑은 차별받고 있었다.
“나와 내 애인은 ‘러브’는 계속할 수 있어도 더 이상 ‘사랑’은 할 수 없게 됐다.” 엘봉(레즈비언·여성동성애자)은 말장난 같은 현실이 허탈했다. 신동진(게이·남성동성애자)은 분노했다. 그는 사랑의 뜻 재개정 소식을 듣는 순간 “살의”를 느꼈다. 강은하(Male To Female 트랜스젠더·양성애자)는 “내가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면 뭘까” 자문해야 했다. ‘내 사랑이 자꾸 부정되면서 정말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같다’고 도구(레즈비언·여성동성애자)는 생각했다. 사전의 형식을 빌려 누군가의 사랑할 자격을 빼앗는 행위는 언어의 대기 속에 ‘차별의 홀씨’를 퍼뜨리는 일이다.
은 성소수자의 사랑을 ‘축출’한 만큼 그들의 존재도 지워왔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도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언어의 정치다. 이 두른 장벽 안에서 LGBTAIQ는 형체가 매우 흐릿하거나 아예 없다.
[표준국어대사전] Lesbian(‘레즈비언’이라 표기하고 “여성 동성애자를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 Gay(‘게이’라 표기하고 “동성애자를 달리 이르는 말. 최근에는 주로 남성 동성애자를 가리킨다”고 풀이), Bisexual(‘양성애자’라 표기하고 “남녀 양성에 대하여 성적인 관심과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풀이), Transgender(‘트랜스젠더’는 미등록. ‘성전환’의 경우 “암수딴몸인 생물에서 암수의 성이 반대의 성으로 바뀌는 현상”이라고 풀이), Asexual(‘무성애’ ‘무성애자’ ‘에이섹슈얼’ 모두 미등록), Intersexual(‘간성’이라 표기하고 “암수딴몸이나 암수딴그루인 생물의 개체에 암수 두 가지 형질이 혼합되어 나타나는 일. 생식 능력이 없으며 발생 중에 성 결정 유전자 작동의 잘못으로 생긴다. 흔히 가축에 있다”고 풀이), Questionary(상응하는 단어 없음), Pansexual(상응하는 단어 없음)이나 전체를 통칭하는 한국어 ‘성소수자’도 등록돼 있지 않다. 이 잘못 파악(트랜스젠더는 ‘생물학적 성과 성정체성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으로 생물학적 성전환과 무관하며 ‘인터섹슈얼=가축’인 것처럼 오도)하거나 전혀 정의 내리지 않는(무성애·퀘스처너리·범성애) 사람들이 있다. 파악되지 않고 정의되지 못함으로써 존재를 부정당하는 사람들이 ‘사랑’의 시민권을 박탈당한 것은 예고된 일이었을지 모른다. 존재가 호명되지 않는 자에게 사랑이라고 허락될 리 없다.
사랑의 n가지 색깔을 질식시키는 언어‘표준’이란 이름이 살상한 언어의 잔해 속에서 삶의 미세한 숨결들이 죽어 널브러지고 있다. 언어의 생멸과 쓰임새를 지배하려는 말의 욕망 아래서 인구수만큼 다양한 성정체성도 질식당하고 있다. 퀴어활동가들은 ‘사랑’의 뜻처럼 n가지 색깔의 성정체성을 한 개의 색깔로 덧칠하는 일상 단어들을 골라냈다.
【이성교제】[표준국어대사전] 미등록 단어. 중·고등학교 현장에서 ‘이성교제 금지’는 시퍼렇게 살아 있는 칼이다.
엘봉은 누군가와 좋아하는 사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상대 앞에서 그 사람을 ‘언니’라고 부를 뻔하다 급히 ‘오빠’로 바꿨다. 지하철에서 친구에게 “애인이 생리 중”이라고 했다가 앞에 앉은 아주머니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기도 했다. 언젠가 서울 종로에서 친구와 재미로 점을 본 적이 있다. 친구는 엘봉의 성정체성을 몰랐다. 엘봉의 애인 될 사람이 같은 학교에 있다는 점괘가 나왔다. 친구는 “얘 여대 다닌다”며 점괘를 비웃었다. 엘봉은 속으로 ‘용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더 이상의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폴라(양성애자)는 동성의 한 여성을 좋아했다. 그 고민을 지인에게 이야기하면서 “이성적으로 좋아한다”고 표현했다.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해서였다. ‘동성적으로 좋아한다’는 말은 어색했고, ‘성적으로 좋아한다’는 말은 더욱 이상했다. “애인이 여자였는데 ‘남자친구 군대 갔다 왔어’란 질문을 받으면 말이 탁 막혔다.”(오낑깡) 이성 간의 사귐만 ‘정상’으로 수용되는 사회에서 ‘말할 수 없는 사랑’은 고통스럽다.
