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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안일 버리고… ‘정말 수고했어’란 말 듣도록…”

이상한 나라의 이주노동자 대상 근무수칙·교육교재에서 발췌한 이상한 문장들
등록 2014-08-30 13:42 수정 2020-05-03 04:27
조업을 마치고 부산 남항에 입항한 이주노동자 선원들이 항구 한쪽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조업을 마치고 부산 남항에 입항한 이주노동자 선원들이 항구 한쪽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이상한 나라’가 있다. 이상한 나라엔 ‘이상한 책’이 있다.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책들이 ‘이상한 교육’을 한다. 이상한 나라에 처음 와서, 이상한 책과 씨름하며, 이상한 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이상’(理想)과 ‘이상’(異常) 사이에서 분열한다. 때론 법의 이름으로 강제하고, 때론 문화란 이름으로 방조하며, 이상한 나라 한국이 이상한 교재로 가르치는 이상한 이주노동자 교육을 소개한다.

【빨리빨리】

[부사] 한국 사람들은 정열적이고 역동적이며 부지런하다. 일을 좋아하고 맡은 일을 성실하게 제시간에 끝낸다. 추진력이 있어 일을 ‘빨리빨리’ 하는 것을 좋아한다. (농협중앙회 )

【정】

[명사] ‘정’은 한국인의 정서를 나타내는 말로, 시간이 흐르면서 좋아지게 되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관계에서 ‘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이해관계를 따지는 것을 피한다. ()

【다정다감】

[명사] 한국 사람들은 다정다감하다. 신체 접촉이 너그럽게 허용되는 경우가 있다. 어른들이 귀엽다는 뜻으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대화하면서 손이나 어깨 등을 접촉한다. ()

[실례] 한국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에게 ‘빨리빨리’는 정열적이지도 역동적이지도 않다. 폭행과 폭언에 앞서거나 뒤따르는 무서운 단어다. 인도네시아 선원 이주노동자 ㅌ(41·남)은 태평양에 뜬 참치배 위에서 “빨리빨리(34~38쪽 참조) 못한다”고 매일 맞았다. 캄보디아 농업노동자 손 비솟(33·여·가명)은 고구마 줄기를 자르다 사장으로부터 “빨리빨리(제1025호 표지이야기) 하라”며 “머리가 없냐”는 소리를 들었다. ‘정’을 중시하고 이해관계를 따지기 원치 않는 농장주는 어린 여성노동자(21)에게 저녁마다 밥을 차리게 하고 안마를 시켰다. 젊은 고용주(30)는 ‘다정다감’해서인지 “추우면 나를 안으라”며 여성노동자들을 성추행했다.

【직원의 근무수칙】

[농·축산업] 농업 분야의 특수성으로 출퇴근 시간을 엄격히 정할 수 없다. 농장에 따라 일이 많으면 휴일근무, 연장근무를 하는 경우도 있다. 퇴근 시간이 지나도 일이 남아 있는 경우에는 잔업을 다 처리한 뒤 사용자에게 인사를 하고 퇴근하는 것이 좋다. 작업이 끝난 뒤 자신이 사용했던 도구와 작업장 주변은 깨끗이 정리·정돈한다. 오늘 해야 할 일은 내일로 미루지 않는다. [근무예절] 무엇을 요구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

[실례] 농·축산 이주노동자들이 살인적 노동시간과 초저임금에 항의할 때마다 고용주들은 근로기준법 제63조(농·축산업은 근로시간·휴게·휴일 예외)를 내민다. 노동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뜻을 일은 원하는 대로 시키되 돈은 적게 줄 수 있다는 의미로 오용한다. 근무수칙은 고용인의 의무 대신 피고용인의 ‘예절’만을 강조한다. 2013년 5월 농협중앙회는 갓 입국한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이렇게(2013년 국가인권위원회 ‘농·축산업 이주노동자 인권상황 실태조사’) 가르쳤다.

“농장주와 싸우지 마세요. ‘내가 서툴고 부족하지만 더 열심히 일하겠다’고 생각하세요. …이기주의, 편협, 적당주의, 무사안일 등을 버려야 하고 농장주에게 ‘정말 수고했어’란 말을 듣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장님에게는 항상 45도로 인사해야 합니다. …일을 하다 농장주에게 불만이 있더라도 불만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고향 쪽인 해가 지는 서쪽을 바라보고 하하하 웃으세요.”

