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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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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서울로 데려가주세요

영화 <도희야>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소녀>,

여성들의 복수와 탈출 그 성공과 실패의 방정식
등록 2014-05-29 14:43 수정 2020-05-03 04:27
도희야

도희야

을 기억하는가. 서울에서 성악을 전공했지만 무진에서 교사로 일하며 남자들 앞에서 을 성악풍으로 부르던 인숙은 서울에서 잠시 내려온 유부남 윤희중에게 “서울로 데려가달라”며 살갑게 안겼다. 인숙과 동침한 윤희중은 인숙을 서울로 데려갈 듯이 말했지만, 아내의 전보를 받은 뒤 인숙에게 후일을 기약하는 편지를 쓰다 찢어버리고 서울로 향한다. 청소년기에 처음 소설을 읽었을 땐 알지 못했다. ‘서울로 데려가달라’는 것이 어떤 절박함을 품은 말인지. 정까지 통하고선 ‘쌩까는’ 심정이 얼마나 비겁한 노릇인지.

아주 드문 성공담

의 도희(김새론)는 전라도 어촌에서 의붓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얻어맞으며 산다. 친구들에게도 ‘삥’을 뜯기기 일쑤다. 도희는 생채기 난 얼굴로 선착장에서 혼자 나풀나풀 춤을 춘다. TV의 걸그룹 노래를 따라하며 제 흥에 젖기도 하지만, 보고 웃어줄 사람도 없다. 할머니는 도희를 쥐 잡듯 패고, 의붓아버지 용하(송새벽)는 술만 마시면 “도망간 네 어미 같은 년”이라며 패악을 부린다. 경찰대를 나온 엘리트 경찰이지만 서울에서 추문 때문에 좌천된 영남(배두나)이 이곳 파출소장으로 내려온다. 영남은 도희를 괴롭히는 아이들을 쫓아주고, 할머니의 폭행을 말려준다. 도희가 영남의 집 문을 두드리던 밤, 할머니는 사고로 죽는다. 도희는 영남을 따라다니며, 의붓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영남의 집에 머물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영남은 다른 심각한 폭력이 마을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젊은 사람들이 떠나버린 마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용하는 이주노동자들을 조달하는 일을 한다. 용하가 이주노동자들에게 어떤 폭력을 행사하는지 알면서도 마을 사람들은 묵인한다. 용하가 조달하는 노동력이 마을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직 외지인인 영남만이 폭력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외지에서 온 젊은 여성이 마을 사람들의 강고한 결계를 깨는 데는 한계가 있다. 더욱이 영남이 서울에서 좌천된 이유가 까발려지고, 도희가 영남에게 품은 집착이 과도해지면서 영남은 위기를 맞는다.

도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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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도희야〉의 소녀 도희는 스스로의 힘으로 폭력적인 마을을 벗어나지만(왼쪽),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의 복남은 여성적 연대의 실패로 불행한 결말을 맞는다. 무비꼴라쥬 제공, 필마픽쳐스 제공

영화 〈도희야〉의 소녀 도희는 스스로의 힘으로 폭력적인 마을을 벗어나지만(왼쪽),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의 복남은 여성적 연대의 실패로 불행한 결말을 맞는다. 무비꼴라쥬 제공, 필마픽쳐스 제공

약자에 대한 폭력이 묵인되는 마을에서 억압받으며 살고 있는 도희에게, 서울에서 온 영남은 어떤 존재였을까. 비로소 탈출을 꿈꿔볼 만한 유일한 통로가 아니었을까. 도희는 폐쇄적인 공동체에서 외지인을 지렛대 삼아 탈출하려는 소녀라는 점에서 가련한 면모를 지닌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치만은 않다. 도희는 할머니의 말처럼 “요사스럽고”, 용하의 말처럼 “똘기가 있으며”, 의경의 말처럼 “어린 괴물 같은”구석이 있다. 오랫동안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이 그러하듯, 가해자의 논리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가 하면, 살아남기 위해 영악함을 본능적으로 익힌 소녀이기도 하다.