반순웅(게이·남성동성애자)은 중·고등학생 때부터 강요받아온 ‘이성교제 금지’란 표현이 너무 싫었다. ‘동성교제를 장려한다는 뜻이냐’고 비웃어줘도 분이 안 풀렸다. 이성교제는 연애는 남녀 간에만 허용된 것이란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주입했다. “드라마·영화를 보면 이성애자에게는 연애가 필수다. 병원에서 연애하고 전쟁터에서도 하고 심지어 외계인과도 한다. 동성애는 늘 금지되고 어둡고 문란한 것으로 그려진다. 우리의 사랑은 이성애에 딸려 있는 원플러스원 느낌이다.”(신동진) 이 땅의 성소수자들은 자신의 사랑을 묘사할 언어를 부여받지 못했다.
【남자(여자)친구】[명사] ‘남자(여자)친구 있냐’는 질문은 상대가 이성애자임을 전제로 한다. 성소수자들은 젠더 중립적인 ‘애인’이란 표현을 주로 쓴다.
너 여자친구 있어? 고등학교 때 선배가 물었다. 상근은 줄곧 남자친구의 호칭으로 ‘애인’이란 말을 사용했다. 선배의 질문에 자신도 모르게 ‘여자친구 있다’고 답했다. 그 기억이 오랫동안 아릿하게 남았다. 왜 그랬을까 후회가 들었고, 무엇엔가 졌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살려고 그랬구나’ 스스로가 안쓰럽기도 했다. 아마 ‘여자친구’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면 선배는 질문에서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남자라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자친구 있냐고 묻는데, 그런 질문이 아주 불편하다. 사귀는 사람 있어요? 정도로 물어봐줘도 좋을 듯한데.”(반순웅) 상처를 겪어본 상근도 누군가에게 물을 땐 성정체성과 관계없이 ‘애인 있냐’고 묻는다. “우리가 ‘애인’이란 단어를 쓰기 때문에 성소수자란 사실을 눈치채는 사람도 있다.”(신동진)
【애인】[표준국어대사전] 서로 애정을 나누며 마음속 깊이 사랑하는 사람. 또는 몹시 그리며 사랑하는 사람.
‘애인’의 사전적 뜻풀이에도 ‘사랑’(남녀 간)이란 단어가 포함돼 있다. 성소수자들이 마음 편히 사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단어도 결국 남녀 간의 사랑 안에 갇히고 만다. 교묘하고 지독한 굴레다.
‘사랑’의 지독한 굴레
【남녀평등/ 양성평등】[표준국어대사전] 남자와 여자의 법률적 권리나 사회적 대우가 성별에 따라 차별이 없음/ 양쪽 성별에 권리, 의무, 자격 등이 차별 없이 고르고 한결같음.
학교 여성학 강의 시간에 교수가 성평등을 주제로 토론을 붙였다. 남녀 간의 데이트 문제로 시작해 고작 더치페이 논쟁으로 끝났다. 강은하는 성평등엔 LGBTAIQ까지 포함돼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시키기 위해 성평등 앞에 ‘포괄적인’이란 말을 붙이곤 했다. 성평등이란 개념조차 남녀(양성)평등과 같은 뜻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다. “남녀(양성)평등이란 말 자체가 두 가지 성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제3의 성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척하는 표현이다.”(엘봉) “남녀(양성)평등이란 말은 남성과 남성, 여성과 여성, 남녀 이외의 모든 성과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권력관계를 모조리 배제한다. 남녀뿐 아니라 모든 성은 평등해야 한다. ‘성평등’이 맞다.”(반순웅)
엔 ‘성평등’이란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커플세트】[상품] 자민(게이·남성동성애자)은 애인과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 커플세트를 시켰다. 남자용 큰 햄버거와 여자용 작은 햄버거가 하나씩 나왔다. 남녀만이 커플이 될 수 있다는 전제가 만든 메뉴였다. 고맙게 애인이 작은 햄버거를 먹어줬다. 식당과 극장 등에서 판매되는 대부분의 커플 메뉴가 그렇다. 커플 티셔츠도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다.
