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얼른 들어와요. 밥 차려놓을게.”
얼마 만에 들어보는 말인가.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냉큼 달려갔다. 아내는 즐겨 보던 프로그램 에서 결국 우승한 전남팀이 결승 문턱에서 선보인 청국장찌개와 청국장으로 맛을 낸 제육볶음을 떠올렸다. “응원하던 전남팀에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지.” 과연 ‘광주의 딸’답다. 그런데 잠깐. 청국장을, 제육볶음에? 글쎄? 생각해보니 전남팀은 유난히 청국장을 즐겨 썼다. 청국장으로 맛을 낸 육회비빔밥도 호평을 받았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고 싶었단다. 사회부 기자로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니는 남편이 안쓰러웠다나. 레시피를 찾아보니 전남팀은 항정살을 썼다. 항정살은 그냥 구워먹기에도 아까웠다. 아내는 대신 돼지고기 앞다리살 600g을 준비했다. 당신도 점점 손 큰 남편을 닮아가는구나. 양파와 청양고추, 당근을 썰어넣었다. 청국장과 고추장은 3 대 1의 비율로 썼다. 약간의 청주와 간장, 다진 마늘을 넣어 버무렸다. “청국장찌개는 힘들어서 그냥 포기했어. 핫핫핫!” 대신 큼지막한 연어를 툭툭 썰어 회 한 접시를 만들었다.
문을 열자마자 고소한 제육볶음 냄새와 새로 지은 밥 냄새가 풍겨왔다. 희한하게도 청국장 냄새는 나지 않았다. 퇴근하는 아내를 위해 저녁을 차려준 일은 많았지만, 거꾸로 밥상을 받다니. 조금 감격했다. 노트북과 각종 자료로 가득 찬 가방을 던져놓고 밥상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돼지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이럴 수가. 흔하디흔한 제육볶음이 아니었다. 그냥 매운 게 아니라 착 감기는 매운맛이 부드럽게 퍼져나갔다. 이건 뭐지. 차가운 소주 한 잔으로 일단 입안을 씻어냈다. 상추와 깻잎을 한 손에 척 올려놓고, 돼지고기와 밥으로 거대한 쌈을 싼 뒤 양 볼이 터지도록 밀어넣었다. 세상에 부러울 게 없었다. 좋아하는 연어회에는 손이 잘 안 갔다. 제육볶음 한 근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대로 끝내기에는 아까웠다. 추가로 밥 한 그릇을 남은 제육볶음에 비볐다. 끝내줬다. 배가 터질 것 같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청국장을 넣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다른 맛이 날 수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아내 덕분이다. 당신은 정말이지 내 인생의 청국장 같은 여인이로세.
지난봄(제953호)에 시작한 칼럼이 벌써 마지막 회를 맞았다. 아내가 메뉴를 정해 옆구리를 ‘쿡’ 찌르면 내가 요리(쿡)를 한다는 콘셉트인데, 어쩌다보니 마지막 회를 아내가 장식하게 됐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 장을 보고 부엌에 들어가 음식을 만든다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그리고 정말 즐거운 일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요리하는 남편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지면을 핑계 삼아서라도 아내와 함께 주기적으로 상을 차려 마주 앉을 수 있었다. 격주마다 돌아오는 마감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맛있었고, 늘 즐거웠다. 칼럼은 끝났지만, 밥상은 계속된다. 오늘 아내에게 전화를 해야겠다. 일찍 들어오라고.
송호균 사회부 기자 uknow@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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