의 인숙도 가련하기만 한 존재는 아니었다. 알량한 속물성으로 무장한 채 양다리를 걸치고 “성기 하나를 밑천으로 시집가보겠다는 괘씸한 배짱을 지닌 여자”라는 평판을 듣지 않았던가. 영남 역시 정의롭고 결백한 경찰인 것만은 아니다. 영남과 도희가 고즈넉한 해변에서 오렌지색 비키니 수영복을 커플룩으로 입고 일광욕을 즐기던 장면에서 보듯이, 영남이 도희에게 품었던 감정이 한마디로 부인될 만큼 명확하지는 않다. 하기야 윤희중이 인숙에게 품었던 감정도 한마디로 정의되지 않는다. “당신은 내 옛날의 모습이므로 당신을 햇볕 속으로 끌어다놓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겠다”고 편지에 쓸 정도의 연민과, 동침 뒤 “그 여자는 처녀는 아니었다”고 일갈할 만큼 남성적 욕망이 뒤섞여 있지 않았던가.

‘욕망의 모호함’이라는 정서를 공유함에도, 는 보다 명징하고 윤리적인 결말을 향해 간다. 그것은 어린 도희가 인숙보다 훨씬 용감하게 자신의 존재를 건 모험을 감행했고, 영남 역시 비겁한 이성애자 남자 윤희중처럼 도망치지는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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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으로 인한 탈출의 실패

돌아보면 폐쇄적인 마을 공동체에서 외지인과의 연정을 지렛대 삼아 탈출하려는 불온한 여성들의 서사가 꽤 존재한다. 은 극한의 상황에서 그런 시도를 꿈꾸었다가, 외지인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처절한 핏빛 응징으로 나아가는 잔혹극이다. 복남은 고립된 섬에서 물리적·성적·사회적 폭력에 시달린다. 남편은 복남을 때리고, 시동생은 복남을 성폭행한다. 시고모를 비롯한 할머니들은 복남을 착취한다. “본시 빌어먹던” 복남은 청소년기에 집단 성폭행을 당해 임신하고, 남편과 결혼해 아비가 불분명한 딸을 낳아 키우며 온갖 학대를 당한다. 복남의 유일한 소망은 딸이 대처에 나가 공부하는 것이지만, 남편은 어린 딸을 성폭행한다. 딸은 선크림과 매니큐어를 바르고 남편을 끌어안거나, 성매매 여성을 때리거나, 밥상에서 복남을 밀치는데, 이는 실제 친족 성폭행 피해아동들이 자신을 가해자의 성적 파트너로 인식해 취하는 행동들이다. 복남은 섬을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섬에서만 평생 살아온 복남이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까.

복남에게 외부 세계와의 유일한 끈은 어린 시절 잠시 섬에서 살다가 서울로 간 해원이다. 해원은 처음으로 복남을 더럽지 않게 여겼던 친구이며, 복남이 남자아이들로부터 지켜주고 싶었던 동성애적 첫사랑이다. 서울에서 은행을 다니는 해원에게 복남은 끈질기게 편지를 보낸다. 마침내 해원이 섬에 왔을 때, 복남은 해원에게 서울로 데려가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해원은 거절한다. 서울 장면에서도 보듯이, 해원은 여성들 간의 연대를 외면하고 적대를 내면화해온 인물이다. 여성적 연대는 오히려 남편이 부른 성매매 여성과 복남 사이에서 일어난다. 떠나지 않겠다던 딸도 엄마가 맞는 것이 싫다며 따라나선다. 그러나 탈출은 실패하고, 딸이 죽는다. 경찰은 진실을 은폐하고 해원은 침묵한다. 모든 기대가 무너진 복남은 마침내 살인귀로 돌변해, 섬의 피억압자였던 할아버지 한 명을 제외하고 섬의 모든 사람과 경찰을 죽인다. 살육의 섬에서 혼자 도망친 해원에게 복남이 첫사랑의 징표인 피리를 내민다. 해원은 피리로 복남을 찌르고, 복남은 해원과의 추억에 젖은 채 죽는다. 영화는 여성적 연대를 외면했던 해원이 서울에 온 뒤 뉘우치면서 섬에서의 기억을 자신의 몸에 합일시키는 실루엣을 에필로그로 담는다.