【커플】[표준국어대사전] 짝이 되는 남녀 한 쌍.
의 성소수자 차별은 ‘커플’이란 단어에서도 여실하다. 성소수자들은 사귈 수는 있어도 커플이 될 수는 없다.
어쩌다 사랑이 흉기가 됐을까언어의 법전에 차별을 못박는 행위는 혐오와 폭력의 최종 심급이다. 말을 부리는 자들이 말을 통해 성소수자의 존재를 지우려고 시도했다. 언어가 강제하는 인식은 언제든 물리적 폭력으로 이어진다.
2011년 11월 서울 종로에서 한 남자와 길을 걷던 강은하는 세 명의 남자들로부터 끔찍한 폭행을 당했다. 발길에 차이고 짓밟힌 그날의 사건을 한 언론이 ‘단독’이라며 보도했다. 찢긴 몸의 상처보다 난자당한 마음의 상처가 더 깊었다. 피해자인 그를 조롱하며 무수히 달린 댓글(“게이들은 모조리 총으로 쏴 죽여야 한다”)이 그를 절망케 했다. “애니메이션에서 인어공주가 다리를 갈망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내 이야기처럼 느낀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이길 바라고, 그를 위해 목숨도 걸 수 있을 만큼 절박한데 사람들은 혐오의 대상으로만 바라봤다.”
지난 3월 말 ‘마약파티한 동성애자들’이란 제목의 기사들이 보도됐다. ‘마약파티한 이성애자’란 표현이 없다는 사실에서 폭력이 어디에서 어디로 흘러가는지(도구)를 알 수 있다. ‘종북좌빨게이’는 편견과 혐오가 만나 생산한 가장 차별적이며 비논리적인 발명품 중 하나다.
성정체성이 두 개뿐인 세상이라야 안전하다고 믿는 세상은 가혹하다. 이 사랑의 뜻을 이성애로 제한한 것은 사랑이 ‘편견을 강화하는 흉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엘】[줄임말] 성소수자들이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택한 언어 전략은 암호화다. 주위에 사람들이 많을 때 레즈비언 대신 엘(L)이라고 말해 사회가 레즈비언에 덧씌운 부정적 뉘앙스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방식이다. “우리를 지칭하는 말이 우리에게 어떻게 사용될지를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현실 때문”이라고 강은하는 말했다.
날씨 참 좋다(정말 사랑해)마땅히 할 수 있어야 할 말을 할 수 없으므로 굳이 사용하는 말들이 있다. 성정체성을 모르는 사람들이 두 사람의 관계를 물을 때 흔히 ‘친구 사이’나 ‘룸메이트’라고 얼버무린다. 자신들의 관계가 드러나지 않도록 표현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개발해야 한다. 상근(게이·남성동성애자)은 사람이 많은 장소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해 ‘날씨가 좋다’는 기호를 정해 사용한다. “실내에서나 비가 오는 경우에도 ‘날씨 좋다’는 말을 계속 반복하는 경우”가 생긴다. 세상이 배척한 사랑을 그들은 그렇게라도 지켜야 한다.
인권의 역사는 ‘단어’ 혹은 ‘용어’를 둘러싼 투쟁의 역사다. 누군가에게 사랑의 결실인 ‘결혼’ ‘부부’ ‘부모’가 누군가에게 평생 싸워도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일 수 있다. 더없이 세밀한 관계의 언어들이 더할 수 없이 촘촘한 창살 같다.
이 독자와 ‘恨국어사전’을 편찬합니다. 여러분의 恨국어를 제보(moon0@hani.co.kr)해주세요.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한동훈 또 패싱…추경호 “4일 대통령실 가서 순방 전 담화 건의”
‘대통령 기자회견’ 이번에도 이러면 망한다
‘대통령 회견’ 앞두고…국힘 내부서도 “자화자찬 그만, 사과해야”
9살 손잡고 “떨어지면 편입”…‘대치동 그 학원’ 1800명 북새통
로제 ‘아파트’ 빌보드 글로벌 2주째 1위
11월 5일 한겨레 그림판
[영상] 폐어구에 꼬리 감긴 채…돌고래는 광어를 사냥했다
세월호 갇힌 이들 구하다 상한 몸, 한국에서 받아주지 않았다니…
엄마, 삭발하고 구치소 간다…“26년 소송, 양육비 270만원뿐”
색깔론 들고 나온 추경호 “민주, 현안마다 북한과 한 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