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1960년대까지 서구 좌파 지식인 사회에서 트로츠키는 기회주의자 또는 반동주의자의 다른 이름이었다. 기꺼이 스탈린주의자를 자처하며 코민테른의 지도를 당연하게 여겼던 당시 인텔리들에게 트로츠키는 세계 공산주의운동의 ‘암덩어리’였다. 동갑내기 스탈린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뒤, 먼 멕시코 땅에서 스탈린이 보낸 암살자에게 처참한 최후(1940년)를 맞은 트로츠키는 그렇게 죽어서도 잠들지 못했다.
“레닌의 천재성이 빛바랠 정도”관료화된 공산주의를 비판하며 트로츠키를 역사적으로 복권하려 했던 68혁명의 ‘붉은 아이들’과, 국제주의에 무심한 좌파운동을 비난하면서 ‘세계혁명론’을 새된 목소리로 지지한 국제사회주의자들(IS)의 선양에도 불구하고,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레테르에는 여전히 일말의 경멸과 냉소가 어른거린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역사학 교수이자 러시아 근현대사 권위자인 로버트 서비스의 (양현수 옮김, 교양인 펴냄)는 이런 혐오와 찬양을 넘어 한 혁명가의 빛과 그림자를 냉정하게 그려낸 책이다. 10대 후반에 혁명가의 길에 들어선 트로츠키는 평생 동안 체포, 유배, 탈출, 망명을 거듭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우크라이나 남부에서 태어난 그는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미국, 터키, 프랑스, 노르웨이, 멕시코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지를 오가며 자신이 꿈꾸는 혁명의 대의를 위해 헌신다. 그는 23살에 처음으로 ‘트로츠키’(Trotsky)라는 가명을 썼고, 그 뒤 ‘올드맨’ ‘레온 아저씨’ ‘비달’ ‘룬트’ 같은 수많은 가명을 만들어 썼다. 흔히 알려진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라는 이름에서 ‘레온’은 그의 러시아 이름 ‘레프’(Lev)의 영어식 이름이다.
트로츠키는 볼셰비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이론가이자 연설가, 대중선동가였다. 1890년대 말 니콜라예프에서 ‘남러시아노동자연맹’이라는 노동운동 조직을 세우고 활동할 때부터 그는 연설가로서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레닌의 천재성이 빛이 바랠 정도였다”는 그의 연설을 1922년 모스크바에서 직접 들은 몽양 여운형은 “마치 무슨 기적을 보는 것 같았다”며 경탄했다. 또한 트로츠키는 적군을 창시한 볼셰비키의 유능한 군사전략가였다. 레닌조차 트로츠키를 빗대어 “단 1년 만에 거의 완벽한 군대를 조직할 수 있는 또 다른 사람이 있다면 보여달라”고 했을 정도로 그는 탁월한 군사지휘자였다.
1923년부터 당내 관료화를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했던 일을 근거로 삼아 트로츠키가 권력을 장악했다면 소련의 미래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는 해석을 부정하지 않는 저자는, 동시에 크론시타트 수병들이 1923년 3월 볼셰비키 독재를 비판하고 민주주의와 자유를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을 때 진압 계획을 세운 장본인이 트로츠키였다는 점도 누락하지 않는다. 혁명의 이름으로 테러를 정당화했으며 노동조합을 국가에 종속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던 트로츠키야말로 스탈린주의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라는 서늘한 지적에서 트로츠키의 다른 얼굴은 부감을 얻는다.
지구상 거의 모든 자료 조사한 전기 결정판레닌·스탈린 전기에 이어 러시아 혁명가 3부작의 마지막 인물로 트로츠키를 선택한 로버트 서비스가 방대한 분량의 1차 사료를 밑절미로 삼아, 러시아 혁명사를 장악한 대가의 통찰력으로 인간 트로츠키의 전체 모습을 되살려낸 이 책은, 지구상의 거의 모든 트로츠키 관련 자료를 샅샅이 조사해 완성한 입체적이고 총체적인 트로츠키 전기의 결정판이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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