고립된 곳에서 억압받던 여성이 외지인의 도움으로 탈출하려는 서사이자 퀴어적 감수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은 와 친연성을 갖는다. 다만 복남이 외지인의 배신으로 탈출에 실패하는 데 반해 도희는 성공하는데, 자세히 보면 도희와 영남의 관계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영남이 도희와의 관계를 끊어내려 했을 때, 도희는 영남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는다. 도희는 순진무구한 진술로 영남을 옭아매는데, 이때 도희가 자신의 진술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전혀 몰랐다고 보기는 힘들다. 도희는 어렴풋이 알면서도 영남에게 복수하고 싶어서 일부러 그랬을 수도 있고,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도희는 자신이 겪는 일상적인 폭력에는 꿈쩍도 않던 공권력이 성폭력에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할머니에 이어 의붓아버지마저 독창적인 방법으로 제거한다. 또한 영남을 제 힘으로 석방시킴으로써 관계의 주도권을 쥔 채 영남과 탈출할 수 있게 된다.

복수하지만 탈출엔 실패하는

역시 고립된 시골마을에서 성적 착취와 따돌림을 당하던 소녀가 외부에서 온 소년의 도움으로 가해자들을 응징하고 탈출에 나서는 이야기다. 서울 학교에서 친구의 자살에 죄책감을 느끼는 윤수는 시골 학교로 전학을 간다. 윤수는 얼어붙은 호수에서 홀로 스케이트를 타는 신비한 소녀 해원에게 이끌린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해원은 온갖 추문에 휩싸인 채 왕따를 당한다. 해원과 점점 가까워지던 윤수는 해원의 집 앞에서 이상한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마을에는 구제역이 창궐해 돼지들이 생매장되는 가운데, 해원의 아버지는 집 안에서 팔이 잘린 주검으로 발견된다. 해원에 대한 소문이 더욱 흉흉해지는 와중에 윤수는 자신이 목격한 장면을 경찰에게 말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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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수는 결함 없는 외부인이 아니다. 서울에서 친구가 자살한 이유는 윤수가 무심코 던진 말이 소문으로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윤수는 해원에게 동일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죄책감에 휩싸인다. “네가 날 산 채로 매장했잖아”라는 해원의 말은 윤수를 자극해 해원을 위해 행동하도록 만든다. 윤수는 해원에 관한 소문이 은폐하고 있던 진짜 실체를 보게 된다. 윤수는 해원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소문으로 옭아매었던 두 명의 남근적 존재를 죽여 돼지 구덩이에 파묻는다. 윤수의 손으로 복수를 완수한 해원은 윤수와 함께 도망친다. 그러나 도망자가 된 고등학생 남녀가 갈 곳은 없다. 둘은 호수로 돌아와 스케이트를 타다 익사한다.

해원의 입장에서 의 서사를 보면, 윤수의 도움으로 복수에는 성공했으나 탈출에는 실패한 불완전한 성취다. 도희는 성공한 반면, 해원이 탈출에 성공하지 못한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고등학생에 불과한 조력자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도희가 제 힘으로 할머니와 의붓아버지를 제거했던 것과 달리, 해원은 윤수의 힘을 빌려 억압자를 제거하는 등 불완전한 주체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더 자주적이고 더 영악해질지어다

어쩌면 는 아주 드문 성공담인지도 모르겠다. 의 복남이 꿈꾸었으나 궤멸당한 여성적 연대가 비로소 성취된 이야기이자, 의 해원보다 일찍 깨우친 소녀가 또래 소년에게 이성애적 기대를 품는 대신,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개척하며 성차를 가로지르는 영악한 선택을 감행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억압의 오지에서 탈출을 꿈꾸는 여성들이여, 의 인숙이나 의 해원이 되지 말고, 의 도희가 될지어다. 더 자주적이고 더 영악해질지어다. 그리고 여성적 연대를 이룰지어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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