【항문 닦기】

[개인위생] 생식기와 항문 주위를 깨끗이 한다. 항문 주위를 깨끗이 닦아주지 않으면 대변 자체가 항문 주위의 피부를 자극해 심한 가려움이나 불쾌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 대변 속에 있던 세균이 항문과 가까이 있는 요도나 성기로 옮겨져서 병을 일으킬 수도 있다. (농협중앙회 네팔어판)

[실례] 이주노동자를 향한 시각이 읽힌다. 속옷 갈아입기, 양치질하기, 손톱과 발톱 관리하기, 머리감기 등을 미개인 혹은 어린아이 가르치듯 서술한다. 중국인 노동자들이 “짱깨라고 부르지 말라”거나 베트남 노동자들이 “베트콩이라고 하지 말라”고 호소하는 이유도 같다.

미얀마(버마) 선원의 특성

[한국 선원이 알아두면 좋은 사항] 미얀마 선원은 마음을 잘 열지 않으므로… 미얀마 선원이 “Yes, sir” 했어도 완전히 이해했다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미얀마 선원은 외적으로 늙어 보이고 힘이 없어 보이지만… (Tip) 미얀마 선원의 임기응변적인 거짓말에는 재확인(Cross Checking)이 효과적입니다. …미얀마 선원은 시간외 근무에 매우 협조적입니다. 따뜻한 말로 위로하고 격려도 하며 수고를 인정해주면 더욱 열심히 합니다. (한국해운조합 )

【인도네시아 선원의 특성】

[한국 선원이 알아두면 좋은 사항] 자존심이 강하고 부끄러움과 창피함에 민감하여 잘 몰라도 되묻지 않습니다. …(Tip) 항해 중이나 정박 중에 잘못이나 실수를 한 경우 윽박지르기보다는 벌칙제도를 활용해보세요. …가장 답답한 사항은 자기한테 주어진 일에만 몰두하지 능동적으로 우리나라 선원처럼 급한 일부터 처리하는 센스가 없습니다. ()

[실례] 한국해운조합이 조합원인 연안해운업자들에게 ‘알아두면 유용한 국가별 특성’을 제공했다. ‘일을 시키고 부리는 사람’의 전형적 입장을 반영했다. 개인의 외모와 행동을 민족성과 연결지어 편견을 키우고 있다. ‘마음을 잘 열지 않는다’거나 ‘잘 몰라도 되묻지 않는’ 행동은 ‘국가별 특성’이 아니라 의사소통 시스템을 갖추면 저절로 해결될 문제다. 이주노동자를 고용한 업체나 관리회사들조차 통역 직원을 채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중국인 선원 ㅊ(41)은 “처음 배를 탔을 때 한국인 선원들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며 주먹으로 많이 때렸다”고 했다. 언어의 장벽에 부딪힐 때마다 폭력을 경험한 이들에게 ‘소극적’이라거나 ‘질문하지 않는다’고 평하는 것 자체가 폭력이다.

【외국인 선원 의무사항】

[중국어판] ① 멀미, 노동강도, 근로환경 등으로 근무처 변경을 요구할 수 없다. ② 이탈, 범죄행위, 체류자격 이외의 행위는 금지된다. ③ 취업조건 외의 사항은 요구할 수 없다. ④ 파업, 정치활동 등은 금지된다. ※상기 의무사항을 불이행하였을 경우 강제 출국시킬 수 있다. (ㅋ사 )

[실례] 멀미가 죽음을 부르는 경우가 있다. 지난 2월14일 인도네시아 선원 ㅈ(30)은 제주시 우도 남동쪽 22km 해상에 있었다. 통영 선적 79t 통발(꽃게·문어잡이) 어선을 타고 조업 중이었다. 입국한 지 한 달이 안 됐다. 승선은 9일째였다. 이튿날부터 맞았다. 뱃멀미로 괴로워하는 그를 한국인 선원들이 ‘일을 못한다’며 얼굴과 복부를 때렸다. 십이지장이 파열된 채 어창에 버려졌다. 염증이 장 전체로 퍼져 사망했다.

부산의 한 선원 이주노동자 관리업체는 이주노동자들의 의무만을 강조했다. 위법적이고 인권침해적 조항을 ‘교육’이라며 가르쳤다. ㅋ사가 ‘관리하던’ 노동자 이탈률은 53%였다. 지난 1월 퇴출됐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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